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여정(25회)
김시우
2007.05.28 04: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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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김대리 상무님이 찾으셔”
결제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상무실에서 나온 개발부장 전영식이 이천의 아파트 개발 후보지역의 개발이익 보고서를 작성하는 달수의 고개를 일으켜 세웠다. 국방부와 기업들이 연대하여 실시하는 전역장교 취업반에서 건축법 과정을 수료한 달수는 신동아 건설에 입사하여 총무과에서 1년 여 근무하다 회사 자체 광고문구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 채택이 되어 홍보실에 발탁이 되었으나, 처음부터 지원부서보다는 직접 건설과 관련된 부서에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꼼꼼하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인정받아 기획조정실 개발팀의 건축부지 선정 및 개발이익분석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 자네 건설분쟁 조정일을 해보지 않겠나? ”
“ 그게 무슨 일입니까?”
듣도 보도 못한 직무에 달수가 김철근 상무에게 되물었다. 건설 붐이 과도하여 건설업자간에 경쟁과 투기가 극성을 부리던 때, 정부에서 5.18 조치를 내려 건축허가 제한 및 자재공급을 통제하자 회사에서 진행하던 일부 공사가 중단되고, 그 공사현장이 우범화가 되어 민원이 들어오고 있어 회사에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어떤 공사현장은 이미 지하 수십 미터를 파내려 갔을 때 공사가 중단되어, 인근 건물의 지하에 있는 지하수와 모래가 동시에 빠져나가는 공동화 현상으로 인근 빌딩들이 벽에 금이 생기고 상가의 바닥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주민들이 피켓을 들고 공사현장에서 데모를 하고 언론에 보도가 되어 회사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
김 상무가 달수에게 제안한 업무는 비 정상적인 공사현장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민원과 법률문제를 처리하는 그야말로 남들이 버리고 간 오물을 치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업무였다. 그러나 회사입장에서는 쓰레기 통을 비우지 않으며 쓰레기를 모아 버릴 공간이 없듯이 머물거릴 틈 없이 당장 해결 해야하는 다급한 문제이기에 회장의 지시에 의해 부장급에서 전결할 수 있는 사안을 상무급에서 검토하여 신중히 결정하도록 하였다. 김상무와 전부장이 이미 달수를 적임자를 정해놓고 달수의 의중을 떠보는 것을 달수가 모를 리 없다.
달수는 서울, 인천 수원 김포등의 여러 공사현장을 뛰어다녔다. 와이셔츠 목에 새까맣게 때가 끼고, 코를 풀면 검은 공사현장 먼지가 콧물에 섞여 갈색 빛을 만들어냈다. 공사현장 주민에게 넥타이가 잡히는 것은 예사였고 뺨을 맞기도 했다. 하루는 달수가 씩씩거리며 김상무를 찾았다. 공사민원과 관계되는 서류의 중간 결재권자로 자신을 넣고 화급을 다투는 사안에 해서는 전결권을 달라고 건의하기 위함이었다. 현장에서 민원을 처리하다 본사의 결재라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어 예방할 수 있는 민원이 생기거나 내용을 몰라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자신도 모르게 무능력한 관리자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달수가 전결권을 가지게 되자 달수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 협조하는 현장 근무자들도 달수를 믿고 따르게 되었, 사소하지만 자칫 간과하다가 공정에 큰 영향을 주고 결국 회사의 이익과 직결될 수도 있는 문제점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달수는 이렇게 현장소장과 함께 현장을 돌면서 현장노동자와 장작불에 얼은 몸을 녹이며 막걸리를 나누어 먹는 유일한 본사 직원이 되어, 그들의 불만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본사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메신져가 되었다. 달수는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피한 현장관리를 통해서 토목 건설기술자가 아님에도 상당한 현장 노하우를 갖게 되었다. 부평의 공사현장 인근 상인과 주민들의 공사금치가처분 신청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방치되었을 때, 달수가 신청자들과 일일히 접촉하여 설득한 끝에 극적으로 합의하여 공사가 재개되었다. 이렇게 준공 예정일을 6개월이나 넘겨 우여곡절 끝에 공사가 완료된 부평 현장의 모델 하우스에서 이례적으로 사장과 이사급 간부가 참석하여 현장 기술자 및 근로자를 위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달수는 그 시간에 또 하나의 문제 현장인 김포의 공사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 사장님예… 김달수 대리가 없었으면 현장에 드러누워 목숨걸고 공사를 방해하는 주민들 때문에 공사를 제때에 마치지 못했을 껍니더… 이 자리에 사장님이 아닌 김달수 대리가 나왔어야 합니데.”
