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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종교칼럼] 한민족의 후반전

성현경
2006.02.16 07:58 2,062 0

본문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을 탄 음녀처럼 중세 유럽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카톨릭교회와 영국의 국가교회를 거절하고 참 교회와 진리를 지켰던 청교도들이 바벨론을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유럽을 떠나 미국이라는 인디언의 땅에 옮겨와 부흥을 심었었다. 그런데 그 청교도로 시작한 부흥은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축복에 매여서 복음을 소홀히 여기며 교회의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를 통한 부흥을 주셨고, 다시 찰스 피니(Charles Finney)를 보내시며 오늘날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이라고 부르는 두 번의 부흥을 주셨다. 당시 술집들은 파산신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마을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구원으로 고뇌하였고 교회밖에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미국을 긍휼히 여기셨었다.

100년 전 조선에 복음을 소개해 준 미국의 선교사들은 바로 그 청교도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어두움에 덮힌 동방의 땅에 복음이 전해졌고 동일한 부흥이 평양으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세워졌다.
그 부흥이 일어났던 북녁땅은 카인의 시기로 죽은 아벨처럼 공산주의의 분노로 붉게 물들었지만, 남한땅은 그 부흥의 혜택을 누리면서 호세아 시절의 분단된 유대 땅처럼 번성할수록 타락하고 있다. 바알신을 섬기던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북한은 공산주의 우상으로 미쳤고, 남한은 남왕국 유다처럼 정권의 정통성만을 주장하며 바리새인의 이기심으로 썩고 있다. 평양의 부흥 이후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북한교회는 신대륙의 인디안처럼 사라지고 그 부흥의 기업을 누리는 남한교회는 하박국의 탄식을 듣게 된다. 축복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그 특권만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그 축복의 설탕 속에 썩는다, 성경이 이미 보이신대로.

한국교회의 전반전은 사력을 다해 어렵게 한 골을 먼저 넣곤 하던 시절의 한국축구처럼 그렇게 마쳐지고 있다.
가난에서 출애굽한 남한 교회는 형제들이 팔아버린 요셉처럼 고난 속에 갇혀버린 북한을 향한 축복의 의미를 잊어버렸다. 우리가 맡아둔 축복은 오히려 우리를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만들고 있다.
이제 되돌아갈 한민족의 애굽은 없다. 역사의 허물과 죄는 헬레니즘의 역사관처럼 항상 반복되지만 역사의 기회는 유다이즘의 역사관처럼 단회적이다. 지나간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눈뽑힌 삼손에게는 죽음을 통한 회개의 기회가 있을 뿐이다. 역사는 수능시험을 위해 암기해야 하는 주요과목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다. 고고학적인 추억이 되어버린 황폐한 평양의 부흥을 다시 회복하려는 한민족의 열망은 어디에 있는가 ....

주님은 축복의 누림에서 나와서 퇴락한 옛 예루살렘을 아파했던 고독한 한민족의 느혜미야를 찾고 계시다. 예레미야의 눈물과 탄식을 기억하며 그의 선지자적인 고난의 삶을 상속하고 바벨론의 안정과 축복을 나왔던 느혜미야처럼, 퇴락한 옛 평양의 부흥을 추억하며 성공과 축복의 자리에서 나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애굽과 바벨론에서, 헐리우드와 맨하탄의 누림보다 나은 줄로 여기는 사람과 교회를 찾고 계시다.

21세기의 한반도 역사가 도대체 흐를 곳이 없다.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북조선은 동북공정의 음모를 보면서 중국이 두만강을 건너 자기들을 도왔던 6.25동란의 중공군이 아님을 모르는 걸까. 21세기의 미국경제를 위협하면서 그들의 군사동맹은 더 이상 우방이 아니라 중국대륙의 최강으로서 예루살렘까지 비단길을 놓았던 한무제(漢武帝)의 한사군(漢四郡)처럼 그 땅을 점령하려는 것을 북조선은 어떻게 모른단 말인가.

