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여정(22회)
김시우
2007.05.12 16:49
1,775
4
본문
“ 경민이 형, 이 분이 우리 서클 선배야?”
“ 그래 마, 달수형 이잖아, 네가 우리 서클 창단식 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했던 그 형이야. 네 이상형이라며?”
달수는 경민과 그녀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여 안주를 뒤적였다. 그녀가 달수 앞에 앉은 천수를 밀치자 천수가 짜증을 낸다.
“아이 참 누나, 저기 빈자리 있잖아.”
“비켜 짜샤, 최고참 선배님 좌우 전후방으로 역시 고참순으로 앉는 거야.”
수연이 투덜거리며 술잔과 젖가락을 집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천수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걷어 올려쳤다. 달수는 수연이 남자보다 더 남자같은 성격임을 알아차렸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저 기억하시죠?”
“………”
“ 우리 버스에서 만났잖아요, 4일전에…근데 기억 안 나세요?”
“ 어? 가만 있어보자… 본 것 같기도 하고…”
달수는 한 눈에 수연을 알아봤지만 시치미 떼면서 머물거렸다. 버스 안에서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대했던 달수는 그녀를 반기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왠지 어색했다. 그러는 달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연은 달수를 더욱 궁지에 몰아세웠다.
“ 아니 그렇게 기억력이 없어서 어떻게…, 부하들 얼굴은 기억하세요?
”……”
달수는 마땅히 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서 일찌감치 후배들이 골뱅이를 모두 낚아 채어간, 오징어포와 야채만 남아있는 골뱅이 안주 접시를 뒤적이며,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지 내심 난감했다. 그 때 정민이 구세주로 등장했다.
“ 야, 수연아! 너 달수 형 만났었어? 언제? ”
“ 아! 이제 기억난다. 제 옆자리에 앉았던 분인가요? 내가 그 때 어머니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급히 가는 길이라 넋이 빠져, 옆에 누가 앉아 말시킨 것은 기억나는데 얼굴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어서...”
달수는 더 이상 모른 채 하다가 바보 취급 당할 것 같아, 숨기고 있었던 어머니의 별세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수의 말에 술을 마시거나 안주 쟁탈전을 벌이던 후배들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달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 야, 야, 분위기 깨진다. 자, 자, 잔 채우고 건배하자.”
쭈빗 쭈빗하던 후배들이 잔을 채우고 달수의 건배 선창에 잔을 부딪히며 걸쭉한 막걸리를 벌컥 벌컥 들이킨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꾼 달수를 수연이 표정없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수연은 4일전 버스 안에서도 느꼈던 달수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소용돌이 쳤다. 그녀는 벌겋게 취한 달수의 얼굴에서 버스 안에서 소리를 죽여 서럽게 울던 모습을 읽어내고 있었다.
“ 수연아 뭐해? 한 잔 쫘~악 들이켜”
수연을 좋아하는 정민이 며칠 전 말다툼을 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수연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며 새로 나온 안주를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달수의 후배들은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하고 수연은 달수와 정민이 군대 얘기를 하는 것이 지루한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식탁에는 눈알까지 파먹은 삼치머리와 뼈가 담긴 접시와 국물까지 비운 매운탕 냄비등 10여개의 안주 접시와 술잔, 수저 등이 질펀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이름 모를 후배 하나가 취해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고 버스및 전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두 떠난 자리에 달수와 정민, 그리고 수연만이 남아있다. 정민은 꼬부라진 혀로 손까지 휘저어가며 수연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달수는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달수는 사람들이 떠나고 난 긴 밤을 어디가서 어떻게 보내야 할 지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군인 아저씨이~ 얼마 전에도 영업시간 지키지 않아 경찰에게 적발되어 벌금을 냈어요.”
10여분 전 영업시간이 끝났슴을 이미 알렸던 식당 주인이 손님이 다 떠난 테이블 위로 의자를 올리면서 안달하자 달수가 술값을 지불하기 위해 카운터로 가서 계산서를 받아들었다. 인적이 거의 끝긴 학교 후문가로 나온 달수가 택시를 잡으려 큰 길로 나서는데 정민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가지고 달수의 뒤를 따라오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져 거친 모래가 손바닥에 박혀 피가 흐르는 데도 2차를 가자고 생떼를 쓴다.
“ 달수형 한 잔 더 하자, 수연아 너도 같이 갈꺼지?”
“ 그 몸 가지고 어떻게 술을 더 마시자 그래? 정민이 형 그냥 집에 가라 응?”
