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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책소개: Judaism & Christianity

이세형
2006.01.24 02:41 1,143 0

본문

유대인과 초기 교황으로부터 시작되는 천주교,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 - 이들 삼자간의 시각을 조명해볼수 있는 아주 귀한 책입니다. 교회사의 한부분을 유대인의 시각으로 자세히 들여다볼수 있고, 각 종교간의 갈등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점검해볼수 있습니다. (내용이 8페이지 분량으로 좀 길지만 귀중한 자료이니 별도로 복사하여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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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찌하여 십자가가 칼이 되었는가? (기독교 반 유대주의의 비극적 역사)
저자: Richard Booker 출판: 살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4세기에 요한 크리소스톰(344 A.D.-407 A.D; John Chrysostom)이란 뛰어난 설교가가 있었다. 그는 초대 교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을 미워했고, 그의 설교가 반 유대주의적인 불꽃을 더욱 부채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시도한 것은, 기독교를 유대적 뿌리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그 후에 1600년 동안이나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실행이 된 것이다.

저자는 유대인 중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여성을 만났다. 그 여인은 자기 친척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유대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믿지 않아.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이지.” 지난 1800년 동안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관계의 비극적 역사를 드러내는 말이다. 더욱 아돌프 히틀러는 “그러므로 오늘 나는 내가 전능하신 창조주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나의 투쟁”, 랄프 헤이만 역, 보스턴)

어찌하여 십자가가 칼이 되었는가?

1. 유대인의 첫 번째 독립운동
교회의 첫 3세기 동안 반 유대주의의 씨를 뿌려왔다. 이 것들 중 첫째 사건은 A.D.66년 경 열심당원들이 일으켰던 ‘유대인들의 첫 번째 독립운동’이었다. 73년 마사다의 함락과 함께 끝이 나는데, 967명이 로마군의 손에 죽임을 면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인들을 미워하는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이었고, 로마인들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기를 원했다. 로마 통치자인 플로러스는(Florus)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68년 황제 네로가 죽자 로마로 불려가 황제가 된다.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명을 받고 70년 예루살렘과 유대의 성전을 짓밟았다. 이 날은 느부갓네살 왕이 B.C. 586년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했던 날과 똑같은 날이었다. (렘 39: 2) 대략 100만명의 유대인들이 이 예루살렘의 공격으로 죽임을 당했다. 생존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노예로 팔려서 세계의 열방으로 끌려갔다. 이것은 확실히 유대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하시며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찌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눅 21: 20-21)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유대인의 두 번째 독립운동
두 번째로 큰 사건은 유대인의 두 번째 독립운동이었다. 3년간 지속되었다. 135년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에 의하여 진압되면서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학살을 당하게 된다. 50만명이 넘게 죽임을 당했다.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대 성전의 자리에 쥬피터 신전을 세웠다. 이 운동은 유대민족만 파괴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과 다른 유대인 사이를 더욱 깊이 갈라놓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랍비 아키바의 도움을 입어, 바르 코흐바라는 이름의 인물 안에서 군사적인 메시아의 모습으로 보여졌으며, 스스로가 메시아라고 주장하여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싸우는 것을 거부했다. 때문에 독립운동에 가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 코흐바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랍비 아키바가 바르 코흐바를 거짓 메시아로 인정했지만, 그는 상당히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그러는 동안 믿는 유대인들을 다시 한 번 더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가야만 하게 했다. 이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르 코흐바를 지지했다는 자체가 예수님께 대한 최종 거부의 표시였던 것이다.

3. 랍비 중심의 유대교 출현
세 번째 기독교를 유대적 뿌리로부터 분리시킨 사건은 ‘랍비 중심의 유대교의 출현’ 자체였다. 첫 번째 유대인 독립운동에서 살아남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욥바의 근대 도시에 가까이 위치에 있던 조그만 마을 야브네에 모여 있었다. 유대교의 생존을 위한 전략은 하나의 아카데미(신학센터)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랍비들은 유대교를 발전시키고 가르치며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 때 바리새파 안에는 샤마이 학파(민족주의적이며, 전문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유대의 율법과 전통의 엄격한 해석을 지켰던 우파적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보고 있다. 힐렐 할파는 좀 더 온건적이었고, 랍비들은 힐렐 학파의 가르침을 자기들이 유대교를 맞추지 않은 반면 믿는 유대인들과 후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을 소망했다. 랍비 자카이가 랍비 중심의 유대교를 위한 기초를 세웠다면 그의 계승자 라반 가말리엘 2세는 위신과 명성을 덧입혀 주었다. 요약하면, 기독교는 첫 째, 두 번째 유대인 독립운동과 랍비 중심적 유대교의 출현의 결과로서 그 유대적 뿌리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기독교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의 도시로 옮겨졌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배반자 이단자로 취급되었고, 그들의 유대적 신분성을 상당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약 성경에 각각 다른 책을 덧 붙였고 그럼으로써 더욱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4. 이방의 기독교
기독교가 반 유대주의에 있어 두 번째 근본적 요인은 기독교가 이방인을 받아드리고 그 후에 세속화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엔 주된 전개 단계가 있었다.