엄마 리브가를 믿고 살아온 야곱이 강한 에서를 피하고 만난 자기보다 약아빠진 라반처럼 일본은 늘 그렇게 우리를 속이고 있다. 에서와 야곱의 분열을 이용한 라반처럼 36년간 나라를 빼앗았던 그들은 어떻게 지금 독도까지 노릴 수가 있을까. 엄마 리브가의 말씀만 믿고 야곱이 라반집으로 떠난 후 리브가는 이상하게 성경에서 사라진다. 리브가를 키운 유모의 죽음조차 언급된 성경(창35:8)에서 리브가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실종된다.

8.15해방 이후 남한이 그렇게 의지하고 따랐던 미국은 야곱에게 사라진 엄마 리브가처럼 우리에게 보호가 되지 않을 것만 같다. ‘네 형 에서의 분노가 풀리거든 너를 불러오리라’(창세기 27:45)약속했던 리브가가 성경에서 실종된 것처럼 미국은 요즘 조선의 역사에서 그렇게 빠져나가는 것처럼 혼돈되고 공허하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그렇게 외롭다. 북한의 분노는 언제 에서처럼 풀릴까. 이젠 아무도 도와줄 이가 없는 것 같다.

얍복강에 홀로 선 야곱처럼 남한은 또한 고독하다. 우리는 에서를 밀어부칠 힘도 없고 라반의 간교한 지혜을 피할 의지도 없이 역사의 얍복강에 서글프게 서 있다.

하나님은 붉은 에서를 다시 만나야만 하는 한반도의 숙명 앞에 부셔져야만 하는 환도뼈를 보이시고 계시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삶의 모든 영역에서 치유받을 수 있는 상태를 지나서, 이젠 그대로 부셔져야 하는 환도뼈가 보일 뿐이다.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져 흘러온 분열된 정서 그것은 라헬과 레아, 빌하와 실바에게로 나뉘어져야 했던 야곱의 한이다.

하나님은 이제 이 한맺힌 민족의 정서가 오로지 자신에게 드려지기를 원하신다. 눈물의 간구를 길어내시려고 한다. 우리는 바라볼 이가 주위에 더 이상 없다. 하늘 아버지만을 바라보아야 할 순간이다. 건널 수 밖에 없는 역사의 얍복강에서.

북한이 오랫동안 분노로 파 내려왔다는 땅굴도, 땅 위에서 해저터널로 이미 숨긴지 오래라는 북한의 핵시설도, 남파 공작원들의 그림자정부도 우리를 더욱 하늘의 아버지만을 바라보게 한다.
그 하나님은 에서과 라반의 환도뼈가 아니라 야곱과 같은 우리의 환도뼈를 치시려고 한다. 눈물로 간구하는 야곱을 치셔야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안정과 축복을 주시는 기쁨을 포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 위에 연단과 고난을 부으시는 고통을 택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픈 사랑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고 연약하게, 겸손하게 만드시고 계신다.

구약의 선지자서는 두 부분으로 편집되었다. 이사야부터 다니엘까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월등히 훌륭한 대선지자들이었다. 그런데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리로 만든 모세의 뱀을 바라볼지언정 자신들보다 성숙한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렇게 대선지자들로 구성된 전반전을 마치고 다니엘서 이후 호세아로 시작하는 후세에 신학자들이 소선지자라고 부르는 이들을 세우셨다. 그 구약의 후반전에 투입된 소선지자들의 특징은 오히려 보통사람들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소선지자서의 시작인 호세아는 불륜으로 바람난 아내를 가진 자였다. 누가 가정도 지키지 못하는 그를 통해서 나오는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 다음의 아모스는 자신이 선지자가 아니고 그저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라고 소개한다.(아모스 7:14) 하박국은 타락하고 불의한 자가 성공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무화과 나무와 포도와 감람소출과 축산업이 망한 자로서 실패가운데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질문을 드린 이였을 뿐이다. 자신을 선지자라고 여긴 적도 없다. 요나는 하나님이 세우시자마자 불순종하더니 불평으로 마친다. 하나님은 그를 세우신 후 오히려 그를 달래야만 했다. 누가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을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말씀도 듣지 못했는데….

우수한 대선수로 포진한 전반전이 안 풀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관중들보다 못한 소선지자들을 구약의 후반전에 투입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고 뜻이시다.