가기 싫다는 정민의 등을 택시 안으로 떠밀어 태운 수연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달수에게 다가갔다. 달수와 수연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 수연이 힐끔 달수를 올려다 보았다. 달수는 술에 취해 친구의 부축을 받아 고개를 떨구고 다리를 끌며 걸어가는 남학생을 바라보다가, 방금 그들이 나온 포장마차의 주황색 비닐을 말아 걷어 올려 지붕에 묶으며 파장을 준비하는, 부부인 듯한 중년 남녀의 표정없는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달수는 언제부턴가 삶의 고뇌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눈이 생겼다. 달수는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 그들의 자녀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줄에 들어선 달수는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짚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멍한 눈을 하고 있는 달수를 수연이 의아하게 쳐다보며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달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 집이 어디…”
“ 집이 어디…”
동시에 같은 질문을 던진 둘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달수는 집에 가고픈 생각이 없었다. 수연이 누군지, 어떤 여자인지 모르지만 그냥 같이 있고 싶었다. 그저 외로움만 덜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난 저리로 조금만 걸어가면 돼, 학교로 들어갔다가 개구멍을 통해 가면 빠른데, 밤이라 택시 타고 가려고…”
“ 개구멍이요?”
“ 어? 표현이 좀 그런가? 전문대 옆에 조금만 야산이 있는데 그 아래 집이 있거든…”
“ 그래요? 난 석바위예요…방향이 같으니까 같이 타고 가다가 내리시면 되겠네요.”
택시에 앉은 달수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가 없는 집에 가기도 싫거니와 엄마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을지도 모르는 그 여자를 볼라치면 무슨 일을 낼지 모르는 불 같은 성격에다, 술도 취했기 때문에 감정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일본의 어느 장수는 친구를 만나러 갈 때는 칼을 휴대했지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빈 칼집만 차고 갔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씀도 떠올랐다.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 피하지’라는 말을 어머니는 그렇게 고상하게 표현했다. 달수는 분노가 끓어오를 때 늘 어머니를 생각했다.
달수 어머니는 많은 고사성어를 알고 계셨다. 일제 시대 인천 정동에서 한의사를 했다는 외할아버지의 막내로 태어난 달수어머니는 일본 총독부 고위 간부를 치료하여 큰 재산을 하사받았다는 외할아버지가 한의사가 아니었으면 소아적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만큼 허약하다고 했다. 달수가 어머니가 한 쪽 다리를 약간 전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 인 것 같다. 한의사이며 지역유지인 외할아버지는 훈장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켰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달수 어머니는 고사성어와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달수는 성장하면서 줄곧 옳지 못한 행동으로 행여나 자신에게 기대가 큰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겨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달수 어머니는 살갑지 않은 달수 아버지와 부부의 연을 맺어 속을 태울 때도 ‘달수만 잘 성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이까짓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며 그 고단한 삶을 버텨왔었다. 달수의 누나 역시 어머니를 닮아 허약했고 달수 형은 어려서 부터 친구들에게 맞고 들어오는 심약한 성격에 사회적응을 잘 하지 못해 골치거리였다. 그러기에 달수 어머니에게는 달수가 전부이고, 달수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전부인양 살아왔었다.
달수의 아버지는 달수의 고등학교 동창 최민규의 아버지인 대한기업 회장 최돈식의 모함으로 인천 경찰서 정보국장에서 대전 경찰서 추풍령 지국장으로 좌천됐다. 민규 아버지가 달수 아버지가 자신을 내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정치자금을 대고 있는 공화당의 고위인사에게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달수 아버지가 이천, 여주 등에 땅을 구입하였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고, 관할지역에 있는 호텔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것이 결정적인 좌천의 이유가 되었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경찰 직무와 관련된 정보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여 불공정하게 재물을 취득했다는 경찰청 감사실의 보고서 내용이었다. 그 보고서는 민규의 아버지가 줄을 댄 정부 고위인사의 압력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달수 아버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군 장성과 같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승진하는 경무관급 경찰인사에 정치인이 개입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거물급이라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어 순순히 받아들였다.
달수 아버지는 그것이 상부의 자진 퇴직압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초중고 대학에 재학중인 자녀들에 대한 부양 때문에 유배나 다름없는 오지 근무를 수락했다. 그 때부터 달수의 어머니는 여자로서 가슴에 한을 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달수 어머니는 자식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아버지와 별거할 수 밖에 없었고, 달수 아버지가 추풍령 시골 마을의 과부와 그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웃 아주머니의 귀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아주머니는 추석때 추풍령에 있는 본가를 방문하였다가 달수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 귀뜸이 있은 뒤 주말마다 집에 오던 달수 아버지는 점차 그 횟수가 줄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다녀가다 몇 달에 한 번 집에 다녀갔다.
