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광야에 새겨진 다윗의 유언
성현경
2004.11.0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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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같고 구름 없는 아침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같으니라.’ 하시도다.” (사무엘 하 23:1~4)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정치권력과 세상의 모든 축복을 소유했었던 그의 아들 솔로몬의 결국은 다 헛되었다고 전도서에 고백했다. 우리가 현재 추구하고 있고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던 솔로몬은 왕으로서 그의 삶이 풀의 꽃처럼 떨어지고 시들었다고 그렇게 토로한다.
그런데 다윗은 초기부터 사울왕의 미움으로 죽음의 위험 가운데 광야를 유리해야 했고 미국 불법체류 이민자의 생활보다 더 어려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시 광야를 살아야 했었고, 그의 신하 스루야의 아들들을 제어하지도 못한 채 그들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오히려 왕으로서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았다. (사무엘하 3:39) 그런 험악한 삶을 살아낸 다윗의 마지막 삶은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다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다윗 스스로 알았다. 그의 삶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대화로 마쳐진다.
견제되고 신경쓰이는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어려움없이 소유와 성취만을 즐기던 솔로몬왕은 그 모든 누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었다고 고백하였다.(전도서2:11)
모든 것을 소유하고 정적들을 심판하고 제거한 솔로몬왕과 자신이 악기와 창검으로 섬겨야 했던 상관에게 쫓김을 당하며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과 모반을 겪고 부하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다윗의 마지막 삶을 다르게 한 점은 무엇일까.
솔로몬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다윗이 샬롬 즉 평강과 온전하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뜻으로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다.(사무엘하 13:25) 그런데 그 후 성경에서 한번도 솔로몬은 그 자신을 여디디야라고 불리우거나 부른 적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을 무시하고 성취와 소유의 삶을 누리고 살았던 솔로몬은 헛될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은 그의 이 땅에서의 삶 마지막을 새로 돋아나는 풀과 같은 감격으로 마친다. 그 험난한 삶을 살았던 다윗은 어떻게 그런 정서로 삶을 마칠 수 있었을까. 다윗은 유언에서 자신을 사무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남기고 편집된 150편의 시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했던 유대광야에서 주로 기록되었다고 유대인학자들은 말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야곱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말한다.(시편 24:6, 한글 성경에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되어 있고 ‘하나님’이 작은 활자로 되어있기도 한데 이것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기 때문에 첨가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광야에서 야곱의 얼굴을 구해야만 했다. 시편에 흐르는 다윗의 야곱이해는 왕으로서의 삶을 산 그가 가나안과 아람과 애굽을 오가며 험악한 이민자의 생을 살아야 했던 조상 야곱을 부러워하였다. 약속받은 땅도 소유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조차 먼저 취하지 못했고 그가 죽었을 때는 가족이 함께 묻혀있는 족장의 묘터 헤브론에 묻지 못하고 객사한 채 베들레헴의 길 가에 묻어야 했고 자기 자신 조차 약속의 땅에 묻히지 못하고 애굽에서 한많은 삶을 마쳐야 했던 슬픈 야곱을 다윗은 왜 그렇게 묵상한 것일까.
야곱은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이 환경과 남에 의해 운명지어진 종처럼 일개 서민의 삶을 살았다. 다윗은 그 야곱을 부러워 한것이다. 다윗은 안정된 예루살렘 궁에서의 삶이 아니라, 절망과 위험 가운데 야곱과 유사한 삶으로 유리하던 유대광야에서의 삶을 시편으로 남겼고 그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살았다.
야곱은 그 험악한 삶을 살면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단 한가지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을 다윗은 묵상했다. 새 이름, 이스라엘.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던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은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새 이름을 뒷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명함처럼 소홀히 하고 말았다.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그에겐 그 새이름보다 성취와 축복이 중요하였었고 결국에 그의 말년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고 하였었다.(베드로전서1:25)
다윗의 유언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말,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었다.
