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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여정(19회)

김시우
2007.04.22 12:45 1,932 6

본문

조식 배차가 문지방을 넘어 덜그럭거리고 병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동찬의 잠을 깨웠다. 동찬이 손보다 팔꿈치가 더 높이 들린 어설픈 동작으로 숟갈에 밥을 뜨면 동찬 어머니 고여사가 그 위에 반찬을 올린다. 그러면 동찬이 그 밥과 반찬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위태 위태하게 입으로 가져갈 때, 고여사의 손은 동찬의 숟갈 밑에서 같이 움직인다.  하루에 세 번 해야 하는 의례행사다. 다른 사람에게는 즐거워야 할 식사시간이 동찬과 그의 어머니에게는 전투다.

고여사는 동찬이 식사를 마치고 보리차로 입가심을 한 후에야  ‘이 희정이 누구니?’ 하고 말문을 열었다. 동찬이 팔뚝으로 입가의 물을 훔치면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동찬을 빤히 쳐다보는  어머니를 유심히 보니 어머니도 많이 늙으셨다. 손주를 안고 그 재롱에 행복해야 하는 나이에 이렇게 고생을 시키는 것이 미안하다 못해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자신만의 불편함을 호소하고 거기에 치중하다 보니 강의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남편을 잃고, 자식마저 불구가 되버린 어머니 입장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에 후회와 송구함이 밀려왔다.

동찬의 설명을 들은 고여사는 달수의 등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리치면서 ‘왜 그런 것을 이제야 얘기하냐’ 고  동찬을 질타했다.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고 해야 할까. 동찬이 건강하고 자신감에 넘쳤다면 한  눈에 반한 그녀에 대해 그렇게 소극적으로 대했을까. 어쩌면 동찬에게는 매주 일요일에 면회를 와서 장모의 말을 빌려 슬쩍 이혼의 뜻을 비추는 아내와의 눈에 보이지 않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 이대에서 근무한다 그러니까 지나가다 꼭 한 번 들러요. 제가 신촌에 양품점을 해요, 아침 일찍, 그리고 저녁식사 시간에  병원에 가야 하니까 그 시간만 피해서 오면 되요, 꼭 뵙고 싶네요. 희정씨…”  

달수가 병실에서 조금 벗어난 복도 한 켠에 설치되어 있는 공중전화에서 고여사가 누군가 통화하는 것을  바로 그 뒤를  지나면서 보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인사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재활센터에 가서 여러가지 운동기구로 약해진 몸을 가다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직 재활운동은 꿈도 못 꾸는 동찬에게는 왠지 미안해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지다 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곳을 오 간지 2주 정도 된 것 같다. 그 시간에는 항상 동기 박정국이 달수를 기다리고 있어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돌아오는 것이 지루한 병원생활을 달래는 수단이 되었다.

달수는 수술받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수술실로 찾아가 보관함에서 피에 범벅된 군복의 주머니를 샅샅히 뒤졌지만,  희정이 넘겨준 전화번호 메모지를 찾아내지 못했었다. 달수는 그녀에게 연락을 포기한 상태였지만  항상 머리 속에는 그녀가 맴돌고 있었기에 고여사의 입에서 나온 ‘희정’이란 이름이 크로우즈 업 되면서 그의 귀에 박혔다.

달수는 그 희정이라는 이름이 비교적 흔한 이름인지라  동명이인이라 생각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달수는 고여사가 자신이 알고 있는 희정하고 통화를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선뜻 고여사에게 통화한 희정이란 여자가 누구냐고 묻는 것도 이상했다.

희정이 친구처럼 지내는 일문과 교수실의  조교 강민희와  점심 식사를 하고 교수실로 돌아가는 길에 동찬 어머니가 말한 양품점의 간판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어 쇼 윈도우를 통해 가게 안을 살폈다. 등까지 길게 내려온 은발머리의 중간을 실크 스카프로 질끈 동여 멘 세련된 스타일의 초로의 여자가,  역시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 옷을 걸쳐입은 중년 여성과 쇼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손님인 듯한 중년 여자가 양쪽 손에 한 아름 쇼핑백을 들고나서자, 그 초로의 여자는 가게 밖까지 따와 나왔다. 가게 앞에 검정 그랜져 승용차를  세우고 기다리던 남자가 부리나케 차에서 나와 쇼핑백을 건네 받아 조수석에 넣고 뒷문을 열어 그 중년 여자를  태웠다. 차가 천천히 움직여 대로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본 초로의 여자가 쇼 윈도우 가까히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는 희정을 보고  '들어가서 찬찬히 보지 않겠냐’ 고 했다.