현장 근로자들이 달수가 보이지 않자 달수가 어디 있냐고 사장과 임원들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퇴직 보상금을 주지 않으려고, 해당 직원이 없는 사이에 책상을 복도에 내다 놓아, 무능한 직원에게 자진 퇴직을 압력하는 것이 용인되는 비열하고 처절한 직장 분위기였지만, 현장을 돌아다니는 주인이 거의 비어있는 달수의 책상은 바닥에 고정된 듯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 달수의 민원처리 능력과 행정능력은 일취월장 발전하여, 사장급인 기획조정실장 직속의 건설분쟁조정팀장이란 신설 직책을 받고, 현장에서 들어오는 민원서류를 분석하고 법적인 대응 방안을 강구하는 간부로 성장하여, 자신보다 3년 먼저 입사한 동기생보다 먼저 과장으로 승진되었다.
사장급인 기획조정실장 최상수는 회장의 외조카 였지만 공사구별이 분명하고 인력평가에 있어 공평한 사람이었다. 달수를 유심히 지켜보던 그가 달수에게 대학원이나 법 전문학원에 입학하여 업무능력을 향상시킬 것을 권유했다. 달수는 대학원 보다는 현장에 바로 적용되는 실질적인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 법 전문 학원에 등록하여 1년 뒤에 법무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후 6개월이 지나 회장의 추천서를 가지고 서울 대학원 건축과 도시개발 대학원에 등록을 하던 날, 학교 본관 로비에서 7년만에 우연히 동찬과 조우하고 뜻하지 않은 희정을 만났다.
그리고 희정과 말 한마디, 아니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굳어있다가 인천행 전철에 올랐었다. 달수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외면하던 희정을 다시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달수는 자리가 남아도는 전철에서 앉지 않고 출입구 옆에 있는 쇠기둥에 기대어 서서 고개를 틀어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달수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마침 용산역으로 들어서는 전철에서 내려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번호부 책에서 동찬이 인수하였다는 관악 법학원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 원장님 사모님과 통화할 수 있습니까?”
“ 아! 이 교수님이요? 1시간 전쯤 원장님과 같이 잠깐 들리셨다가 곧 귀가하셨는데요.”
“ 교수님이요?”
“ 원장님 사모님…서울대 불문학과 교숩니다.”
달수는 전철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며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처럼 7년전 그날 그녀를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 집요하게 데이트 신청을 하여 같이 보낸, 채 하루도 안 되는 그 시간속에 숨겨진 사건들을 1막 1장도 안되는 연극무대에 올려 자신과 희정의 연기를 그려보았다. 자신은 주연 배우가 아닌 마치 관객이 된 것인양... 달수는 생각했다. "교수님이라…나만 변한 것이 아니구만…"어떻게 그녀가 동찬의 아내가 되고, 나는 수연도 아닌 진희의 남편이 되었단 말인가…" 철로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며 인천으로 향하는 전철 객실의 쇠기둥에 기대어 창 밖을 바라보는 달수의 머리 속은 복잡하다. 그 복잡함에 희정과 수연과 진희가 얽혀 들어앉아 있었다.
달수와 수연의 만남은 1년 6개월 동안 달수가 전역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때가 달수가 전역 예정일을 두 어달 남겨두고, 달수와 수연의 관계를 모르고 공공연히 자신이 수연의 애인이라고 떠벌이고 다니던 후배 경민이 달수에게 전화를 할 때 쯤인 것 같다. 경민은 자신의 전화를 피하는 수연이 있는 공연하는 호텔을 달수에게 알려주면서 그녀가 서울에 진출할 기회가 있으니 달수에게 연락을 취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수연은 대학 졸업후 음반을 취입했으나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아 낙향하여 강릉 고향집에 머물면서 강릉 및 속초 일대의 관광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주말이면 달수가 수연이 공연하는 호텔에 찾아가고, 공연이 없는 주중에는 둘은 강릉이나 속초 시내에서 만났다. 하루는 달수가 설악산 기슭에 있는 호텔에 일찍 도착하여 수연이 공연하는 나이트 클럽에 찾아 들었다. 수연이 노래를 부른 후 객석으로 내려와 손님들과 동석하며 그 들의 품에 안겨 술잔을 나눌 때 한 손님이 지폐를 그녀의 가슴에 꽂아 넣는 것을 보고 달수는 그 자리를 나와버렸다. 대학 가요제 입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수연이 마치 호스티스 같은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 달수는 이해될 듯 하면서도 못 마땅했었다. 달수는 그녀가 지상 전파 방송을 타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연예계가 실력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달수는 잘 알지 못했다.
