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이삭의 포기와 야곱의 연단
성현경
2004.11.0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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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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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야곱은 다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한 방면을 체험하였다. 물론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을 노래하였다. 지난 글에 이어 이삭의 삶에 나타난 주님과 야곱의 삶에 나타내시려는 주님을 더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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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포기의 예표이고 야곱은 연단의 예표이다.
야곱은 출생에서부터 형 에서와 다투었지만 장자권을 얻지 못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에서에게서 빼앗지만 아버지 이삭의 축복 후에 그는 도망가야 했다. 야곱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택했으나 라반은 야곱을 속였고 그의 결혼조차 연단이었다. 얍복강에서 주님께 온전히 포기되고 굴복될 때까지 그의 선택과 노력은 늘 연단으로 이어졌다.
이삭은 비즈니스가 포기함으로 더욱 넓혀져 갔다. 현지인들에게 그가 판 우물을 빼았겼지만 이삭은 포기하고 다시 팠다. 그의 마지막 우물 이름은 르호봇, 터가 넓다는 뜻이었다.(창26:22)
이삭은 결혼도 자기의 뜻이 반영되지 못했다.결혼도 맡겨진 선택이었다. “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세기 24: 2~4)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의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아브라함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후에 그의 아들 야곱을 괴롭히며 연단하게 될 라반이 이삭에게 그의 딸을 아내로 보낼 때는 순순히 축복 가운데 보낸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창24:50)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간증에 라반은 신앙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의 누이 리브가를 축복한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창24:60)
야곱에겐 속이고 갈취하고 하게 될 라반이 이삭의 경우에는 왜 이렇게 신앙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걸까 ?
포기하는 삶을 산 이삭을 위해서 라반은 축복의 도구로 쓰였다.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창17:15,16)
라반이 그의 누이 리브가를 축복한 것은 그의 시어미가 될 사라가 받은 축복과 같은 예언이었다. 이삭이 포기하는 삶을 살 때, 라반조차 하나님께 축복을 위해 쓰임받게 된 것이다.
포기할 줄 모르고 취하려고 하는 야곱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라반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셔서 야곱을 연단하는 도구로 쓰이게 하셨다.
라반은 야곱을 위해, 사울왕은 다윗을 위해 연단시키는 도구의 삶을 살았다.
애굽의 바로왕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데 연단시키는 도구로 인생이 쓰임받았다.
포기하지 못하고 연단받지 못한 이? 권세와 지위를 가질 때에, 바로 왕과 사울왕과 라반처럼 불행하게도 남을 연단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남에 의해 연단받든지, 남을 위해 포기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을 포기하게 만들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연단시키는 도구의 삶을 살게 된다.
주님께 연단받지 못하고, 다른 지체를 위해 포기해 본 적이 드문, 십자가의 흔적이 없는 나의 노력과 성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황량한 유대 광야에서 주님은 과거에 내가 남에게 사역이라고 한 것이 주님의 피로 사신 양을 설교와 판단으로 상처주고 연단시키는 도구의 삶이었음을 보여주셨다. 나는 이삭도 야곱도 아니었고 남을 연단시키는 라반이었다. 주님과 교회에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는 나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주는 계시의 지성소였고 그것을 숨겨주는 덮개였고 피난처였다.
야곱은 에서를 피하여 외갓집 라반의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체험을 하였고 그 땅의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창28:19)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그 곳에 하나님의 집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세대 전에 그의 아버지 이삭은 믿음의 조상이신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묶임을 당한 채 산 제사로 죽임을 당할 뻔 한 적이 있다.
그 땅의 이름은 모리아 산이었는데(창세기22:2) 이삭이 생명을 포기했던 그 장소에 몇 백 년 후 오히려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게 된다. “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역대하 3:1)”
지성소는 이삭이 자기의 아버지의 제사 앞에 자기를 죽음으로 포기한 모리아산에 지어졌다. 십자가의 포기가 없는 지성소는 없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자를 통해 자신의 성전을 지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로 연단 받고 약속의 자녀 이삭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후손의 축복을 약속하셨다.(창22:17)
포기의 삶을 산 그의 아들 이삭은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되는 하늘의 축복을 받았다. (창26:3) 그리고 연단의 삶을 산 그의 손자 야곱은 땅의 티끌같이 편만하게 될 땅의 축복을 받았다. (창28:14)
나는 이삭인가, 야곱인가, 아니면 라반인가….