5. 희랍적 세계관
이 세계관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갖고 있었다. 예수님은 유대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셨으며, 율법을 잘 준수하는 유대인으로 사셨다.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유대인이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고, 믿는 유대인들은 이 메시지를 이방인에게 전하는데 성공했고, 이러한 이방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 중 대다수가 유대민족에 대한 안목을 거의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희랍의 철학을 가르쳤으며, 교회 안으로 희랍적 세계관을 가지고 들어왔다. 교회를 그 유대적 뿌리와 연결시켜주고 보존하는데 꼭 필요한 히브리적 배경이 그들에겐 상당히 부족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해도 여전히 플라톤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희랍철학을 타나흐(Tanakh; 구약성경)와 융합시켜보려는 그들의 시도 때문에 유대적이기 보다는 더욱 자주 희랍적인 가르침과 인지를 적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성경적이 전혀 아니었다. 플라톤은 물리적, 물질적 세계는 악하다고 가르쳤는데, 성경의 가르침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희랍적 세계관은 2세기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의 교리와 실행에 영향을 주어왔고, 기독교의 반 유대주의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인간에겐 본래 자기들의 다른 태도와 방식을 갖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6. 초대 교부들의 가르침
이런 희랍적세계관의 영향과 성경의 히브리적 투시가 부족했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대부분의 교부들은 매우 반 유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글이나 연설을 통해 표출했다. 저스틴 마르터는 유대인과 맺으신 하나님의 계약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안에서 유대인들을 대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세기에 가장 중요한 기독교 저술가 터튤리안은 “유대인을 반대하며”란 책에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유대 민족 전체를 비난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님께로 인도할 으뜸되는 수단으로 타나흐(Tanakh; 구약성경)보다는 희랍철학을 강조했다. 오리겐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고소했다. 유세비우스는(263A.D.-339A.D.)는 첫 3세기 동안 교회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는 타나흐에 있는 약속과 축복이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고, 유대인에겐 저주가 있다고 가르쳤다. 교회가 하나님의 계약 안에서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대신한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라고 선포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교회의 주교였으며, 당시 가장 위대한 설교가 이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을 비방하는 설교를 8번을 여이어서 했다. 하나님이 항상 미워하신다고 하며,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유대인을 미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이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학살자 이었고, 마귀를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7. 어거스틴의 글을 통한 영향
어거스틴(Augustine; 354 A.D.-430 A.D.)은 교회와 세상의 대하여 새롭게 성경을 해석한 신학자이다. 그는 저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교회와 유대인과 관련해서 가진 연관성을 영적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천년왕국은 문자적이 아닌 영적인 의미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기록했고, 왕국은 현재 있는 것이고, 미래의 것이 아니며,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 영적인 의미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8.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
이방의 기독교 안에서 두 번째 중대한 단계는 교회의 교부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유대민족 전체의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일세기의 유대인들은 다섯 개의 주된 분파 또는 운동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두개인-성전에서 희생제물과 예배를 관장하고 돌보는 제사장들; 성전의 예배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생활 중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에 이들의 위세가 매우 강했다.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면서 이들은 종말을 맞이한다. (기본적으로 ‘고위층’이었고, 희랍, 로마 세계에서 안락하게 살았던 귀족적인 무리였다.)
*바리새인-타나흐와 구전율법의 기초적인 교사들;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정치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상당히 존경을 받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성경과 전승과 회당을 강조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에 의한 성전의 파괴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 존속했고, 야브네에서 랍비 중심적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그 후에도 수세기 동안 유대적인 믿음과 실행의 기초를 놓은 것은 바리새파들이다. (기본적으로 ‘중위층’이었고, 희랍, 로마세계에서 안락하게 살지는 않고, 보통사람과 거의 동일했다.)
*열심당원-유대인 분파였는데, 로마를 폭력으로 뒤엎기를 원했던 민족주의자들; 첫 번과 두 번째 유대인 독립운동기간 동안 죽었던 독립운동주의자들이었고, 마싸다에서 집단 자살한 자들이 이 무리이다.
*엣세네파-유대인 분파였는데, 이들은 금욕주의적인 무리; 어떤 사람들이 믿기로는 이들이 쿰란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고, 사해 두루마리 성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A.D.68년에 이 공동체를 파괴했다.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첫 번과 두 번째 독립운동기간 동안 살아남았다. 곧, 유배를 당하며 그들의 운동이 유대적 분별성을 잃어버렸고, 그 유대적 뿌리로부터 잘라져 나온 이방의 기독교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정말 예수님을 죽였는가?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을 우리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죄를 위해 속죄제로 내어주셨다.

