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방언에 관하여
강신웅
2005.02.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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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약성경에 나타난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성령강림시 나타난 방언(행 2장)과 오순절 이후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고전 14장)으로 대별(大別)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시 나타난 방언은 모든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었던 바벨의 상태(창 11:9)와는 달리, 이제까지 그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방언(方言, language)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외국에 거주하다가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누구나가 자기들이 살던 곳의 언어로 120문도의 복음 전함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언어가 통일된 상황이었습니다(행 2:5-11).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요지음 이 두 다른 방언을 같은 방언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신령(神靈)한 표적(標的, sign)으로서 예언(豫言)과 방언(方言)의 은사(隱事)를 집중적(集中的)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오순절의 방언과는 다른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통용되고 있던 외국어가 아니라 통역(通譯)이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영(靈)으로 기도하는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비밀을 말하는 신비스런 것이었습니다(고전 14:2). 물론 두 가지 모두 성령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언의 불가해성(不可解性)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지만(고전 14:23) 이 방언의 불가해성이야말로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고전 14:22). 그런데 이러한 방언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집중시켰고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은사로 부각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부 성도들의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은 방언 이외의 은사들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국 방언은 공중 예배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매우 혼란스럽게 하여 교회를 무질서의 도가니로 몰고 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혼란한 상황에서 방언의 은사를 예언의 은사와 비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절제하고 예배의 질서를 세울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은사 중 초보적인 것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 14:22)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더 큰 은사 즉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최고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방언은 신비스런 말로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하는 것인 반면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에게 말하되 교회의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방언이 개인의 신앙에 확신과 기쁨을 심어준다면 예언은 교회라는 공동체에 기쁨과 희망을 심어줍니다. 특히 예언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비밀, 그리고 앞으로 될 일을 부분적으로 미리 드러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는 의미에서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지 결코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방언은 신자에게 무익한 것일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은 분명한 성령의 은사이며 바울도 이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4:18절).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의 사용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방언의 은사를 가진 신자들은 방언을 해석하는 은사를 겸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영(靈)이 받는 축복(祝福)을 마음이 함께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지적(知的)으로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둘째, 공중 예배시에는 초신자들을 위하여 예배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신자들은 통역이 없는 방언 기도에 대하여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방언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배려도 중요시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교회에서나 방언의 은사를 공중 예배시에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즉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유치한 생각을 버리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는 성숙한 행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고전 14:19).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사실은 예언이 방언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히 예언을 구하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4:1). 왜냐하면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보여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반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책망의 메시지를 주어 죄를 깨닫게 하며(요 16:8), 스스로 판단하게 하며(고전 2:14), 또한 그 마음에 숨은 일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예언의 은사를 구하고 이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시 나타난 방언은 모든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었던 바벨의 상태(창 11:9)와는 달리, 이제까지 그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방언(方言, language)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외국에 거주하다가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누구나가 자기들이 살던 곳의 언어로 120문도의 복음 전함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언어가 통일된 상황이었습니다(행 2:5-11).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요지음 이 두 다른 방언을 같은 방언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신령(神靈)한 표적(標的, sign)으로서 예언(豫言)과 방언(方言)의 은사(隱事)를 집중적(集中的)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오순절의 방언과는 다른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통용되고 있던 외국어가 아니라 통역(通譯)이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영(靈)으로 기도하는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비밀을 말하는 신비스런 것이었습니다(고전 14:2). 물론 두 가지 모두 성령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방언의 불가해성(不可解性)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지만(고전 14:23) 이 방언의 불가해성이야말로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고전 14:22). 그런데 이러한 방언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집중시켰고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은사로 부각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일부 성도들의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은 방언 이외의 은사들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국 방언은 공중 예배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매우 혼란스럽게 하여 교회를 무질서의 도가니로 몰고 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혼란한 상황에서 방언의 은사를 예언의 은사와 비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을 절제하고 예배의 질서를 세울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은사 중 초보적인 것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 14:22)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더 큰 은사 즉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최고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방언은 신비스런 말로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하는 것인 반면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에게 말하되 교회의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방언이 개인의 신앙에 확신과 기쁨을 심어준다면 예언은 교회라는 공동체에 기쁨과 희망을 심어줍니다. 특히 예언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비밀, 그리고 앞으로 될 일을 부분적으로 미리 드러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는 의미에서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지 결코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방언은 신자에게 무익한 것일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은 분명한 성령의 은사이며 바울도 이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4:18절).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의 사용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방언의 은사를 가진 신자들은 방언을 해석하는 은사를 겸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영(靈)이 받는 축복(祝福)을 마음이 함께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지적(知的)으로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둘째, 공중 예배시에는 초신자들을 위하여 예배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신자들은 통역이 없는 방언 기도에 대하여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방언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배려도 중요시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교회에서나 방언의 은사를 공중 예배시에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즉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유치한 생각을 버리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는 성숙한 행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고전 14:19).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사실은 예언이 방언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히 예언을 구하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4:1). 왜냐하면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보여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반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책망의 메시지를 주어 죄를 깨닫게 하며(요 16:8), 스스로 판단하게 하며(고전 2:14), 또한 그 마음에 숨은 일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예언의 은사를 구하고 이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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