달수 어머니는 자녀들 뒷바라지 때문에 그 소문을 확인할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아니 확인한다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속이 숯검댕이가 되어 그렇게 몇 년을 지냈다. 이미 한 번 퇴직압력을 받은 달수 아버지의 부정행위가 상부에 알려지면 퇴직금 몰수라는 엄중한 처벌을 받고 퇴직을 해야하기 때문에 달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가슴앓이만 해야했다. 달수는 아버지없는 안방에서 어머니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으며 아침도 안 먹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어느날 달수 형 달호가 추풍령 그 여자가 운영하는 식당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달호는 식당에 딸린 방에 그 여자와 함께 있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그 후로 달수 형 달호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달수는 어린 조카를 보면서 집안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이제 아버지가 아니라 장남인 형이라면서 형의 방황을 나무랐다. 그러면 달호는 며칠 간 정신을 차리고 술을 끊었다. 그러나 달수는 화병을 앓는 어머니와 심약한 형 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군에 입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달수는 형보다 더한 아버지를 향한 증오가 있었지만 방학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근무처를 방문하고서 그 증오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 때 수백명의 부하를 거느린 대도시 치안 책임자가 파출소 같은 건물에서 수명의 부하들과 낡은 책상을 서로 마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배나 다름없는 그 자리조차 지켜내야 했던 아버지의 비애를 가슴에 담고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달수는 독한디 독한 백세주를 마시면서 울고 또 울었었다.
달수는 그 모든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의 흐느낌조차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적막한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 수연과 함께 있다. 좁은 택시 안에는 술자리와 달리 수연의 수다는 없고, 택시 기사가 그들을 태우기 조금 전 피웠을 찌들은 담배냄새와, 달수와 수연의 위장에 아직 걸쳐있는 막걸리와 생선 비린내와 정적만이 있다. 그 때 수연이 그 정적을 깼다.
“ 아저씨, 잠깐만요, 차 좀 돌릴 수 있나요? ”
수연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는 룸 밀러로 힐끔 그녀를 올려다 보고 달수의 표정을 살폈다. 기사나 달수나 차를 돌려야 하는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다. 기사가 대답 대신 그들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역한 냄새를 못 견딘 듯 창문을 내리자 차바퀴 마찰음과 맞바람 소리가 라디오의 여린 음악을 삼켰다.
“ 형 괜찮죠, 나 서클 룸에 지갑을 두고 온 것 같아요, 잠깐만 같이 갔다 갈 수 있어요?”
“ 다시 한 번 잘 찾아봐.”
“ 아니 분명히 두고 왔어요.”
수연은 책가방에 들어있는 지갑을 손으로 느끼며 가방을 내려다 보는 달수가 가방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 가방을 가슴으로 안았다.
“ 내일 아침 일찍 찾으러 가면 안돼?”
“ 내일 아침에 필요한 중요한 것이 들어있어요, 지금 가지러 가야 돼요.”
학교 후문으로 돌아온 달수와 수연은 굳게 다친 후문을 보고 서로 허공에서 눈을 맞추다 좌우를 돌아보았다. 좌우로 끝없이 이어지는 높은 담장만이 눈에 들어왔다.
“ 형 저 목마 좀 태워줘요.”
“ 목마? 갑자가 그건 무슨 말이야? 목마라니?”
“ 형 목을 좀 빌려줘요, 저 담장 좀 오르게…”
달수가 짧은 치마를 입은 수연을 쳐다보며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간파를 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색 카바 양말과 발등이 노출된 굽 낮은 구두를 신은 그녀가 발을 구르며 달수를 다그치자 달수가 한 번 더 수연의 의지를 꺽으려 했다.
“ 담장을 넘는 건 좋은데, 문과대 현관문이 잠겨있으면 써클룸으로 들어갈 수 없잖아.”
“ 형, 서클 룸은 반지하에 있잖아요, 문과대 빌딩 뒤로 돌아가서 서클룸 창문으로 들어가면 돼요. 서클 룸 창문은 항상 열려있어요.”
