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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자기계발] 꽃 팔다 생긴일

최강일
2004.06.07 15:43 1,31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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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립대학에서 무사히 석사과정을 마치고 강치는 Polytechnic University에 1986년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New York University와 Brooklyn Polytech의 이공대가 합쳐서 생긴 이 대학은 뉴욕시립대학보다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이 대학 출신이 한국에서도 많이 활동을 해 강치는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기로 결정, 입학허가를 받았다. 입학후 역시 전에 다니던 시립대학보다는 한국유학생이 많아 자연히 한국학생들 모임에도 참여할 기회가 많았고 같은과에는 비슷한 또래의 한국학생들이 여럿있어서 서로 집까지 방문해가면서 친하게 지낼수 있었다.

2째학기가 끝나갈 즈음 강치는 같은과 동기와 방학때 무엇을 할것인지 의논을 하다가 금방 5월에 다가오는 어머니날 (Morther’s Day, 5월 첫 일요일) 을 목표로 꽃 파는 사업을 해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렇치 않아도 방학때 마다 이일 저일하는것이 따분했는데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그것도 잠시 한시적으로 해본다는데 매력을 느껴 없는 돈에 둘이 $200씩 내 $400을 첫 사업자금으로 마련했다.

우선 동네 꽃집에 물어서 어디서 꽃을 가져오는지를 알아내고 맨하탄 20-27가 사이에 있는 꽃 도매상을 찾아갔다. 어머니날용으로는 장미가 가장 인기가 있었지만 너무 비싸서 튜울립으로 하기로 하고 같이 모양을 낼 다른 꽃과 잎등을 몇 박스 사서 플러동 강치 집으로 가져왔다. 400불 어치나 되는 꽃 박스를 아파트 바닥에 펼쳐 놓으니까 갑자기 다 팔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내일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Morther’s Day Weekend에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교차로를 택해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한 다발에 3불씩에 팔기로 의논을 하고 열심히 꽃 다발을 만들었다.

첫번째 사업이라는 묘한 기분으로 잠을 설치고 Mother’s Day traffic이 생길 오후를 생각해서 11시쯤 집을 나섰다. 응원하는 와이프를 뒤로 하고 차에 하나 가득 꽃을 실은후 퀸즈에서 롱아일랜드로 가는 입구 교차로 근처에 파킹을 하고 꽃을 가지고 나왔다. 강치나 동기생이나 한번도 노상에서 뭘 팔아 본적이 없는 두사람은 그냥 멀쓱한 모습으로 교차로에서 꽃다발을 서너개 들고 손님을 기다렸다. 차 타고 가면서 동양사람이 꽃을 파는것을 보면 미국사람들은 Moony (통일교도) 라고 생각한다. 강치는 자신이 저들에게 그렇게 보일거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씁쓸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까 꽃만 많이 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점점 적극적으로 신호를 기다리는 차에 접근해서 꽃사라고 권유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한만큼 꽃은 잘 안 팔렸다. 뙤약볕에서 그야말로 늦게까지 수고를 했지만 서너 다발밖에 못 파는 참담한 결과가 나왔다.

그나마 이런 실망을 덜어준 재미있는일이 한가지 일어났다. 한참 파리를 날리고 있는데 하얀 중고 스포츠카 한대가 길을 벗어나 강치 앞에 멈춰 섰다. 꽃을 팔 마음에 얼른 달려간 강치에게 2명의 십대 백인 여자아이들이 뜬금도 없이 다정한 척 인사를 한다. 그리곤 값이 얼마냐고 묻고 이내 돈이 없는데 자기 엄마 꽃을 가져다 주고 싶다고 그냥 달라고 사정을 했다. 말이 십대지 어른이 다름없는 이 아가씨의 애교에 조금 마음이 약해진 강치를 막은건 늦게 다가온 동기생이었다. No Way! 그 소리에 강치도 안된다고 덩달아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청바지에 얇은 블라우스를 입은 아가씨가 강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더니 천천히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청바지에서 밖으로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강치는 뭔가 잘못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설마하는 마음으로 계속 쳐다봤다. 운전석에 앉은 아가씨는 뭔가 눈치를 챗는지 부러 차장밖을 내다 보는척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slow motion과는 달리 이 백인아가씨가 훨렁하게 바지밖으로 나온 블라우스를 가슴위로 활짝 들었다. 놀랍게도 그 블라우스 안에는 아무것도 가리고 있는것이 없었다. 십대답지 않은 두개의 젖가슴이 그대로 강치의 눈에 들어왔다.

(Oh my God!)
말도 못하고 속으로 신음처럼 중얼거리는 강치에게 그 아가씨는 당당하게 말했다.

How about that? Now you can give me. Can’t you?

뭐라고 답을 못하는 강치를 대신에 동기생이 말한다.

No, We can’t.

세상에 이런 파렴치한이 있나. 아가씨의 가슴을 그것도 양쪽을 다 봐놓고 꽃값을 받으려고 하다니.. 강치는 조금 실망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그 아가씨에게 두말않고 꽃을 건네 주었다.

Thank You!

하는 말를 남기고 그 스포츠카는 붕... 롱아일랜드 쪽으로 달아났다.

멀리 사라져 차가 보이지 않자 강치는 돌아서서 빙긋이 웃고 있는 두살 위인 동기생을 쳐다 봤다.

“아니 그 상황에서 꽃값을 받으려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남자로 태어나서..”

그러자 그 동기생 말이 더 걸작이다.

“나는 만져보라고 그러면 줄라고 그랬지..”

첫날 장사는 완전한 실패였다. 늦게 저녁을 먹으면서 같이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장소가 틀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꽃도 장미로 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수는 없고 내일 다른 곳에서 팔아보기로 했다. 다음날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롱아일랜드 한 쇼핑몰 버스 정류장에 10대들이 많이 몰려있는곳을 보았다. 그냥 박스째 들고 내려서 무턱대고 팔기 시작했다. 1시간 동안 미처 자기 어머니를 위해 꽃을 준비못한 아이들이 정신없이 사갔다. 이같은 흐름에 찬물을 끼얹은것은 쇼핑몰 경비원이였다. 누구든 타운에서 license를 받아야 노상에서 물건을 팔 수있다는것이었다. 할수 없이 장소를 바꾸었지만 아까만은 못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차안에서 돈을 해아려 보니 $300어치를 팔았다. 1시간 동안 버스 정류장에서 판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만 장사가 되면 큰 돈을 벌것 같았다. 내일 비슷한 곳을 찾아 다시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일요일이지만 도저히 손해는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와서 처음으로 강치는 일요일에 교회를 빠지고 꽃을 팔러 나갔다. 차안에서 강치는 일요일날 가게 문을 여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날 당일인 일요일에는 장사가 안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겨우 본전인 400불을 헤아려본 강치는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3분의2나 남은 꽃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되었다. 이제 내일이면 시들어 버릴텐데.. 남은 꽃의 반은 동기생에게 주어버리고 집에 돌아온 강치는 우선 지난 3일간 꽃다발을 만들어주느라 고생한 와이프에게 한아름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아파트의 각 이웃들에게 꽃을 한 다발씩 나누어 주었다. 모두 생각지 않은 선물에 고마워들 했고 Happy Mother’s Day!를 외쳤다. 비롯 성공못한 첫 사업이지만 크게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과 나름대로 장사의 속성을 조금은 배웠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을수 밖에 없었던 1987년 어머니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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