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광야에서 시작된 복음
성현경
2004.06.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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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복음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 (마가1:1~4)
복음의 시작은 광야에서 외친 요한의 말씀이라고 마가복음의 첫 문장은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 빈 들에서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누가3:2)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줄을 깨닫는 빈 들에서 도대체 무슨 복음이 시작되었을까.
“내가 무엇을 외치리이까. 가로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이사야40:6~8)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이런 말씀이 선포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본문을 인용하면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 전서1:25)하면서 다시 반복한다. 광야에서 외쳐진 멧세지는 부귀의 풀은 마르고 영화의 꽃은 시든다는 나쁜소식이다. 이것은 모든 성공을 누렸던 솔로몬이 쓸 수 밖에 없었던 고백과 일치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 아들의 성공을 위해 왕으로써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은 성공한 후에 하나님을 잃고 왕으로서가 아니라 전도자로서 그렇게 시작하는 복음을 기록해야만 했다. 솔로몬이 성취와 승리의 정상에서 깨달은 허무를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깨달았다.
광야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럽의 로마와 미합중국의 로스엔젤레스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졌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도 하면서 복음을 가릴 수도 있다. 이것은 회개하기 위해 들려져야 하기 보다는 회개한 이들이 들어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솔로몬 왕을 위한 놀라운 계획은 잠언의 성공만이 아니라 전도서의 허무도 있어야 했다. 솔로몬은 후손의 성공을 위해 잠언을 기록하는 동안 겨우 시편을 기록한 아버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한 것같다. 어떻게 다윗은 성취한 왕궁에서보다 방황하던 광야에서 쓴 예배의 글만을 남긴걸까.
성공의 방법을 간증하는 잠언을 쓴 예루살렘의 솔로몬왕은 그래미상의 풀은 돋고 아카데미상의 꽃은 피어나는 헐리우드의 배우들이 성공의 정상에서 타락하는 대로 같은 길을 가고 말았고, 그들이 종말에 토하여 내는 동일한 전도서를 고백해야만 했다.
회개한 솔로몬은 왕도 아니고 전도자도 아닌 예배자로서 아가서를 더 써야만 했다. 인생의 후기에 솔로몬은 예배서의 압축화일인 아가서를 남기면서 아버지 다윗의 시편을 이해했다. 성공했던 예루살렘 궁의 다윗은 절망과 상처 가운데 방황했던 유대광야에서 깨달은 시편을 잊지 않았다.
그의 전 생애에 드려진 예배는 150편의 시편을 편집하였다. 하나님 앞의 예배보다 사람 앞의 성공을 누리던 아들 솔로몬은 그렇게 예배서를 쓸 시간을 잃고 말았다. 그의 풀은 말랐고 그의 꽃은 시들었으며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가서의 단축시편만을 급히 남겼다.
IMF이후의 한민족처럼 베드로는 밤이 ?У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 (마가1:1~4)
복음의 시작은 광야에서 외친 요한의 말씀이라고 마가복음의 첫 문장은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 빈 들에서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누가3:2)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줄을 깨닫는 빈 들에서 도대체 무슨 복음이 시작되었을까.
“내가 무엇을 외치리이까. 가로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이사야40:6~8)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이런 말씀이 선포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본문을 인용하면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 전서1:25)하면서 다시 반복한다. 광야에서 외쳐진 멧세지는 부귀의 풀은 마르고 영화의 꽃은 시든다는 나쁜소식이다. 이것은 모든 성공을 누렸던 솔로몬이 쓸 수 밖에 없었던 고백과 일치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 아들의 성공을 위해 왕으로써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은 성공한 후에 하나님을 잃고 왕으로서가 아니라 전도자로서 그렇게 시작하는 복음을 기록해야만 했다. 솔로몬이 성취와 승리의 정상에서 깨달은 허무를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깨달았다.
광야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럽의 로마와 미합중국의 로스엔젤레스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졌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기도 하면서 복음을 가릴 수도 있다. 이것은 회개하기 위해 들려져야 하기 보다는 회개한 이들이 들어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솔로몬 왕을 위한 놀라운 계획은 잠언의 성공만이 아니라 전도서의 허무도 있어야 했다. 솔로몬은 후손의 성공을 위해 잠언을 기록하는 동안 겨우 시편을 기록한 아버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한 것같다. 어떻게 다윗은 성취한 왕궁에서보다 방황하던 광야에서 쓴 예배의 글만을 남긴걸까.
성공의 방법을 간증하는 잠언을 쓴 예루살렘의 솔로몬왕은 그래미상의 풀은 돋고 아카데미상의 꽃은 피어나는 헐리우드의 배우들이 성공의 정상에서 타락하는 대로 같은 길을 가고 말았고, 그들이 종말에 토하여 내는 동일한 전도서를 고백해야만 했다.
회개한 솔로몬은 왕도 아니고 전도자도 아닌 예배자로서 아가서를 더 써야만 했다. 인생의 후기에 솔로몬은 예배서의 압축화일인 아가서를 남기면서 아버지 다윗의 시편을 이해했다. 성공했던 예루살렘 궁의 다윗은 절망과 상처 가운데 방황했던 유대광야에서 깨달은 시편을 잊지 않았다.
그의 전 생애에 드려진 예배는 150편의 시편을 편집하였다. 하나님 앞의 예배보다 사람 앞의 성공을 누리던 아들 솔로몬은 그렇게 예배서를 쓸 시간을 잃고 말았다. 그의 풀은 말랐고 그의 꽃은 시들었으며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가서의 단축시편만을 급히 남겼다.
IMF이후의 한민족처럼 베드로는 밤이 ?У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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