수연은 달수가 쪼그리고 앉자 엉덩이를 쓸어 치마를 붙이고 달수의 목에 걸터 앉았다. 달수가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펴지질 않았다. 수연이 아무리 호리 호리한 몸매를 가졌더라도 신장이 168cm인 그녀의 체중은 만만치 않았다. 사력을 다해 간신히 일어선 달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 형 뭐해요? 다리 좀 잡아 밀어요”
담장 끝을 잡고 바둥거리는 수연이 외쳤다. 달수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 올려 밀었다. 수연의 치마 안이 적나나하게 들여다 보이자 달수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국군 수도 통합병원에서 만났던 발목지뢰에 오른 발목을 잃은 동기 박정국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너 여자 다 꼬셨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놓친 적 있냐? 아니면 보름달 휘영청 밝은 밤에 여자 치맛속을 보았던지…우리 수색대에 그러면 본인이나 가족중의 누군가 사고를 당하거나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다더라, 나도 그랬었거든… 아~ 왜 하필 그 순간에 서질 않는건지…앉은 자리에 그냥 보냈잖아, 쓰벌…”
수연이 담장 끝을 겨드랑이로 걸쳐 잡고 발로 담장 벽을 밀어 올려 간신히 담장 위에 걸터 앉았다. 달수는 점프를 하여 담장을 끝을 잡은 뒤 담장위로 오른 다음 훌쩍 담장을 뛰어 넘어 안으로 내렸다.
달수가 다시 수연을 목에 앉히려고 담장 가까히 붙어 등을 돌려 섰지만 수연의 발끝이 달수 머리에 대롱거리고 수연이 달수의 목에 앉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달수가 돌아서서 수연을 마주보고 두 팔을 뻗어 올렸다. 담장에 걸터앉은 수연이 최대한 고개를 숙여 간신히 달수의 손을 잡고 한 팔씩 달수의 목을 감아 안았다. 담장에서 간신히 내린 수연이 두 다리로 달수의 허리를 감아 잡아 두 사람은 강하고 깊은 포옹의 자세가 되었다.
“ ……뭐해? 안 내리고…”
달수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수연을 땅에 내린 달수가 ‘후’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칫하면 수연을 놓치거나 같이 넘어져 심하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수연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즐기는 얼굴이었다.
“어?”
수연이 달수 몰래 책가방에서 빼내 상의 주머니에 넣었던 지갑이 달수의 손을 잡으려고 고개를 숙일 때 떨어진 것을 달수가 먼저 본 것이다. 달수가 허리를 숙여 지갑을 들고 열어보려 하자 수연이 빠르게 낚아챈다.
“ 왜 남의 지갑을 열어봐요, 안에 큰 돈이 있거나 그러면 견물생심이니까…그냥 내일 수위실이나 학생회에 가져다 줘요. 내일 제가 갔다 줄께요.”
“ 수연이 네꺼 아냐?”
“ 아녜요.” 수연이 정색을 하고 시치미를 뚝 땠다.
“ 근데 이런 게 여기 왜 떨어져 있지?”
플라타너스 잎파리가 뒹구는 길을 따라 달수와 수연이 걸었다. 수연은 학교 담장안에는 아마도 자기와 달수만이 있을 것알고 생각하니 마치 자신의 안방에 들어온 것 처럼 마음이 편했다. 달수가 하늘을 쳐다보니 휘영청 밝은 보름달 주위에 달무리가 감아 돌고 있었다. 독도법 교범에서 읽었던 문구가 생각이 났다.
“ 달무리가 지고 개미가 줄을 지어 이동하면 비가 올 것이라는 징조이다.”
달수가 옆에 있는 수연의 얼굴을 쳐다보니 술에 취해 뺨이 벌건 하얀 얼굴이 달빛에 섞여 고왔다. 초 가을 서늘한 공기는 술에 오른 몸의 열기를 식히고 상쾌한 기분을 자아냈다. 수연이 능청스럽게 달수의 팔을 감아잡았다. 달수가 흠칫 놀라 쳐다보니 수연이 하늘을 보고 단청을 피었다. 달수가 피식 웃었다. 달수는 처음부터 수연에게 여자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지만 씩씩한 수연이 싫지는 않다.
“ 그것 봐요, 창문이 열려있죠”
문과대학 빌딩을 돌아 수십개의 창문이 있는 곳에서 기타 동호회 서클 룸 창문을 찾아낸 수연이 소리쳤다. 달수가 몸을 돌려 창틀을 잡고 몸 전체를 집어 넣어으나 발이 닿지 않았다. 칠흙같이 어두운 서클 룸의 바닥이 자신의 발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또한 무슨 물건이 있는지 기억도 안났다. 잘못하면 물건을 밟아 균형을 잃어 다칠지도 몰랐다.
“ 에라 모르겠다.”
달수가 손을 놓았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달수는 중심을 읽고 넘어졌다. 머리로 벽을 때려서 눈알이 빠질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왼쪽 발목과 무릎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 형 괞찮아요? 형!
“ 아! ……”
“ 형! 형! 말 좀 해봐요”
칠흙 같은 서클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달수를 수연이 애처롭게 불렀다.
“ 그래 마, 달수형 이잖아, 네가 우리 서클 창단식 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했던 그 형이야. 네 이상형이라며?”
