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유대인의 감추어진 힘 . History
성현경
2004.07.2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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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유대인들은 이 천년 동안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창조주만을 예배한다.
창조주를 기억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긴 간격이 그들에게 역사의 주님을 만나는 기간이다.
창조주를 경외하고 예배할수록 역사를 알고자 하는 소원이 생긴다. 만물에 기록된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창조주의 손길과 현재를 알아가는 것이 과학이라면 창조주의 발걸음과 과거를 배우는 것이 역사이다. 구원받은 현재의 지점과 창조주가 걸어온 역사의 지점들을 이어갈 때 우리는 미래에서 오시려는 주님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외로운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 (계1:8)
요한에게 주님은 현재 임재하시는 주님을 알리시고, 전에 갈릴리에 함께 계셨던 과거의 주님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다시 오실 계시록의 주님을 계시하시기 시작하신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에 너희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고, 장차 바벨론에서 돌이키실 미래의 주님이라는 패턴 가운데 말씀을 전하였다.
우리도 현재 구원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과거에 다른 이들을 동일한 구원으로 인도하셨던 역사의 주관자를 배우게 될 때 주님은 다시 오실 자신을 계시하시기 원하신다.
현재의 구원주를 만난 후에 바로 미래에 재림하시는 심판주를 바라볼 때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해 뿌리가 없어 성숙하지 못하고 치우치는 신비주의로 실족하기도 한다.
현재의 주님을 알고 또한 역사에 계셨던 창조주를 배우게 될 때, 미래를 계시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두 렌즈의 초점이 맞게 된다.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민족의 땅이다. 마음이 걷고 눕고 사는 문화의 땅이다.
컴퓨터가 지성의 사이버 가나안(Cyber Space)을 제공하는 것처럼, 역사는 민족이 함께 공유하는 의식과 문화의 사이버 가나안(Cyber Land)을 지켜준다.
나라를 잃은 후 이천년을 떠돌아 다니는 동안 유대민족은 가정마다 역사를 간직했고 잃지 않았다.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가정의 식탁에서 그들은 역사를 기억했다.
가정에서 명절과 역사를 지켜온 것이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힘이었고, 유대인이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은 역사 속에서 다만 시간 문제였다고 문화인류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유일한 예외와 기적이었던 이스라엘의 고토 회복은 그렇게 성취되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에 의해 유대민족이 살아남게 된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은 랍비들이 누구나 술에 만취해도 죄가 안된다는 축제이다. 그런데 그 전날은 금식을 하며 유대민족이 멸절될뻔 했던 역사의 아픔을 나눈다.
또 하나의 현대 축제날은 이천년 만에 나라를 다시 찾은 독립기념일이다. 그런데 그 전날이 현충일이다. 역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며 금식을 한다.
이스라엘의 많은 절기가 이렇게 안배되어 있다. 유대민족은 오늘의 축제를 즐기기 전 반드시 그와 연관된 과거 역사의 고난과 아픔을 추모한다.
현재 민족의 축복을 조상의 역사의 고난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에 유대인의 결혼 장면이 있다. 밤 중에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언제 가스실에서 죽을 지 모르는 결혼식인데 신부는 전구를 빼서 발로 깨뜨린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결혼식에서 신부가 맨발로 유리잔을 두 개 밟아 깨뜨리는데, 죽음의 수용소에선 유리잔이 없어서 대신 유리 전구를 깨뜨린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두 번 파괴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개인의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한 날에 민족의 가장 슬픈 날을 기억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나라를 다시 찾는 힘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만년 역사를 가진 한민족도 그 고난의 힘을 신앙으로 함께 길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그들은 늘 창조주만을 예배한다.
창조주를 기억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긴 간격이 그들에게 역사의 주님을 만나는 기간이다.
창조주를 경외하고 예배할수록 역사를 알고자 하는 소원이 생긴다. 만물에 기록된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창조주의 손길과 현재를 알아가는 것이 과학이라면 창조주의 발걸음과 과거를 배우는 것이 역사이다. 구원받은 현재의 지점과 창조주가 걸어온 역사의 지점들을 이어갈 때 우리는 미래에서 오시려는 주님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외로운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 (계1:8)
요한에게 주님은 현재 임재하시는 주님을 알리시고, 전에 갈릴리에 함께 계셨던 과거의 주님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다시 오실 계시록의 주님을 계시하시기 시작하신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에 너희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고, 장차 바벨론에서 돌이키실 미래의 주님이라는 패턴 가운데 말씀을 전하였다.
우리도 현재 구원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과거에 다른 이들을 동일한 구원으로 인도하셨던 역사의 주관자를 배우게 될 때 주님은 다시 오실 자신을 계시하시기 원하신다.
현재의 구원주를 만난 후에 바로 미래에 재림하시는 심판주를 바라볼 때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해 뿌리가 없어 성숙하지 못하고 치우치는 신비주의로 실족하기도 한다.
현재의 주님을 알고 또한 역사에 계셨던 창조주를 배우게 될 때, 미래를 계시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두 렌즈의 초점이 맞게 된다.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민족의 땅이다. 마음이 걷고 눕고 사는 문화의 땅이다.
컴퓨터가 지성의 사이버 가나안(Cyber Space)을 제공하는 것처럼, 역사는 민족이 함께 공유하는 의식과 문화의 사이버 가나안(Cyber Land)을 지켜준다.
나라를 잃은 후 이천년을 떠돌아 다니는 동안 유대민족은 가정마다 역사를 간직했고 잃지 않았다.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가정의 식탁에서 그들은 역사를 기억했다.
가정에서 명절과 역사를 지켜온 것이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힘이었고, 유대인이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은 역사 속에서 다만 시간 문제였다고 문화인류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유일한 예외와 기적이었던 이스라엘의 고토 회복은 그렇게 성취되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에 의해 유대민족이 살아남게 된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은 랍비들이 누구나 술에 만취해도 죄가 안된다는 축제이다. 그런데 그 전날은 금식을 하며 유대민족이 멸절될뻔 했던 역사의 아픔을 나눈다.
또 하나의 현대 축제날은 이천년 만에 나라를 다시 찾은 독립기념일이다. 그런데 그 전날이 현충일이다. 역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며 금식을 한다.
이스라엘의 많은 절기가 이렇게 안배되어 있다. 유대민족은 오늘의 축제를 즐기기 전 반드시 그와 연관된 과거 역사의 고난과 아픔을 추모한다.
현재 민족의 축복을 조상의 역사의 고난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에 유대인의 결혼 장면이 있다. 밤 중에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언제 가스실에서 죽을 지 모르는 결혼식인데 신부는 전구를 빼서 발로 깨뜨린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결혼식에서 신부가 맨발로 유리잔을 두 개 밟아 깨뜨리는데, 죽음의 수용소에선 유리잔이 없어서 대신 유리 전구를 깨뜨린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두 번 파괴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개인의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한 날에 민족의 가장 슬픈 날을 기억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나라를 다시 찾는 힘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만년 역사를 가진 한민족도 그 고난의 힘을 신앙으로 함께 길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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