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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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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다시 광야로 돌아가자

성현경
2004.06.02 07:11 1,569 0

본문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Midbar)인데 말씀은 다바르(Dabar)이다.
거룩함은 카도쉬(Kadosh)인데 거룩함이 거하는 성전은 미크다쉬(Mikdash)이다.
즉 히브리어는 어떤 단어 앞에 미(Mi)가 붙으면 그 단어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리키는 명사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다바르가 임하는 곳이 유대인들에겐 미드바르 곧 광야인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서재가 아니라 광야에서 목동 가운데 부르심을 받았다.

신약을 기록한 헬라어로 말씀은 로고스(Logos)이다.
헬레니즘이 꽃핀 로마제국은 오늘날 영어권의 유럽과 미국에 이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해 이방교회의 확장을 위해 헬레니즘의 특성을 사용하셨다.

이 로고스라는 헬라어는 오늘날의 영어에도 그 단어가 있다. 문과에서는 많은 문장을 이성적으로 연결하는 뜻인 논리(logic)로 이어지고, 수학에서는 산술로 계산을 집약하는 로고스(logos)로서 쓰이고 있다. 헬레니즘에서의 말씀은 많은 책들을 섭렵하는 노력의 집약이다.

고고학에서도 고대 헬라의 도시와 고대 유대인의 마을은 쉽게 분간이 된다. 헬라 도시에는 사람들을 집약시키는 광장(Acropolis)과 문화를 집약시키는 극장(Theater)과 지성을 집약시키는 도서관(Library)이 도시의 중심에 있는데, 유대 마을에는 그저 집들밖에 없다. 회당들도 한 곳에 집중되는 대회당이 아니라 동네 마을회관처럼 집들과 함께 분산되어 있다.

헬라의 지성은 도서관같은 많은 책을 소유하고 소화해 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유대 랍비의 영성은 책이라고는 토라 외에 별로 다른 책이라고는 읽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헬라의 석학들은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집약한 겸손인데 반면에 유대 랍비의 영성은 여자의 눈동자라고는 아내와 딸 이외에는 쳐다본 적이 없는 광야의 영성이다.
미국의 지성을 이끌어가는 유대인 학자들은 도서관에서 풀지 못하는 의문을 이스라엘의 광야와 러시아의 얼음의 고독 속에서 하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학문이 없는 랍비와의 대화를 통해 그 답을 찾아간다.

짧은 바울서신에 참고문헌을 달아 두꺼운 바울서신 강해서로 확산시키는 영성은 헬레니즘이다. 그러나 두꺼운 모세오경을 한가지 삶의 예화로 압축시킨 탈무드를 남기는 것이 유대적인 영성이다.

20세기말까지의 영화는 주인공만 첨단 장비와 무기를 다 가지고 있고 악당들은 평범한 무기를 들고 주인공 앞에 쓰러져간다. 그러나 21세기를 향하는 영화에는 클리프행어와 다이하드 시리즈처럼 악당들이 오히려 가공할 무기를 가지고 있고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인데 기본기 만으로 그 악을 무찌른다.
중국무술영화조차 모든 권법을 섭렵하고 무기를 지니고 있는 악당을 한가지 권법만을 연마하며 젓가락만 가진 주인공이 이기도록 되어있다.

영화에서 조차 모든 것을 가진 세력에 대해 기본기와 본질이 이긴다는 헬레니즘에서 유다이즘으로 문화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의 영성에 대한 서적은 많은 양의 책을 읽어내는 헬레니즘의 영성이고 교회성장의 에너지는 조직과 프로그램 위주의 헬레니즘적인 영향력으로 치우쳐 있는 셈이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성경책과 방석 한 장으로 시작된 유대적인 부흥이었다.
그런데 그 부흥은 대형교회들에서 어려운 시절 외국유학을 다녀온 목회자들의 헬라적인 지성으로 확산되어 왔다. 그런데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대형교회들은 헬레니즘의 조직과 지성으로 확산되었으나 본질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진리의 블랙커피만을 고수하던 보수교단은 제자를 낳았으나 대중을 얻지 못해 확산되지 못했고 헬레니즘의 프림과 설탕을 탄 대형교회들은 프림커피의 진리로 군중들을 이끌어 왔으나 본질적으로 쓴 진리의 커피량에 비해서,
헬레니즘이 꽃폈던 고린도 교회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진리에 섞었던 것처럼
(고전 2:4), 지성의 프림과 설탕을 너무나 많이 첨가해왔고(고후 2:17)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블랙커피도 프림커피도 아닌 커피우유로 바뀌어 버리는 것 같다.
진리의 프림커피가 아니라 지성의 커피우유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축복에 만취됐던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서 광야로 유혹하셨다(호 2:14).
효과보다는 본질을 추구하며 성경과 방석만 갖고 광야로 돌아가자.
우리는 열매가 너무 없어 문제가 아니라 열매와 결과만을 원했던 것이 문제이다.
나무의 가지가 약하고 본질의 뿌리가 깊지 못해 보인다.

회복을 위해서 다시 한번 광야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말씀은 빈들에서 요한에게 임했었다(눅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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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동문이신 성현경 목사님께서 신앙계에 연재하는 칼럼을 퍼온것입니다.
http://www.shinangge.com/2004-shin/tema/shin-tema-list.php?board=theme03
인하대 항공과 (78학번) 졸업하고 장신대학원을 거쳐서 부산에서 사역하다가, 이스라엘 선교사로 8년간 섬기고 작년에 뉴저지로 건너와서 최근 개척을 하였습니다. ""Gospel Fellowship""
(퍼온이: 이세형-77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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