달수는 경민과 그녀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여 안주를 뒤적였다. 그녀가 달수 앞에 앉은 천수를 밀치자 천수가 짜증을 낸다.
“아이 참 누나, 저기 빈자리 있잖아.”
“비켜 짜샤, 최고참 선배님 좌우 전후방으로 역시 고참순으로 앉는 거야.”
수연이 투덜거리며 술잔과 젖가락을 집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천수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걷어 올려쳤다. 달수는 수연이 남자보다 더 남자같은 성격임을 알아차렸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저 기억하시죠?”
“………”
“ 우리 버스에서 만났잖아요, 4일전에…근데 기억 안 나세요?”
“ 어? 가만 있어보자… 본 것 같기도 하고…”
달수는 한 눈에 수연을 알아봤지만 시치미 떼면서 머물거렸다. 버스 안에서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대했던 달수는 그녀를 반기고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왠지 어색했다. 그러는 달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연은 달수를 더욱 궁지에 몰아세웠다.
“ 아니 그렇게 기억력이 없어서 어떻게…, 부하들 얼굴은 기억하세요?
”……”
달수는 마땅히 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서 일찌감치 후배들이 골뱅이를 모두 낚아 채어간, 오징어포와 야채만 남아있는 골뱅이 안주 접시를 뒤적이며,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지 내심 난감했다. 그 때 정민이 구세주로 등장했다.
“ 야, 수연아! 너 달수 형 만났었어? 언제? ”
“ 아! 이제 기억난다. 제 옆자리에 앉았던 분인가요? 내가 그 때 어머니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급히 가는 길이라 넋이 빠져, 옆에 누가 앉아 말시킨 것은 기억나는데 얼굴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어서...”
달수는 더 이상 모른 채 하다가 바보 취급 당할 것 같아, 숨기고 있었던 어머니의 별세를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수의 말에 술을 마시거나 안주 쟁탈전을 벌이던 후배들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달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 야, 야, 분위기 깨진다. 자, 자, 잔 채우고 건배하자.”
쭈빗 쭈빗하던 후배들이 잔을 채우고 달수의 건배 선창에 잔을 부딪히며 걸쭉한 막걸리를 벌컥 벌컥 들이킨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꾼 달수를 수연이 표정없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수연은 4일전 버스 안에서도 느꼈던 달수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소용돌이 쳤다. 그녀는 벌겋게 취한 달수의 얼굴에서 버스 안에서 소리를 죽여 서럽게 울던 모습을 읽어내고 있었다.
“ 수연아 뭐해? 한 잔 쫘~악 들이켜”
수연을 좋아하는 정민이 며칠 전 말다툼을 한 것을 만회하려는 듯 수연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며 새로 나온 안주를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달수의 후배들은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하고 수연은 달수와 정민이 군대 얘기를 하는 것이 지루한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식탁에는 눈알까지 파먹은 삼치머리와 뼈가 담긴 접시와 국물까지 비운 매운탕 냄비등 10여개의 안주 접시와 술잔, 수저 등이 질펀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이름 모를 후배 하나가 취해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고 버스및 전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두 떠난 자리에 달수와 정민, 그리고 수연만이 남아있다. 정민은 꼬부라진 혀로 손까지 휘저어가며 수연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달수는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달수는 사람들이 떠나고 난 긴 밤을 어디가서 어떻게 보내야 할 지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군인 아저씨이~ 얼마 전에도 영업시간 지키지 않아 경찰에게 적발되어 벌금을 냈어요.”
10여분 전 영업시간이 끝났슴을 이미 알렸던 식당 주인이 손님이 다 떠난 테이블 위로 의자를 올리면서 안달하자 달수가 술값을 지불하기 위해 카운터로 가서 계산서를 받아들었다. 인적이 거의 끝긴 학교 후문가로 나온 달수가 택시를 잡으려 큰 길로 나서는데 정민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가지고 달수의 뒤를 따라오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져 거친 모래가 손바닥에 박혀 피가 흐르는 데도 2차를 가자고 생떼를 쓴다.
“ 달수형 한 잔 더 하자, 수연아 너도 같이 갈꺼지?”
“ 그 몸 가지고 어떻게 술을 더 마시자 그래? 정민이 형 그냥 집에 가라 응?”