달수는 수연에게 자신을 만나는 동안 경민을 만나지 말 것을 다짐 받았었다. 경민은 대형 연예 기획사에 취직하여 메니져로 일하면서 비교적 굴직한 스타들을 관리할 만큼 성장한 것은 이미 기대한 바 이나, 그가 여성 편력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을 신문기사를 통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수이외에도 국민배우로 칭송받는 배우들을 관리하면서 스타의 그늘에 가려있는 메니져로서는 드물게 유명세를 타고, 스타보다 더 유명한 스타로 공중파 연예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달수는 수연이 마치 접대부 처럼 팁을 구걸하는 듯한 모습을 본 이후로 차라리 수연이 경민의 보호를 받으며 경민의 회사에서 방송사에 줄에 대어 밤무대 가수가 아닌 지상 전파 방송사에 진출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려면 달수는 수연을 경민에게 떠나 보내야 했다. 그렇게 수연을 놓고 갈등을 하던 달수는 취한 몸을 이끌고 밤 늦게 관사로 귀가한 날, 전화기의 자동 응답기의 버튼을 눌렀을 때 수연이 격앙된 목소리로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 내가 이제 싫다고 말하면 되지 왜 연락을 끊어…내가 밤무대 가수라서 그래? 그게 내 직업이란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수연의 가벼운 흐느낌... 그 이후에도 달수는 왠지 수연이 공연하는 호텔 나이트 클럽을 몇 번 더 찾아갔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객석의 술 취한 손님의 환호 속에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녀가 자신의 여자가 아닌, 후미진 자신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무대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지며 차마 그녀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다. 달수가 그녀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클럽을 빠져나와 호텔 현관문을 밀고 나와 담배를 물었다. 대형 스피커를 찢을 듯 한, 음악이라기 보다는 소음에 가까운 기계음을 견디었던 고막이 멍하다. 호텔을 둘러싸고 있는 솔잎을 지나 코 점막을 상쾌히 적시는 맑은 공기도 그제서야 제대로 느껴졌다. 설악산 중턱에 있는 호텔은 속초 시내의 대부분과 동해를 한 눈을 굽어볼 수 있었다. 달수는 몇 개월전 이 호텔 11층 객실 베란다에서 수연과 함께 뿌옇게 밝아오는 속초시내와 떠오르는 동해의 아침 해를 바라본 적이 있다. 그 때 수연이 그랬었다.
“오빠 우리도 저 해처럼 매일 새롭게 태어나자, 나 처음처럼 오빠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꺼야. 오빠도 그래야 돼 알았지?”
그러나 지금 달수가 서서 바라보는 저 동해 바다는 어둠에 묻히고 오징어 배의 유인등만이 수평선 근처에서 가물거렸다. 그 해는 내일 아침이 되어도 그 어둠을 뚫고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담배 서너 모금을 빨았을 즈음 달수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달수가 택시에 앉아 문을 닫는 순간 수연이 가슴이 깊게 파이고 치렁 지렁 바닥에 끌리는 무대복의 치마를 추겨올려 잡고 호텔 현관 밖으로 뛰어나왔다. 달수와 수연의 눈이 허공에서 잠시 만났지만 달리는 택시가 그 짧은 만남마저 태워갔다. 달수는 알고 있었다. 수연이 호텔 현관입구에 그대로 서있을 거라는 것을… 그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를 다시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그러나 달수는 택시의 백밀러를 통해 그녀를 보았다. 마치 동상처럼 굳어있는 그녀를… 달수는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자신과 그녀를 위하는 것이라고 순간 생각했다. 사랑과 열정의 중간쯤에서 헤메고 있는 그는 중얼거렸다.
“ 그래 사랑은 없었어… 열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수연아… 넌 서울로 가서 스타가 되야해… 여기서 나와 같이 있으면 안돼…”
택시 기사가 행선지를 물었으나 달수가 대답이 없자 조금 큰 소리로 되물었다. 달수는 그제서야 기사의 말을 제대로 들었지만 또 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행선지를 정하고 택시에 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달수가 속초시내에 가본 곳이라곤 수개월전 수연과 물회를 먹고 찾아갔던 스탠드바 였다.
“...... 속초 시내로 갑시다. 시청 뒤 켠에 스탠드 바… 가게 이름이 뭐였더라…”
“ 영랑 스탠드 바 말씀하시는 거예요?”
“ 아! 예 맞습니다.”
영랑은 속초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그 스탠드 바에서 영랑호가 보였다. 달수는 그냥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수연처럼 노래라도 부르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건물 안으로 들어간 달수가 내부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같은 간판에 같은 스탠드 바였는데 내부가 낯설고 상당히 넓어진 느낌에다가 시장에 좌판을 벌려놓은 듯이 수십 개의 코너로 구분되어 있어 연숙이 어느 코너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멀뚱히 입구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중년 아주머니가 어딘가를 다녀오며 달수의 어깨를 툭치며 반색을 했다.
