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요단강, 누릴 것인가 건널 것인가 !!
성현경
2004.06.0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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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 요단을 건너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온 땅과 해 지는 편 대해(지중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여호수아1:2~4)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 찬송은 장례 성가가 되었지만, 성경은 죽음 이전에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가르킨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 건너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려고 하시기 보다, 우리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가나안처럼 이 땅에 임하길 더 원하신다.
한글성경의 요단은 현재 요르단(Jordan)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요레드(Yored)와 단(Dan)의 합성어이다. 요레드는 흘러내려오다 라는 뜻의 동사이고 단은 12지파 중의 ‘억울함을 푼다’는 뜻으로 빌하가 낳은 단(창30:6)이다. 즉 요르단은 단지파의 땅에서 내려온다는 뜻이다.
단지파의 땅은 북쪽 헬몬산에서부터 갈릴리 호수까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물과 풍요로움의 근원지이다. 아모스 선지자가 징계한 바산의 비옥한 땅으로 이스라엘의 최대 곡창지대 골란고원이다. 그 풍요로운 단지파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갈릴리 호수를 채우고 넘쳐흘러 내려오는 것이 요르단 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풍요롭고 일년 내내 물이 있는 단지파의 땅에 성전을 세우지 아니하시고, 하늘에서 물을 내지 아니하면 제사드릴 물이 없는 유대산지 예루살렘을 택하셔서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 의지하게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단에 대해서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49:17)라고 유언했다. 모세도 죽기 전에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신33:22)라고 예언했다.
단 지파는 풍요로운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스라엘 땅에 모든 우상숭배가 들어오는 첩경이 되어왔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너무 풍요로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젖줄인 요르단 강은 바로 단지파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현재의 이스라엘은 아랍국가와 대립관계에 있는데 요르단과는 우호적인 관계이다. 중동평화협상의 단상에 오른 아랍진영은 요르단 국왕이었다. 왜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가까운 것인가. 그것은 그 사이에 있는 갈릴리와 요단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광야를 거친 이스라엘 백성들도 현대의 이스라엘처럼 그냥 요단강을 공존하고 누리며 건너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요단강은 현실적으로 축복과 풍요로움의 근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바로 북진하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선회하여 요단강 앞에 세우시고 건너가라고 하셨다.
스스로 건널 수도 없거니와 건너면 가나안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데 육적인 마음으로 그냥 가나안 족속과 함께 이편 저편에서 요단강 물을 공유하고 누리면 될텐데 하나님은 그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신다.
개인의 삶과 교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고 있는 축복이 있다. 그런데 그 축복엔 단의 바이러스로 감염되어 있기 쉽다. 억울함을 푸는 심정으로 관계가 파괴되며 경쟁적으로 취하는 축복을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 풍요로운 요단의 근원은 길의 뱀이고 첩경의 독사이다.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만 하고 건너지 않으면 결국 사해바다로 변하게 될 것이다.
요단강은 광야와 가나안의 삶을 구별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율법을 배우나 모래 위에 존재함으로 적용할 수 없는 개념 뿐인 신앙생활의 광야와 진리를 적용할 수 있는 땅 위에 열매와 소출이 있는 가나안의 삶을 요단강은 분별해주며 분리하는 거룩한 강이다.
여호수아와 제사장이 발바닥으로 건넌(수1:3, 3:13) 요단강은 수 천 년후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해바다 직전의 요단강과 같은 위치이다.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은 곳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죽으시고 세례를 받으신다.
요단강에 들어선다는 것은 축복과 안정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이다.
우연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 죽으신 의미를 지닌 홍해를 건너는 그림은 많지만,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의미하는 요단강을 건너는 그림은 보기 어렵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홍해를 의지하는 대속의 신앙은 많으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음를 선포하는 요단강의 연합(갈2:20)은 드문가 보다.
그래서 요단강은 성령 안에서의 승리를 상징하지 못하고 죽음을 건너는 장례찬송이 되고 말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렇게 만들고 만 것이다.