가기 싫다는 정민의 등을 택시 안으로 떠밀어 태운 수연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달수에게 다가갔다. 달수와 수연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 수연이 힐끔 달수를 올려다 보았다. 달수는 술에 취해 친구의 부축을 받아 고개를 떨구고 다리를 끌며 걸어가는 남학생을 바라보다가, 방금 그들이 나온 포장마차의 주황색 비닐을 말아 걷어 올려 지붕에 묶으며 파장을 준비하는, 부부인 듯한 중년 남녀의 표정없는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달수는 언제부턴가 삶의 고뇌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눈이 생겼다. 달수는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하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 그들의 자녀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줄에 들어선 달수는 스스로 철이 들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짚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멍한 눈을 하고 있는 달수를 수연이 의아하게 쳐다보며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달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 집이 어디…”
“ 집이 어디…”
동시에 같은 질문을 던진 둘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달수는 집에 가고픈 생각이 없었다. 수연이 누군지, 어떤 여자인지 모르지만 그냥 같이 있고 싶었다. 그저 외로움만 덜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난 저리로 조금만 걸어가면 돼, 학교로 들어갔다가 개구멍을 통해 가면 빠른데, 밤이라 택시 타고 가려고…”
“ 개구멍이요?”
“ 어? 표현이 좀 그런가? 전문대 옆에 조금만 야산이 있는데 그 아래 집이 있거든…”
“ 그래요? 난 석바위예요…방향이 같으니까 같이 타고 가다가 내리시면 되겠네요.”
택시에 앉은 달수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가 없는 집에 가기도 싫거니와 엄마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을지도 모르는 그 여자를 볼라치면 무슨 일을 낼지 모르는 불 같은 성격에다, 술도 취했기 때문에 감정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일본의 어느 장수는 친구를 만나러 갈 때는 칼을 휴대했지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빈 칼집만 차고 갔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씀도 떠올랐다.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 피하지’라는 말을 어머니는 그렇게 고상하게 표현했다. 달수는 분노가 끓어오를 때 늘 어머니를 생각했다.
달수 어머니는 많은 고사성어를 알고 계셨다. 일제 시대 인천 정동에서 한의사를 했다는 외할아버지의 막내로 태어난 달수어머니는 일본 총독부 고위 간부를 치료하여 큰 재산을 하사받았다는 외할아버지가 한의사가 아니었으면 소아적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만큼 허약하다고 했다. 달수가 어머니가 한 쪽 다리를 약간 전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 인 것 같다. 한의사이며 지역유지인 외할아버지는 훈장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켰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달수 어머니는 고사성어와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달수는 성장하면서 줄곧 옳지 못한 행동으로 행여나 자신에게 기대가 큰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겨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달수 어머니는 살갑지 않은 달수 아버지와 부부의 연을 맺어 속을 태울 때도 ‘달수만 잘 성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이까짓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며 그 고단한 삶을 버텨왔었다. 달수의 누나 역시 어머니를 닮아 허약했고 달수 형은 어려서 부터 친구들에게 맞고 들어오는 심약한 성격에 사회적응을 잘 하지 못해 골치거리였다. 그러기에 달수 어머니에게는 달수가 전부이고, 달수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전부인양 살아왔었다.
달수의 아버지는 달수의 고등학교 동창 최민규의 아버지인 대한기업 회장 최돈식의 모함으로 인천 경찰서 정보국장에서 대전 경찰서 추풍령 지국장으로 좌천됐다. 민규 아버지가 달수 아버지가 자신을 내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정치자금을 대고 있는 공화당의 고위인사에게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달수 아버지가 이천, 여주 등에 땅을 구입하였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고, 관할지역에 있는 호텔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것이 결정적인 좌천의 이유가 되었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경찰 직무와 관련된 정보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여 불공정하게 재물을 취득했다는 경찰청 감사실의 보고서 내용이었다. 그 보고서는 민규의 아버지가 줄을 댄 정부 고위인사의 압력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달수 아버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군 장성과 같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승진하는 경무관급 경찰인사에 정치인이 개입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거물급이라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어 순순히 받아들였다.
달수 아버지는 그것이 상부의 자진 퇴직압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초중고 대학에 재학중인 자녀들에 대한 부양 때문에 유배나 다름없는 오지 근무를 수락했다. 그 때부터 달수의 어머니는 여자로서 가슴에 한을 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달수 어머니는 자식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아버지와 별거할 수 밖에 없었고, 달수 아버지가 추풍령 시골 마을의 과부와 그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웃 아주머니의 귀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아주머니는 추석때 추풍령에 있는 본가를 방문하였다가 달수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 귀뜸이 있은 뒤 주말마다 집에 오던 달수 아버지는 점차 그 횟수가 줄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다녀가다 몇 달에 한 번 집에 다녀갔다.