우리보다 훌륭한 목회자들을 통해 은혜받고 역경으로부터 출애굽한 한국교회의 전반전은 대선지자들을 통해 돌이키지 못했던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청중들은 귀만 높아지고 비판과 분별만 생기고 우리의 헌신은 역전을 위한 역량에 미치지를 못한다. 그들은 더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주는 교회를 찾을 뿐이다. 그들이 옮기면 어려워지고 말 게임을 지키려는 십자가는 만나기 어렵다. 한국교회의 팀웍은 한국 축구보다 못한 것같다.
하나님은 이제 한국교회의 후반전을 관중보다 못한 이들은 통해 준비하고 계신다. 그들은 도무지 선지자 같지 않다. 우리를 위한 말씀을 간직한 이들은 호세아, 아모스, 요나와 하박국 같은 분들이다. 후반전의 우리에겐 비젼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분별력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부정적인 비판이든지 긍정적인 분별력이든지 간에 고통과 절망을 통과하기엔 부족하다. 통찰력이 있어도 어두움 앞에 무기력해 질 것이다. 세상적으로는 자격이 안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소선지자들의 겸손과 헌신을 통해 주님은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고 계시다.


우리들은 유명한 목회자들을 통해서 돌아오기에는 탕자처럼 너무 멀리 나아가고 있다. 우리에겐 대목회자의 영성을 듣고 돌아오기엔 너무 교만해져 버렸다. 우리보다 못한 지체들에게 맡기신 주의 음성을 듣는 겸손이 필요하다. 멸망하게 될 여리고 성을 향한 하나님의 판단을 주님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기생 라합에게 맡기셨다. 누가 기생 라합의 말을 들었겠는가. 그들 여리고 주민들은 그것을 듣기엔 성공으로 너무 높아져버렸다.

대대에 이르는 왕권의 약속을 받은 다윗의 타락을 돌이키기 위해 주님은 고학력의 유명한 대도시 선지자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목회무대에 단 서너 번 등장하는 나단이라는 무명의 선지자를 준비하셨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겸손한 다윗은 십계명을 거의 범하게 되는 타락 속에서도 무명의 선지자 나단을 통해 회복되었다. 다윗은 회개하기 위해서 율법에 대한 해박한 해석과 영성이 깃든 명설교보다는, 어린이 창작동화대회에 나가도 뽑히지 못할 나단 선지자의 삼류 설교를 들어야 했다. 나단의 겸손한 순종으로 주님은 다윗의 겸손한 회개를 길어내셨다.
한국교회는 나단의 말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그는 대도시 목회자 인선에서 거절당한 이일지 모른다. 그는 낙도에서 어느 산간 골짜기에서 세인들에게 무시당하며 목회하는 분일지 모른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렇게 이미 끝났지만 예수는 곧바로 탄생하지 않으셨다. 신구약의 중간기라고 부르는 300년 동안, 유대 땅에는 외경이라고 불리는 계시문학이 발달하였다. 예수가 탄생하기 직전에 다니엘이 예언한 역사의 마지막 4번째 제국 로마는 세상을 영웅 쥴리어스 시저가 암살 당하고 내란을 겪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게 되고 그 로마제국의 동방 최전선 갈릴리는 클레오파트라의 후광을 얻은 헤롯왕이 다스리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누가복음 2:1 영어 ‘authority’의 어원이 되는 ‘권위’라는 뜻의 라틴어)라는 이름을 원로원으로부터 얻으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실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제국의 내란이 평정됨으로 원로원의 공화정이 끝나면서 단일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로마의 평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셨다. 그리고 유대 땅의 종말론적 계시 문학과 비젼의 혼란이 가라앉은 후에, 유대역사의 절망의 밤을 지새면서 적막한 하늘을 소리없이 가르는 큰 별과 함께 고요히 태어나셨다.

부흥은 군중의 힘과 화려한 조명과 음향시설을 의지하는 대형 집회를 통해 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처럼 예기치 못한 마굿간이라는 겸손한 곳을 통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 같고, 지식과 구변이 어쩌면 우리보다 못한 아모스와 나단처럼 겸손한 소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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