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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여정(39회)

김시우
2007.08.02 11:17 1,695 1

본문

“ 언니…”

“ 경림아…”

경희와 포옹을 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다가  달수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경림의 눈에도 이내 탄식과 함께 정체 모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언니…달수씨가 변호사를 선임해서 가석방 신청을 했어.”

달수는 회사 업무에 손을 떼다시피 여성단체를 찾아 다니며 경림이 자신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고 어머니까지 죽인 양아버지를 단죄한 것은 분명 법질서를 문란케 한 것이지만 정상을 참작해보면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았으니 여성단체가 나설 줄 것을 요청했었다.

달수는 강간을 당한 여성의 심리적 기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남성 중심의 사회의 처벌기준으로 결정된 경림의 형량은 너무 가혹하며, 처벌이전에 적절한 정신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외국의 사례를 수집하고, 정신과 의사들의 의견을 받아 교정당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달수는 또한 넉넉한 촌지를 들고 다니며 유력 일간지 기자들에게 경림의 비극을 기사화 하도록 했고 그 기사는 사회에 적지않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한 여성이 어렸을 적 자신을 성폭행한 양아버지를 남자친구를 시켜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그 피해자로 하여금 얼마나 큰 고통으로 작용하는 것에 대한  학계와 정치권에서 새로운 조명이 일기도 했다.

달수의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으로 경림은 정신치료 사실을 법원에 정기적으로 제출하는 조건으로 가석방 된 것이다.

“ 진작에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손을 썼을 텐데….경림씨 너무 고생 많았어요. 이제 다 끝났어요.”

경림이 달수에게 몇 걸음을 가까히 옮겨 아무 말없이 달수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달수가 그녀의 어깨를 감아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했다. 양아버지의 성폭행을  피해 7년을 타향에서 방랑하였고, 그 세월만큼이나 긴 세월을 영어의 몸으로 보낸 경림의 어깨는 생각보다 왜소했다.

달수의 명치에서 뭔가 울컥 치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경림이 그녀와 가족을 죽음과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의 구렁텅이 안으로 몰아넣었던 사람을 본능적으로 단죄했다는 이유로, 경림을 이처럼 작고 초라한 여인으로 만들어서 법의 존엄성과 사법체계의 권위를 세워 무엇하겠다 것인지 달수는 위정자들에게 소리쳐 묻고 싶었다.

달수의 이러한 행보를 알게 된 지인들이 달수에게 시의원을 거쳐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하기도 했다.  달수는 그 지인들의 호의에 감사를 표시했지만 너무 젊다는 이유로 정치권 진입을 거부했다. 일단 자리를 잡고 앉으면 비리에 물들어 가는 정치인들에 대한 달수의 거부 본능 때문이었다.

경림은 달수 회사의 외식사업부의 한식개발팀장, 경희는 영업팀장으로 각각 달수와 다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경림의 20대의 풋풋한 미모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다시 생기를 찾고 새 삶을 일구어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달수는 그 옛날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읽을 수 있었다. 상처한 외식 사업부의 한 간부가 경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달수가 그 둘의 만남을 적극 주선하였지만 경림은 한사코 마다했다.

“ 아직 젊은 나인데… 가정을 꾸리는 것이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할 겁니다. 경림씨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조만간 다시 말 꺼내리다. ”

이러한 달수의 진심어린 충고에도 결국 그녀는 가정을 꾸리고 살 자신이 없다고 했다.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라는 달수의 말에 경림은 자신에게 사랑은 사치라는 대답으로 대신했다. 어쩌면 달수가 아내와 별거를 하고 사실상 이혼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림은 달수를 마음속에 두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달수 역시 경림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적어도 그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것은 틀림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달수도 오랜 전에 그의 가슴속에 그녀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고 경림도 친절함에 실린 달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달수가 좋았지만 달수도 욕정만 채우고 유유히 발걸음을 돌렸던 남자 중 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달수는 경림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모든 직원에게 그렇듯이 그녀와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러운 반 면, 어떨 때는 다소 부담스럽게 작용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녀의 이성에 대한 좋은 감정이 오히려 조직의 결합을 깨는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회사 책임자로서의 사무적인 생각도 들었다. 그러한 달수의 생각은 자신이 경림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그녀와 가까이 있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역산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달수와 경림이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주인과 손님에서 비롯되어 육체가 정신을 리드했던 관계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많은 것이 달라진 시기와 장소에 함께한 두 사람을 불편하게 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달수가 그러한 복잡하고 암울한 생각이 들 때 마다 자신에게 화를 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혼전에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그 상대방을 반드시 배우자로 맞는 법이 없고 그렇다면 굳이 책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지 않는가. 또한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더구나 경림은 갑작스런 일로 내 곁을 떠났고 그 사이 나는 그녀를 만났던 그 장소가 아닌 다른 곳이 삶의 터전이 되었고… 내가 그 자리를 지켰다 하더라도 경림은 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아니지 않았는가.”

경림이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떠나는 날, 공교롭게 달수도 같은 비보를 접하고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희정을 만났었다. 그리고 앞뒤 못 가리는 지독한 사랑에 빠져버렸고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서로 의지했던 수연도 사실상 희정 때문에 떠나보내야 했었다.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고 그래서 희정 이외의 사람은 잊어버리라고 스스로에게 명령을 하면서 자가최면을 걸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녀를 불편해야 하고 미안해야 하며, 심지어 양심의 가책까지 느껴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를 안았던 것에  동정과 사랑중 그 어떤 것이 밑거름이 되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래! 사랑이라고 치부하자, 어차피 그것들은 하나인 내마음의 다른 표현일 수 도 있으니까. 그리고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죄란 말인가.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은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죄의식을 벗어 던지려고 발버퉁 치면 칠수록 달수는 더욱 더 가슴이 옥죄는 압박감을 받았다.  숨이 막혀오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력구제하는 심리적 보호본능을 발현시켜 양심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다. 달수는 생각했다. '육체적인 상처만 치유되는 것은 아니니까 나의 이 사랑에 대한 중독도 해독할 수 있을꺼야,  질병을 일으키는 병균에 면역이 있다면 고통도 면역이 있어야 했지만 정신적 고통은 밀려올 때 마다 항상 같은 힘으로 충격을 가해 와 액면가 그대로  마음속에 투영된다는 것을 달수도 모르지는 않았다.

“경림 같이 반반한 것들이 나만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을까. 아니야,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랑하고 상처받고 또 사랑하고 또 상처받고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아가듯이, 저들도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상처받고 또 다른 이를 사랑하면서 살아왔을 것이야. 그러니 그 인생 여정의 한 시점에서 잠시 만났던 우리들이 과거 일로 미안해 하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니까…”

달수가 이렇게 자위하고 변명하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 안방 마님처럼 물러날 여지없이 자리잡고 있는 희정이 있었고, 설사 그의 경림에 대한 감정이 다시금 사랑으로 진화하거나 경림이 자신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달수씨도 제가 처음은 아니죠?”

달수가 경림과 산정호수가에 있는 호텔에서 밤을 보낼 때 경림이 불쑥 꺼낸 말이다.

댓글목록 1

김시우님의 댓글

김시우 2007.08.05 16:38
  33회가 32회로 되어있더군요.<br />
2번째 32회를 포함하여 이후에는  모두 숫자 하나씩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