달수 어머니는 자녀들 뒷바라지 때문에 그 소문을 확인할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아니 확인한다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속이 숯검댕이가 되어 그렇게 몇 년을 지냈다. 이미 한 번 퇴직압력을 받은 달수 아버지의 부정행위가 상부에 알려지면 퇴직금 몰수라는 엄중한 처벌을 받고 퇴직을 해야하기 때문에 달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가슴앓이만 해야했다. 달수는 아버지없는 안방에서 어머니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으며 아침도 안 먹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어느날 달수 형 달호가 추풍령 그 여자가 운영하는 식당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달호는 식당에 딸린 방에 그 여자와 함께 있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그 후로 달수 형 달호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달수는 어린 조카를 보면서 집안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이제 아버지가 아니라 장남인 형이라면서 형의 방황을 나무랐다. 그러면 달호는 며칠 간 정신을 차리고 술을 끊었다. 그러나 달수는 화병을 앓는 어머니와 심약한 형 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군에 입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달수는 형보다 더한 아버지를 향한 증오가 있었지만 방학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근무처를 방문하고서 그 증오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 때 수백명의 부하를 거느린 대도시 치안 책임자가 파출소 같은 건물에서 수명의 부하들과 낡은 책상을 서로 마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배나 다름없는 그 자리조차 지켜내야 했던 아버지의 비애를 가슴에 담고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달수는 독한디 독한 백세주를 마시면서 울고 또 울었었다.
달수는 그 모든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의 흐느낌조차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적막한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 수연과 함께 있다. 좁은 택시 안에는 술자리와 달리 수연의 수다는 없고, 택시 기사가 그들을 태우기 조금 전 피웠을 찌들은 담배냄새와, 달수와 수연의 위장에 아직 걸쳐있는 막걸리와 생선 비린내와 정적만이 있다. 그 때 수연이 그 정적을 깼다.
“ 아저씨, 잠깐만요, 차 좀 돌릴 수 있나요? ”
수연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는 룸 밀러로 힐끔 그녀를 올려다 보고 달수의 표정을 살폈다. 기사나 달수나 차를 돌려야 하는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다. 기사가 대답 대신 그들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역한 냄새를 못 견딘 듯 창문을 내리자 차바퀴 마찰음과 맞바람 소리가 라디오의 여린 음악을 삼켰다.
“ 형 괜찮죠, 나 서클 룸에 지갑을 두고 온 것 같아요, 잠깐만 같이 갔다 갈 수 있어요?”
“ 다시 한 번 잘 찾아봐.”
“ 아니 분명히 두고 왔어요.”
수연은 책가방에 들어있는 지갑을 손으로 느끼며 가방을 내려다 보는 달수가 가방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 가방을 가슴으로 안았다.
“ 내일 아침 일찍 찾으러 가면 안돼?”
“ 내일 아침에 필요한 중요한 것이 들어있어요, 지금 가지러 가야 돼요.”
학교 후문으로 돌아온 달수와 수연은 굳게 다친 후문을 보고 서로 허공에서 눈을 맞추다 좌우를 돌아보았다. 좌우로 끝없이 이어지는 높은 담장만이 눈에 들어왔다.
“ 형 저 목마 좀 태워줘요.”
“ 목마? 갑자가 그건 무슨 말이야? 목마라니?”
“ 형 목을 좀 빌려줘요, 저 담장 좀 오르게…”
달수가 짧은 치마를 입은 수연을 쳐다보며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간파를 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색 카바 양말과 발등이 노출된 굽 낮은 구두를 신은 그녀가 발을 구르며 달수를 다그치자 달수가 한 번 더 수연의 의지를 꺽으려 했다.
“ 담장을 넘는 건 좋은데, 문과대 현관문이 잠겨있으면 써클룸으로 들어갈 수 없잖아.”
“ 형, 서클 룸은 반지하에 있잖아요, 문과대 빌딩 뒤로 돌아가서 서클룸 창문으로 들어가면 돼요. 서클 룸 창문은 항상 열려있어요.”
수연은 달수가 쪼그리고 앉자 엉덩이를 쓸어 치마를 붙이고 달수의 목에 걸터 앉았다. 달수가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펴지질 않았다. 수연이 아무리 호리 호리한 몸매를 가졌더라도 신장이 168cm인 그녀의 체중은 만만치 않았다. 사력을 다해 간신히 일어선 달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 형 뭐해요? 다리 좀 잡아 밀어요”
담장 끝을 잡고 바둥거리는 수연이 외쳤다. 달수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 올려 밀었다. 수연의 치마 안이 적나나하게 들여다 보이자 달수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국군 수도 통합병원에서 만났던 발목지뢰에 오른 발목을 잃은 동기 박정국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너 여자 다 꼬셨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놓친 적 있냐? 아니면 보름달 휘영청 밝은 밤에 여자 치맛속을 보았던지…우리 수색대에 그러면 본인이나 가족중의 누군가 사고를 당하거나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다더라, 나도 그랬었거든… 아~ 왜 하필 그 순간에 서질 않는건지…앉은 자리에 그냥 보냈잖아, 쓰벌…”
수연이 담장 끝을 겨드랑이로 걸쳐 잡고 발로 담장 벽을 밀어 올려 간신히 담장 위에 걸터 앉았다. 달수는 점프를 하여 담장을 끝을 잡은 뒤 담장위로 오른 다음 훌쩍 담장을 뛰어 넘어 안으로 내렸다.