9. 성경의 비유적 해석
이방 기독교의 세 번째 중대한 단계는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도입하게 되면서부터 전개된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구절의 유형이 있다. ‘비유적인 진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쓰여진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을 때 곡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이런 원리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에 영적으로 해석하여 영성화시켰고, 비유적으로 해석하였다.

10. 오리겐과 알렉산드리아 학파
1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는 B.C.331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도시는 상업과 학문의 거대 중심지였다. 아마도 그곳엔 고대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던 것 같다. 희랍인이 세운 도시였고, 대학에선 희랍의 철학과 학문, 문학, 희랍적 신비를 해석하는(*해석론은 비유법) 희랍적 방법론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장직을 맡았던 클레멘트는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기독교로 전향한 후에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드리도록 기독교에 희랍 철학을 잘 섞어 놓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철학을 주신 것은 궁극적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이고, 유대인들을 메시아께로 인도하기 위해 타나흐(구약성경)를 주신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르쳤다. 클레멘트가 모세보다는 플라톤과 밀접하여 그 결과로 그의 학생들도 예루살렘보다는 아테네에 마음이 향해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그 유대적 뿌리로부터 잘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는 클레멘트의 계승자인 “오리겐”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A.D185년경 이집트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를 당하였고, 그도 순교하기를 원했지만, 어머니의 만류로 인해 하지 못했다. 오리겐은 철학, 신학 지식의 방대함을 보여, 사람들은 그에게 삶의 모든 면에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로마 제국 전체 세계에 비교될 만한 인물이 없을 정도였다. 18세 때 학교 교장이 되었고, 다른 학교를 또 세우고, 도서관도 세웠다. 오리겐은 성경의 비유적 해석법을 가르쳤고, 이 해석법은 본문의 문자적 해석을 거부한다. 이렇게 되면, 보통은 본문의 참된 의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변적 환상과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겐에게 이것이 일어난다. 자신이 읽는 것, 성경을 포함하여 거기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냈다. 본문의 합당한 자연적 의미를 찾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부질없는 상상력에서 자란 결론에 이른 것이었다. 동연배들 중 어떤 이는 그를 이단자라고 하였다. 그러한 관점으로 인해 한 번 이상 파문을 당한다. 그러나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 어떤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이 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서 문자적 이스라엘을 대체한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라는 가르침을 낳았다. 이스라엘의 심판과 저주를 약속한 성경구절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교회와 이방세계가 받아들이게 했다. 마태복음 19장 12절을 받아들여 스스로 거세하였다. 이가 죽기 전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의 학생들 중 많은 초대교회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그 이후, 1600년대의 청교도들의 부흥이 있을 때까지 이어지는 세대들을 통하여 교회 안의 반 유대주의적 토대를 닦았다. 팜필루스는 카이사리아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거기서 그는 학생들에게 오리겐의 관점을 가르친다. 이의 유명한 학생이 바로 ‘유세비우스(Eusebius: A.D.263-339)’였다. 유세비우스는 오리겐의 열렬한 추종자이었다. 그는 ‘교회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까지 처음 300년 동안 교회사를 기록한 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책이 바로 유세비우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이다.
카이사리아의 주교가 되었고, A.D312년 경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적 종교로 승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11. 이교화 된 기독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기독교로 개종시킴으로써 제국과 기독교를 하나로 화합하지만, 새로운 종교 자체의 대한 갈등은 통합되지 않는다.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다. 그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세웠고, 유대인을 경멸하는 것과 유대인을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유일한 태도라고 선언했다. A.D.339년경에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범죄로 취급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아로 고백한 유대인들도 자기의 유대 신분을 포기하고 이방인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로마제국/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 군사적 강력함과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법이 결탁되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왕국으로 간주되었다. 교회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나 구주로써 개인적 관계를 전혀 맺지 않은 이교도들로 곧 붐비고 넘치게 되었다. 4세기 동안 기독교 종교기구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5세기에는 관계가 깨어졌고, 로마제국/교회는 유대인들을 영원히 표를 지니고 제2계급의 시민으로 간주되었다. 강력한 로마제국/교회가 벌써 일찍부터 펼쳤던 반유대주의적 정책이 유대인들의 미래의 기초를 놓았고, 결국 그후 1500년 동안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수난과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