이삭과 야곱은 다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한 방면을 체험하였다. 물론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을 노래하였다. 지난 글에 이어 이삭의 삶에 나타난 주님과 야곱의 삶에 나타내시려는 주님을 더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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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은 포기의 예표이고 야곱은 연단의 예표이다.
야곱은 출생에서부터 형 에서와 다투었지만 장자권을 얻지 못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에서에게서 빼앗지만 아버지 이삭의 축복 후에 그는 도망가야 했다. 야곱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택했으나 라반은 야곱을 속였고 그의 결혼조차 연단이었다. 얍복강에서 주님께 온전히 포기되고 굴복될 때까지 그의 선택과 노력은 늘 연단으로 이어졌다.
이삭은 비즈니스가 포기함으로 더욱 넓혀져 갔다. 현지인들에게 그가 판 우물을 빼았겼지만 이삭은 포기하고 다시 팠다. 그의 마지막 우물 이름은 르호봇, 터가 넓다는 뜻이었다.(창26:22)
이삭은 결혼도 자기의 뜻이 반영되지 못했다.결혼도 맡겨진 선택이었다. “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세기 24: 2~4)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의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아브라함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후에 그의 아들 야곱을 괴롭히며 연단하게 될 라반이 이삭에게 그의 딸을 아내로 보낼 때는 순순히 축복 가운데 보낸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창24:50)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간증에 라반은 신앙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의 누이 리브가를 축복한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창24:60)
야곱에겐 속이고 갈취하고 하게 될 라반이 이삭의 경우에는 왜 이렇게 신앙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걸까 ?
포기하는 삶을 산 이삭을 위해서 라반은 축복의 도구로 쓰였다.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창17:15,16)
라반이 그의 누이 리브가를 축복한 것은 그의 시어미가 될 사라가 받은 축복과 같은 예언이었다. 이삭이 포기하는 삶을 살 때, 라반조차 하나님께 축복을 위해 쓰임받게 된 것이다.
포기할 줄 모르고 취하려고 하는 야곱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라반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셔서 야곱을 연단하는 도구로 쓰이게 하셨다.
라반은 야곱을 위해, 사울왕은 다윗을 위해 연단시키는 도구의 삶을 살았다.
애굽의 바로왕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데 연단시키는 도구로 인생이 쓰임받았다.
포기하지 못하고 연단받지 못한 이? 권세와 지위를 가질 때에, 바로 왕과 사울왕과 라반처럼 불행하게도 남을 연단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관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남에 의해 연단받든지, 남을 위해 포기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을 포기하게 만들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연단시키는 도구의 삶을 살게 된다.
주님께 연단받지 못하고, 다른 지체를 위해 포기해 본 적이 드문, 십자가의 흔적이 없는 나의 노력과 성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황량한 유대 광야에서 주님은 과거에 내가 남에게 사역이라고 한 것이 주님의 피로 사신 양을 설교와 판단으로 상처주고 연단시키는 도구의 삶이었음을 보여주셨다. 나는 이삭도 야곱도 아니었고 남을 연단시키는 라반이었다. 주님과 교회에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는 나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주는 계시의 지성소였고 그것을 숨겨주는 덮개였고 피난처였다.
야곱은 에서를 피하여 외갓집 라반의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체험을 하였고 그 땅의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창28:19)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그 곳에 하나님의 집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세대 전에 그의 아버지 이삭은 믿음의 조상이신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묶임을 당한 채 산 제사로 죽임을 당할 뻔 한 적이 있다.
그 땅의 이름은 모리아 산이었는데(창세기22:2) 이삭이 생명을 포기했던 그 장소에 몇 백 년 후 오히려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게 된다. “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역대하 3:1)”
지성소는 이삭이 자기의 아버지의 제사 앞에 자기를 죽음으로 포기한 모리아산에 지어졌다. 십자가의 포기가 없는 지성소는 없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자를 통해 자신의 성전을 지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로 연단 받고 약속의 자녀 이삭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후손의 축복을 약속하셨다.(창22:17)
포기의 삶을 산 그의 아들 이삭은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되는 하늘의 축복을 받았다. (창26:3) 그리고 연단의 삶을 산 그의 손자 야곱은 땅의 티끌같이 편만하게 될 땅의 축복을 받았다. (창28:14)
나는 이삭인가, 야곱인가, 아니면 라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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