달수가 다시 수연을 목에 앉히려고 담장 가까히 붙어 등을 돌려 섰지만 수연의 발끝이 달수 머리에 대롱거리고 수연이 달수의 목에 앉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달수가 돌아서서 수연을 마주보고 두 팔을 뻗어 올렸다. 담장에 걸터앉은 수연이 최대한 고개를 숙여 간신히 달수의 손을 잡고 한 팔씩 달수의 목을 감아 안았다. 담장에서 간신히 내린 수연이 두 다리로 달수의 허리를 감아 잡아 두 사람은 강하고 깊은 포옹의 자세가 되었다.
“ ……뭐해? 안 내리고…”
달수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수연을 땅에 내린 달수가 ‘후’하고 한숨을 쉬었다. 자칫하면 수연을 놓치거나 같이 넘어져 심하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수연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즐기는 얼굴이었다.
“어?”
수연이 달수 몰래 책가방에서 빼내 상의 주머니에 넣었던 지갑이 달수의 손을 잡으려고 고개를 숙일 때 떨어진 것을 달수가 먼저 본 것이다. 달수가 허리를 숙여 지갑을 들고 열어보려 하자 수연이 빠르게 낚아챈다.
“ 왜 남의 지갑을 열어봐요, 안에 큰 돈이 있거나 그러면 견물생심이니까…그냥 내일 수위실이나 학생회에 가져다 줘요. 내일 제가 갔다 줄께요.”
“ 수연이 네꺼 아냐?”
“ 아녜요.” 수연이 정색을 하고 시치미를 뚝 땠다.
“ 근데 이런 게 여기 왜 떨어져 있지?”
플라타너스 잎파리가 뒹구는 길을 따라 달수와 수연이 걸었다. 수연은 학교 담장안에는 아마도 자기와 달수만이 있을 것알고 생각하니 마치 자신의 안방에 들어온 것 처럼 마음이 편했다. 달수가 하늘을 쳐다보니 휘영청 밝은 보름달 주위에 달무리가 감아 돌고 있었다. 독도법 교범에서 읽었던 문구가 생각이 났다.
“ 달무리가 지고 개미가 줄을 지어 이동하면 비가 올 것이라는 징조이다.”
달수가 옆에 있는 수연의 얼굴을 쳐다보니 술에 취해 뺨이 벌건 하얀 얼굴이 달빛에 섞여 고왔다. 초 가을 서늘한 공기는 술에 오른 몸의 열기를 식히고 상쾌한 기분을 자아냈다. 수연이 능청스럽게 달수의 팔을 감아잡았다. 달수가 흠칫 놀라 쳐다보니 수연이 하늘을 보고 단청을 피었다. 달수가 피식 웃었다. 달수는 처음부터 수연에게 여자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지만 씩씩한 수연이 싫지는 않다.
“ 그것 봐요, 창문이 열려있죠”
문과대학 빌딩을 돌아 수십개의 창문이 있는 곳에서 기타 동호회 서클 룸 창문을 찾아낸 수연이 소리쳤다. 달수가 몸을 돌려 창틀을 잡고 몸 전체를 집어 넣어으나 발이 닿지 않았다. 칠흙같이 어두운 서클 룸의 바닥이 자신의 발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또한 무슨 물건이 있는지 기억도 안났다. 잘못하면 물건을 밟아 균형을 잃어 다칠지도 몰랐다.
“ 에라 모르겠다.”
달수가 손을 놓았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달수는 중심을 읽고 넘어졌다. 머리로 벽을 때려서 눈알이 빠질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왼쪽 발목과 무릎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 형 괞찮아요? 형!
“ 아! ……”
“ 형! 형! 말 좀 해봐요”
칠흙 같은 서클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달수를 수연이 애처롭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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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주님의 댓글
김시우님의 댓글
정창주님의 댓글
김시우님의 댓글
나도 정후배같이 신세대가 아니라 이젠 한물 간 쉰 세대로 이미 접어들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