지금 하나님이 주셔서 거하고 있는 축복의 요단강은 건너라고 주신 것이지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 축복에 대해 우리 자신이 죽고, 자신에 대해 죽음으로써 건너는 요단강은 큰강 유브라데와 대해를 얻는 부활의 축복으로 변할 것이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 찬송은 장례 성가가 되었지만, 성경은 죽음 이전에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가르킨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 건너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려고 하시기 보다, 우리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가나안처럼 이 땅에 임하길 더 원하신다.
한글성경의 요단은 현재 요르단(Jordan)인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요레드(Yored)와 단(Dan)의 합성어이다. 요레드는 흘러내려오다 라는 뜻의 동사이고 단은 12지파 중의 ‘억울함을 푼다’는 뜻으로 빌하가 낳은 단(창30:6)이다. 즉 요르단은 단지파의 땅에서 내려온다는 뜻이다.
단지파의 땅은 북쪽 헬몬산에서부터 갈릴리 호수까지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물과 풍요로움의 근원지이다. 아모스 선지자가 징계한 바산의 비옥한 땅으로 이스라엘의 최대 곡창지대 골란고원이다. 그 풍요로운 단지파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갈릴리 호수를 채우고 넘쳐흘러 내려오는 것이 요르단 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풍요롭고 일년 내내 물이 있는 단지파의 땅에 성전을 세우지 아니하시고, 하늘에서 물을 내지 아니하면 제사드릴 물이 없는 유대산지 예루살렘을 택하셔서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 의지하게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단에 대해서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49:17)라고 유언했다. 모세도 죽기 전에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신33:22)라고 예언했다.
단 지파는 풍요로운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스라엘 땅에 모든 우상숭배가 들어오는 첩경이 되어왔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너무 풍요로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젖줄인 요르단 강은 바로 단지파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현재의 이스라엘은 아랍국가와 대립관계에 있는데 요르단과는 우호적인 관계이다. 중동평화협상의 단상에 오른 아랍진영은 요르단 국왕이었다. 왜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가까운 것인가. 그것은 그 사이에 있는 갈릴리와 요단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광야를 거친 이스라엘 백성들도 현대의 이스라엘처럼 그냥 요단강을 공존하고 누리며 건너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요단강은 현실적으로 축복과 풍요로움의 근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바로 북진하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선회하여 요단강 앞에 세우시고 건너가라고 하셨다.
스스로 건널 수도 없거니와 건너면 가나안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데 육적인 마음으로 그냥 가나안 족속과 함께 이편 저편에서 요단강 물을 공유하고 누리면 될텐데 하나님은 그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신다.
개인의 삶과 교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누리고 있는 축복이 있다. 그런데 그 축복엔 단의 바이러스로 감염되어 있기 쉽다. 억울함을 푸는 심정으로 관계가 파괴되며 경쟁적으로 취하는 축복을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 풍요로운 요단의 근원은 길의 뱀이고 첩경의 독사이다.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만 하고 건너지 않으면 결국 사해바다로 변하게 될 것이다.
요단강은 광야와 가나안의 삶을 구별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율법을 배우나 모래 위에 존재함으로 적용할 수 없는 개념 뿐인 신앙생활의 광야와 진리를 적용할 수 있는 땅 위에 열매와 소출이 있는 가나안의 삶을 요단강은 분별해주며 분리하는 거룩한 강이다.
여호수아와 제사장이 발바닥으로 건넌(수1:3, 3:13) 요단강은 수 천 년후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해바다 직전의 요단강과 같은 위치이다.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은 곳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죽으시고 세례를 받으신다.
요단강에 들어선다는 것은 축복과 안정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이다.
우연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 죽으신 의미를 지닌 홍해를 건너는 그림은 많지만,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의미하는 요단강을 건너는 그림은 보기 어렵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홍해를 의지하는 대속의 신앙은 많으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음를 선포하는 요단강의 연합(갈2:20)은 드문가 보다.
그래서 요단강은 성령 안에서의 승리를 상징하지 못하고 죽음을 건너는 장례찬송이 되고 말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렇게 만들고 만 것이다.
지금 하나님이 주셔서 거하고 있는 축복의 요단강은 건너라고 주신 것이지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 축복에 대해 우리 자신이 죽고, 자신에 대해 죽음으로써 건너는 요단강은 큰강 유브라데와 대해를 얻는 부활의 축복으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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