12. 십자군
11세기, 12세기, 13세기의 걸쳐 일어난 이 십자군 전쟁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어두운 시간 중 하나이었다. 십자군이란 교회의 권위와 축복 아래 지휘되었던 원정군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거룩한 땅을 모슬렘 교도들로부터 되찾고, 이슬람교의 전파를 막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뿐인 기독교인들로써 악한 마음을 품었었다. 십자군 원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순하게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고서 교황에 의해 용서되었다. 이들은 모슬렘 교도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증오하였다. 수천의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거룩한 땅은 실패했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깃발 아래서.

13. 반 유대주의
12세기에도 유대인에게 반대하는 새 요소가 등장했는데, 이것은 ‘의식적인 살해’에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즉, 매년 유월절 때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소년을 죽여 그 소년의 피를 유월절 의식에 사용하므로 이것을 문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항상 지역의 유대인 주민들에 대항하는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들이 유대인들에게 격한 폭동으로 일어났다.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방법으로 이방인 영주들은 이따금 모든 유대인들에게 뺏지를 달게 하고, 다른 옷을 입게 하였다. 또한 강제로 ‘게토’라고 불리는 제한된 구역 안에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태도가 히틀러가 정당하게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1347-1350년 사이에 유럽에 번진 흑사병으로 원인을 유대인에게 전가해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뒤집어썼다. 이 전염병이 그치기 전에 수 천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수백 개의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14. 종교재판
다음에 종교재판이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15, 16세기)이 일어났던 시대는 교회의 전 역사상 가장 끔찍한 기간 중 하나였다. ‘기독교’ 종교 지도자들은 이교도라고 잘 못 고소된 참된 기독교인들을 수만 명 고문하고 살상하였다. 종교재판 담당자들은 피의 굶주린 것처럼 수 천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동안 페르디난도 이자벨라는 교회의 주장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큰 고난을 가져다 줄 체계적인 책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례를 받든지 추방을 당하든지 해야했다. 세례를 받으면, 유대인의 신분성을 포기해야 했고, 거부하면 그들의 재산을 압수 당하여 높은 값의 경매되었다. 말뚝에 매여 화형식을 당하든 가, 거의 생존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추방을 당해야 했다.

15. 루터-대학살의 신학자
1523년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That Christ Was Born a Jew)]라는 제목의 현수막을 썼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해 동정을 표현했고,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유대인인데 이런 기독교 신앙의 멍청하고 바보스런 가르침을 받았다면 나는 아마 기독교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 학교와 회당을 불태울 것과 유대인들이 정착지(게토)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다. 불경스럽다고 판단한 모든 유대 문학적 작품들을 몰수하려고 시도했으며, 임종시에 랍비가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는 유대교가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안전하고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게 했으며, 재산을 몰수하여 기독교 새신자들을 후원하는데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더군다나 일종의 벌로, 손으로 하는 노동을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후의 루터의 글은 유대인들에게 독소로 작용했으며, 히틀러가 대학살을 기독교적 정당성을 근거로 하는데 사용되었다. 반 유대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루터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이 사과하고, 루터의 글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낸바 있다.

16. 러시아에서 유대인 학살(러시안 포그롬: Russian Pogrom)
19세기 말엽까지 이런 관계는 유지된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일찍부터 서구 유럽에서 동구로 이주했고, 폴란드는 일종의 피신처가 되었다. 폴란드의 통치자들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 자치를 허용하였고, 위협에서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러시아와 국경지대에 있는 폴란드 여러 지역과 루마니아와 그 밖의 여러 동구 유럽국가에서 대단위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고있었는데, 러시아가 이 나라들을 침략하여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함께 있는 거추장스런 수백만의 유대인을 의식했고, 앞의 국가들처럼 자기들의 내적 어려움의 속죄양으로 이용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은 3분의 1은 개종시키는 것, 3분의 1은 이주시키는 것, 3분의 1은 굶겨 죽이는 것이었다. 러시아 말 ‘포그롬’(대학살)은 파괴를 뜻하는 것으로서 1881-1921년 사이 교회의 교묘한 승인하에 일어났던 공식적 유대인 박해를 지칭했던 이름이다. 이들은 다시 서방으로 도망가는데, 히틀러가 있었다.

