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섭의종교칼럼] 받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준 사람은 없다는 ‘상처!’
본문
받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준 사람은 없다는
‘상처!’
(임동섭 목사 / 에콰도르 선교사)
저는
4년 동안 3개의 직업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사업을 했으며 교회에서는 전도사로 일했습니다. 그 당시
매주 월요일 아침에 사업장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영업부장인 K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신자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는데, K씨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님이셨습니다. 많은 헌금을 하셔서 고향에 2개의 교회를 건축하셨습니다. K씨는 아들의 대학 학자금을 주지 않으면서 그 많은 돈을 교회 건축 헌금으로 낸 아버지가 미웠답니다. 교인들은 장로님의 헌물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 앞에서 아버지에 대해 서운하다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답니다. K씨는 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몸이나 마음에 상처가 나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몸의 상처는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연고를 바를 수도 있고 반창고를 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치료에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상처는 몸이든 마음이든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므로 상처로 인한 흔적을 작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주었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도박장에서 돈을 땄다는 사람은 있지만 돈을 잃었다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살고 있는 아프리카 사람 때문에 상처 받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받습니다. 배우자, 부모, 친구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반면에 상처도 받습니다. 그러므로 상담 전문가들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고 조언을 합니다.
탈북자 강은정 씨의 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백화점에 갔다고 합니다. 맘에 드는 옷이 있어 바라보니 판매원이 다가와서 열심히 좋은 옷이라고 설명을 하더랍니다. 옷의 좋은 점을 계속 설명하는 중에 ‘탈북자도 가능하다’고 하더랍니다. 자기는 탈북자가 아니라고 외치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탈부착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탈북자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손자가 식탁 아래에서 일어서다가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아픈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일어설 때 조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통이 없다면 더 큰 사고를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로 인한 고통이 우리를 보호한다는 역설적인 진리가 성립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나 배우자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면 대다수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혼자 있었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행복은 관계를 맺고 가꾸어 가는 과정입니다. 관계는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관계의 고통은 곧 관계를 잘 돌보라는 신호입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해도,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도 우리가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닌 목석일 것입니다. 요청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대화로 합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땐 내가 편해질 거리만큼 간격을 두는 게 필요하다고 상담 전문가들은 충고합니다.
상처를 아물게 하고 흔적을 작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상처 받았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억눌린 감정과 상처는 저절로 치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관계를 끊지 말고 거리를 두라는 것입니다. 관계를 끊어버림으로 상처를 끝내려고 하는 시도는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미해결 과제로 남겨놓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야 합니다. 자존감은 상처 치유에 있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자존감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 도다!(시147:3)”라고 찬양했습니다.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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