“아, 아니예요, 친구가 있어서 다시 올께요, 그럼…”  

희정은 후배들의 레포트의 채점을 마치고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시공부를 하는 동생 희철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짐을 챙겼다. 교정을 빠져나와 바쁘게 전철역을 향해 걷던 희정이 흠칫 서서,  무의식중에 지나친 그 양품점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희정이 뒤를 돌아 걸어 조심스레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주인여자는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 희정은  벽에 걸려있는 옷을 몇 개 살펴보았다.

(“340만원?” )

희정이 옷에 붙은 가격표에 놀랐지만 놀란 표정이 새어나갈까봐 일부러 태연한 척 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자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가게주인이 희정에게 미소를 띄우며 종종 걸음 쳐 다가왔다.

“ 낮에 오셨었죠? 아이고오~  젊은 아가씨가 안목도 깊네… 이게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 마리아 크로네조의 작품인데요… 전 세계에 단 10벌이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한국에서 이거 단 1개일걸요, 파티에서 같은 옷을 입은 사모님들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가게주인은 희정이 재벌2세의 아내 정도 되는 것처럼 얘기했다. 일반 직장인 1달치 월급을 훨씬 뛰어넘는 옷 가격에 눈 깜짝하지 않은 희정의 얼굴을 전화를 걸면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던 고급 양품점에서 그 만한 눈치 없이는 사치품에 가까운 고가의 옷을 팔기 어렵다는 것을, 디자이너 출신으로 대학 의상학과 교수를 역임한 그녀가 자신의 말마따나 팔자에도 없는 장사를 하게 되면서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틀린 것 같다.

“ 저… 혹시 신대위님 어머니신가요?”

“ 아니 그걸 어떻해… 혹시 그… 이 희정씨?...”

“ 예에… 안녕하세요”

희정이 깊숙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고여사는  커튼을 걷어 햇살을 받은 환한 얼굴로 바뀌며 희정의 양손을 잡아 흔들면서 반색을 했다. 고여사는 쇼파에 까지 희정을 인도하는 동안 희정의 손을 놓지 않았다.

“ 어쩜… 이렇게 참한 아가씨가 우리 동찬이 생명을 구했구먼…”

고여사의 눈에는 어느새  감격의 눈물이 돌아, 바로 앞에 가지런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다소곳한 자세로  자신을 수줍게 바라보는 희정이 굴절되어 보였다. 이내 눈물이 뺨 위로 떨어지자 쇼파 테이블에 있는 화장지로 눈물을 훔쳤다.

“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 학교에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더니만…  같은 시간에 이렇게 천사처럼 나타나다니…”  고여사의 감격은 그칠 줄 몰랐다.

“ 동찬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에요, 작년에 지 아버지  강의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실의에 빠진 내게 동찬은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전투 조종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사고나기 전 동찬이 탑건이 되었을 때 조종사 복을 입고 전투기에 앞에서 동찬이 내 어깨를 감고 찍은 사진을 지갑에 들고 다니며 보는 사람마다 자랑을 했었는데..."

동찬 어머니 고여사는 말 중간 중간에 울먹이며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워 보였다.

“ 남편이 저술한 책의 인지세와  이 건물 임대 수입으로 생활에 지장이 없어 교수자리 집어치고  은퇴하고 손주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이런 일이... 동찬이 저렇게 된 다음에 내가 죽으면 저 놈이 돈이 없으면 어떻해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덜커덩 가슴을 내리 쳤어요, 그래서 이 나이에 이렇게 짙은 화장을 하고  돈 많은 여편네들 상대한답니다… 동찬을 잃었다면 저도 죽은 목숨 이예요, 정말 감사드려요.”

고여사는 말이 길어지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며 마음 속으로 희정이 며느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제가 한 일이 없어요,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 메모도 신대위님이 적어달라고 졸라서 마지못해 적어준 거구요…”

“ 그 놈이 그랬다구요? 이런 응큼한 놈 호호호”

그제서야 고여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두 사람의 대화는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웬만해서 자신의 사생활을 내비추지 않는 희정도 허리를 숙여 얼굴을 희정에게 가까히 가져가 이런 저런 소소한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고여사의 얼굴에서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저 정도의 고상한 언어구사와 품행이 예사롭지 않음에 희정도 고여사에게 마음이 끌렸다.

