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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자기계발] 시련과 응전-작은 기적

최강일
2004.06.07 15:44 1,50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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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는 달리 미국의 대학교수는 정교수가 되기 위한 Tenure를 받는 처음 5년간 학생들 이상으로 엄청나게 열심히 일한다. 학교나 학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매년 일정한 액수 이상의 Project을 유치, 결과를 내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야 5년 후에 Tenure를 받고 그 학교에서 계속 교수노릇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처음 박사과정 자격시험이 가장 넘기 힘든 고개라고 한다면 (보통 반 정도의 학생이 여기서 떨어진다.) 교수는 4-5년 후의 (아이비리그 학교는 7년) Tenure 심사가 정교수가 되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인것이다.

같은 과에 한국학생이 7명이 되던 Polytech에서 강치는 그들과 함께 즐거운 유학생활을 보내고 이제는 익숙해진 미국대학원 교육에 A학점을 놓치지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졸업논문 연구가 진행되는 3년 정도 지났을 즈음 자신의 지도 교수가 Tenure를 못 받고 나가는 불운을 겪었다. 새로 지도교수를 정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공부를 마치느냐 아니면 공부를 포기하느냐는 기로에 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새 교수와 새로운 topic을 갖고 다시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것 보다는 취직을 해서 경험도 쌓고 필요하면 나중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취직은 생각보다 쉽지않았다. 미국내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100여 군데 이력서를 보냈지만 딱 두 군데서 인터뷰 요청이 왔고 그 중에서 한 회사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국방성 프로젝트를 하는 그곳 특성상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면 곤란하다는 Human Resource (인사과) 의 반대로 Offer를 받지 못했다.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Polytech 기계과의 후배가 찾아와 강치의 지도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젊은 교수들도 학과의 Restructuring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다면서 자신은 MIT에서 입학허가를 받아서 전학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멀리 가기 싫으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자기가 알아 본 바로는 콜럼비아가 사정이 좋으니 알아보라고 권했다. 미국의 대학이 9월학기 입학은 8월1일에 외국인 학생은 5월1일에 그 사정이 보통 끝나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2월달에는 서류제출이 완료되어야 하는데 취직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한 강치는 이미 7월달에 들어와 있었다. 약간 망설여졌지만 강치는 입학 서류없이 취직을 위해 만들어놓은 이력서와 성적증명서를 들고 직접 콜럼비아의 교수를 찾아갔다.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가져온 서류를 보여주고 늦었지만 입학서류를 제출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자기 생각에는 별문제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7월 마지막날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2주후 강치는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믿겨지지 않았다. 콜럼비아는 처음 뉴욕와서 시립대를 다닐 때 와보고는 꼭 한번 다니고 싶었던 학교였는데 이런 식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치가 만난 그 교수가 바로 입학 사정을 담당하는 교수였기에 처음 이력서와 성적증명서를 보여주었을 때 외국인 학생을 위한 dead line이 지났지만 예외적으로 입학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등록할 날이 다가오자 강치는 다시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5000불이 넘는 한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미국을 떠날 때 만불만 주면 공부를 마치고 오겠다던 강치의 호언에도 불구하고 Polytech시절 한번 더 부모님 신세를 졌기에 다시 향토장학금에 의지할 수는 없고 살기에 바빠 모아 놓은 돈도 없었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국 8월 마지막 주, 4일간의 등록일이 되었지만 등록을 못하다가 목요일 등록 마지막 날 크레팃 카드로 한 과목만 등록하기로 마음을 먹고 강치는 집을 나섰다. 유학생은 파트타임으로 등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강치는 승용차 안에서 착찹한 심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가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교수가 한 과목 등록을 허락해줄까? 진짜 다니고 싶은 학교에 이제 가게 되었는데 등록을 할 수 없다니.. 이런저런 생각에 시동을 건 후 한참이 지났지만 출발할 맘이 일어나지 않았던 강치는 출발하기 전 버릇대로 간단히 기도를 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지금 등록하러 가는 제 사정을 다 아시오니 지금 가서 만날 교수를 통해서 주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전날 수요예배에서 졸면서 들었던 목사님의 설교 중 생각나는 부분을 그대로 기도하고 나니 강치는 조금 맘이 가벼워졌다.

강치가 예상했던 대로 지도교수는 왜 한 과목만 등록할려는지 물었다. 강치는 유학생은 풀타임으로 등록해야 하는 줄 알지만 솔직히 돈이 없어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답하면서 이해를 구했다. 그러자 지도교수가 의외의 질문을 했다. 장학금을 주면 풀타임으로 공부하겠느냐고 물었다. 강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론이다. 그렇치만 등록금만 있어서는 안되고 생활비도 대줘야 일안하고 공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즉시로 학과장과 인터뷰를 했다. 학과장을 통해서 강치는 일의 전후를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즉 강치의 지도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에 학생이 많이 몰려 정원을 초과, 조교 (teaching assistant) 가 하나 더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과장은 즉시 강치의 지도교수가 추천한다면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고 강치는 등록전에 조교로서 필요한 paper work을 마쳤다. 전액 장학금과 한 달에 한번씩 생활비를 받는 다는 조건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강치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강치는 9회말 투아웃 이후 기사회생하는 홈런을 날린 타자처럼 1989년 가을을 아이비리그의 명문 콜럼비아에서 그간의 시련을 한방에 날려보내고 장학생으로 박사과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강치가 처음 아버지에게 약속한 것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이 비로서 마련되었고 강치는 3일후 주일날 이런 기회를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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