다윗의 삶은 신약에서 이루어질 복음의 시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윗이 유리하던 광야는 우리를 위하여 복음과 다윗의 유언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 회개로 시작된 복음은 생의 마지막을 결정지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혼미하고 슬프고 지칠지라도.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같고 구름 없는 아침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같으니라.’ 하시도다.” (사무엘 하 23:1~4)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정치권력과 세상의 모든 축복을 소유했었던 그의 아들 솔로몬의 결국은 다 헛되었다고 전도서에 고백했다. 우리가 현재 추구하고 있고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던 솔로몬은 왕으로서 그의 삶이 풀의 꽃처럼 떨어지고 시들었다고 그렇게 토로한다.
그런데 다윗은 초기부터 사울왕의 미움으로 죽음의 위험 가운데 광야를 유리해야 했고 미국 불법체류 이민자의 생활보다 더 어려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후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시 광야를 살아야 했었고, 그의 신하 스루야의 아들들을 제어하지도 못한 채 그들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오히려 왕으로서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았다. (사무엘하 3:39) 그런 험악한 삶을 살아낸 다윗의 마지막 삶은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다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다윗 스스로 알았다. 그의 삶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대화로 마쳐진다.
견제되고 신경쓰이는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어려움없이 소유와 성취만을 즐기던 솔로몬왕은 그 모든 누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었다고 고백하였다.(전도서2:11)
모든 것을 소유하고 정적들을 심판하고 제거한 솔로몬왕과 자신이 악기와 창검으로 섬겨야 했던 상관에게 쫓김을 당하며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과 모반을 겪고 부하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다윗의 마지막 삶을 다르게 한 점은 무엇일까.
솔로몬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다윗이 샬롬 즉 평강과 온전하다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뜻으로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다.(사무엘하 13:25) 그런데 그 후 성경에서 한번도 솔로몬은 그 자신을 여디디야라고 불리우거나 부른 적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을 무시하고 성취와 소유의 삶을 누리고 살았던 솔로몬은 헛될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은 그의 이 땅에서의 삶 마지막을 새로 돋아나는 풀과 같은 감격으로 마친다. 그 험난한 삶을 살았던 다윗은 어떻게 그런 정서로 삶을 마칠 수 있었을까. 다윗은 유언에서 자신을 사무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남기고 편집된 150편의 시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야 했던 유대광야에서 주로 기록되었다고 유대인학자들은 말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야곱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말한다.(시편 24:6, 한글 성경에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되어 있고 ‘하나님’이 작은 활자로 되어있기도 한데 이것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기 때문에 첨가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광야에서 야곱의 얼굴을 구해야만 했다. 시편에 흐르는 다윗의 야곱이해는 왕으로서의 삶을 산 그가 가나안과 아람과 애굽을 오가며 험악한 이민자의 생을 살아야 했던 조상 야곱을 부러워하였다. 약속받은 땅도 소유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조차 먼저 취하지 못했고 그가 죽었을 때는 가족이 함께 묻혀있는 족장의 묘터 헤브론에 묻지 못하고 객사한 채 베들레헴의 길 가에 묻어야 했고 자기 자신 조차 약속의 땅에 묻히지 못하고 애굽에서 한많은 삶을 마쳐야 했던 슬픈 야곱을 다윗은 왜 그렇게 묵상한 것일까.
야곱은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이 환경과 남에 의해 운명지어진 종처럼 일개 서민의 삶을 살았다. 다윗은 그 야곱을 부러워 한것이다. 다윗은 안정된 예루살렘 궁에서의 삶이 아니라, 절망과 위험 가운데 야곱과 유사한 삶으로 유리하던 유대광야에서의 삶을 시편으로 남겼고 그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살았다.
야곱은 그 험악한 삶을 살면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단 한가지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을 다윗은 묵상했다. 새 이름, 이스라엘.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던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은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새 이름을 뒷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명함처럼 소홀히 하고 말았다.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그에겐 그 새이름보다 성취와 축복이 중요하였었고 결국에 그의 말년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고 하였었다.(베드로전서1:25)
다윗의 유언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말,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었다.
다윗의 삶은 신약에서 이루어질 복음의 시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윗이 유리하던 광야는 우리를 위하여 복음과 다윗의 유언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 회개로 시작된 복음은 생의 마지막을 결정지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혼미하고 슬프고 지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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