“ 이렇게 고운 아가씨가 그런 일들을 겪고 살았다니… “

희정의 어린 시절과 엄마와 아버지가 사고로 작고하신 것, 최근에 남편마저 불치병으로 생을 달리한 것을 알고  다시 눈가가 촉촉해진 고여사는 희정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 전에 희정에게 가지고 있던 막연한 부담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희정의 내심을 떠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 그래… 그날 누굴 면회하러 간 거예요?”

“ ………”

“ 동찬이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면, 내가 조금 있다 저녁식사 시간 맞추어 병원가니까 대신 안부전해드릴께요, 아니… 그러지 말고 조금 있다가 같이 가요. 오늘 가게 좀 빨리 닫죠 뭐…”  

고여사는 어떻해든 희정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

“아 , 아네요,  혼자 다녀오세요, 전 이미  동생하고  저녁 약속이 되어 있어요. 지금쯤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 동생?  애인이 아니고?”

고여사는 같이 병원에 가자는 말에 몹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희정에게 고개를 약간 틀어 뭐라고 짚어내려는 듯한 익살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 아네요, 애인 없어요… 동생이 사법시험 준비 중에 있어서 한 동안 만나지 못했어요, 모처럼 식사나 같이 하려고…”  

“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꺼야… 누군지 참 좋겠다. 이런 아가씨를 아내를 맞이하는 사람은…”

희정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끔 들리겠노’라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고 자리를 나섰다. 고여사는 희정이 만지작 거리던 정장 한 벌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가게 문을 밀고 나가는 희정의 뒤를 따랐다.

희정이 부지런히 전철역을 향해 걷다가 뒤돌아 보자, 여전히 가게 문 앞에서 희정이 손사레치며 끝내 고사한 쇼핑백을 들고  멀뚱히 서있는 고여사가 보였다.  고여사는 다시 깊숙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나는 희정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고 여사의 귓전에는 그녀의 잣대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 희정의 ‘어머니’ 라고 부른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것이 그녀의 가슴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슴에 그녀 자신도 놀랐다. 작아지는 희정을 바라보던 고여사의 미소는 끝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변하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서  쇼파에 힘없이 풀썩 주저앉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져 검정 아이라인이 뭉겨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검정 눈물처럼 그녀의 마음도 이런 저런 감정이 뒤섞인 채 분명한 색깔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며느리인 동찬의 아내가 원망스러워, 동찬이 불쌍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 국물부터 마시는 자신이 스스로도 측은하여… 그러다가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외로움과 원망으로 변질되어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하다 가는 게 부모라 했던가. 고여사는 자신이 죽은 후 자기 몸 혼자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동찬을 생각하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어리 하나 얹어 놓은 것 같은 답답함 아니, 그보다 더 무겁고 깊은 고통을 느낀다.

“그래… 동찬이에게 이 아가씨는 너무 과분하지… 어쩜 평생을 곁에서 병수발하고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 맘 편하게 눈 감으려고  이렇게 착하디 착한 아가씨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줄 순 없지…여보… 꼭 그렇게 빨리 갔어야 했나요, 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나 지금 너무 힘들어요 여보… 흐흐흑...”

고개 숙여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그녀의 어깨가 한참 동안 들썩인다.

댓글목록 6

정창주님의 댓글

정창주 2007.04.24 09:06
  조회수는 항상 높은데 댓글 수가.............<br />
선배님 잘 읽고 갑니다.

김시우님의 댓글

김시우 2007.04.24 16:40
  클릭했다가 문장이 길어 안 읽고 그냥 나가나봅니다. <br />
제가 초대한 분도 꽤 있고 여성분들이 많이 읽는 것 같습니다. <br />
자주 찾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독후감은 탈고할 때 받겠습니다. <br />
참여해주신 분들과 탈고 파티라도 해야겠죠? ^^

하태돈님의 댓글

하태돈 2007.04.24 20:20
  김시우씨,<br />
탈고 할 때 까지<br />
건투를 빕니다.

정창주님의 댓글

정창주 2007.04.25 16:08
  예전에 탈고 파티에 참석했을 때에는 초판본을 받는 영광이 있었는데,<br />
그럼 책으로 내셔서 초판본에 멋진 사인 곁들여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

김시우님의 댓글

김시우 2007.04.26 00:39
  격려 감사 드립니다. <br />
하선배님 봐서라도 탈고 해야겠고, 정후배 봐서라도 출판을 해야할텐데 <br />
제 글을 받아줄 출판사가 있을까 모르겠습니다.^^;<br />

박명근님의 댓글

박명근 2007.04.26 00:41
  나도 읽었으니 잘 읽었다고 한자 쓰고 가야제 <br />
건데 오랜만에 읽으니 다시 옛날것 잘 정리해야 것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