17. 홀로코스트(대학살)
히틀러는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을 말하는데, 유대인들 자신은 이것을 “홀로코스트”라 부른다.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기 위하여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고, 계획을 거의 다 이룰 뻔하였다. (그러나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 독일은 1차 대전에서 초토화되었고, 이것을 유대인에게 책임 전가를 하게된다. 1933년 1월에 총리가 되자마자 유대인을 어떻게 박해할 것인지 계획하기 시작,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모두를 수용소로 집결시킨다. 1939년, 이 수용소들은 죽음의 수용소로 돌변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통치권을 전 유럽으로 넓힐 때 유대인들을 화물열차로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이러한 수용소로 실어 날랐다. 이 죽음의 공장은 대량으로 살상이 가능했으며, 어떤 곳에선 매일 25,000명씩 죽일 수 있었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대략 9백만 정도였는데, 히틀러의 의해 3백만으로 감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자각을 주어서 세계는 유대인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고토인 팔레스타인 외에는 안전한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의 예언대로 성취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은(후에 대통령이 됨)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으며, 1945년 4월 12일에 오드러프 죽음의 수용소으 들어가서 스스로 나치의 잔악 무도함의 증거를 조사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나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의 대학살 박물관을 방문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을 강력하게 권하는 바이다. 만일 이스라엘에 간다면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바쉠을 방문해 보라.
나는 이 세계가 현재 또 다른 대학살을 향하여 건축되어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 24에서 ‘이방인의 때’가 찰 때까지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되찾았을 때 이것은 이방인의 때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이방국가들이 무너지고 있는 이유이다. 이제 그들의 날은 끝났다!
이방의 국가들이 쇠퇴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안정성을 되찾고 영광스런 과거처럼 자기의 국가를 회복해보려고 시도하겠지만 그것은 모두 헛될 것이다. 그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국가를 다시 세워주겠다고 공약하는 근본주의적 민족주의 당을 지지하며 지도자를 선출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정부들이 그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유대인들을 비난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블라드미르 지리노브스키(Vladimir Zhirinovsky)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당은 러시아 의회의 선거정에서 거의 25%의 지지율로 첫 번째 의석을 차지했다.
나는 미국이 계속해서 무너져 내릴 것이고 아마 재정적 파탄을 겪을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이 비록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 되어 오기는 했지만 나는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도 그러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미국이 재정적 파탄의 이유를 유대인들에게 돌릴 것이고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과 참된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러시아와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지금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강력히 촉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러한 국가들을 심판하시고 있다. 그들은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서 여러분, 유대인들을 탓하고 여러분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라고 말했던 독일의 유대인들처럼 되지 말라! 또 다른 대학살에 걸려들지 말라! 미국의 후라이팬에서 빨리 도망쳐 나오라! 시온으로 돌아가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열방의 빛으로서의 운명을 성취하라! 이것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18. 반 시온주의
이제 유대민족은 자기의 옛 땅에 모여들고 있으며, 반유대주의는 ‘반시온주의’로 가장한 채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대한 매질은 아랍인들 뿐 아니라 ‘기독교적’국가들과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행해진다. 유대민족은 지난 2000년 동안이나 끔직한 핍박을 당한 것이다. 이 중 상당한 양은 기독교의 교회로부터 자행되어졌다. 오늘날에도 ‘오리겐주의자들’이 설교단을 채우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이해’는 ‘대체신학’이라 불리고 있고, 오리겐-어거스틴의 하나님 왕국에 대한 견해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왕국의 영역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그것의 문자적 측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영성화 시키려는 경향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왕국의 문자적 영역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오늘 현재적 삶의 실제를 잃어버릴 것이고, 모든 것을 미래의 것으로만 격하시키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이 두 가지 측면(영적이고 문자적인)을 균형있게 인식하는 것인데, 성경은 단순히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서 이 양면을 잘 제시하고 있다.

19. 기독교인들의 반응
우리는 교회의 과거의 죄(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주위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에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이방 국가들로부터 그들의 옛 땅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실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을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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