“아유~ 오랜만에 오셨네, 많이 변했죠? 우리 코너는 저쪽이예요.”
달수는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2명의 중년 사내들이 앉아있는 스탠드 바로 향하여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분양 받았다는 코너 벽면에는 사루비아 라는, 각 스탠드 바를 변별하는 조그만 간판이 있었다. 그리고 보니 모든 코너에 나름대로 고민해서 만든 간판이 붙어있었다. 달무리, 해바라기, 청초 등등, 그리고 물망초까지… 달수의 입가에 어슴치레 미소가 번졌다 졌다. 부대 근처에 있는 시장에 자리잡은 경림의 카페이름과 같은 물망초를 보니 그녀가 술이 취하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던 앙증맞은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수가 고개와 허리를 틀어 주위를 돌아보다가 정면을 향하여 자세를 고쳐 앉는데 사루비아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 나도 조금 여유 있었으면 저기 입구나 중간에 있는 별사탕을 분양 받았을텐데…”
“ 별사탕이요?”
“ 중간에 오각형으로 만들어진 코너 말예요…”
그녀가 턱으로 가리키는 곳을 달수가 돌아보았다. 벽을 돌아가며 고만 고만한 수십 여 개로 코너가 구분되어 있는 그 안으로 5개의 대형 원형 바가 들어앉아 있었다. 어둑한 조명아래 자세히 보니 그 원형은 5각형으로 그 안에 3-4명의 젊은 여자들이 손님들을 서빙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루비아 코너는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잡고 다시 유심히 보니 현관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
“ 저 별사탕은 보증금이 1억이예요, 여긴 2천만원 이구요. 전세금 빼고 월세로 살면서 이것 간신히 마련했지요.”
그녀의 남편은 오징어 잡이 배의 선장이었다. 그는 3년 전에 배가 풍랑으로 좌초되어 실종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하루종일 해안에 앉아 소주병을 끼고 남편의 통통배가 수평선을 뚫고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1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 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들이 가출을 하여 소식이 끊겼고, 고등학생인 딸아이가 학교를 결근하며 방황하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 기다리다가 곁에 있는 사람마저 지키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을 깨우치고 영랑 스텐드바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딸을 뒷바라지 하였고 딸은 현재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수 개월전에 건물주가 내부공사를 하여 지금같이 여러 사람에게 코너를 분양하였고 그 중 가장 보증금이 싼 자리에 임대하여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달수가 입을 반쯤 열고 다시 한 번 건물 내부를 돌아다 보며 말했다.
“ 이거 완전히 기업형 스탠드 바네요.”
“ 그것 뿐 일줄 알아요? 안주는 무조건 건물주가 운영하는 주방에서 받아와야 해요, 우리는 술 팔아서 남은 이득금만 챙기는 거죠. 물론 손님에게는 안주값을 따블로 받지만... 분양자들이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장사가 잘되어 그 불평이 쏙 들어갔어요. 말 그대로 우린 물장사예요. 저기 별사탕 코너는 장군들도 가끔 들리는데 그 들 중 한 분이 별사탕이라고 이름을 져 준거래요, 오각형이 별처럼 생겼다고 그랬는지... 군용 건빵 안에 정력을 떨어뜨리는 별사탕이 들어있다면서요?”
" 아네요, 그건 그냥 녹말 덩어리예요. 사탕 주성분인 설탕이 잘 달라붙게 하여 모양을 만들기 위한 거죠."
그러고 보니 별사탕 코너는 가끔 뉴스에서 보았던 복잡하게 모니터가 위에 걸려있는 증권거래소의 거대한 테이블을 닮았다. 달수는 그 때 '돈 냄새가 난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수 명의 웨이터가 연신 주방에서 각 코너로 안주를 나르고 내부는 증권거래소 같이 북적거렸다. 달수는 옆자리에 양복을 차려 입은 중년신사가 마시고 있는 이름 모를 양주를 시켰다. 체질적으로 양주를 마시면 심한 구토를 하거나 다음날 머리가 뻐개질 듯한 두통을 느낀 경험을 한 후 한 번도 마시지 않았던 양주였다. 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몸 속에 켭켭히 쌓여있는 수연에 대한 묵은 정들을 모두 토해내고 머리가 뻐개져 뇌수에 심어져 있는 수연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버리고 싶었다. 달수는 무엇엔가 긴장이 되었던지 아님 체질이 변했는지 양주 석잔을 마셔도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집에서 만들어 왔다는 호박을 채 썰어 만든 부침개를 몇 조각 집어 먹어서 일까.
달수는 조금 취기가 오르자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그냥 코너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신청곡을 메모지에 적어 웨이터에게 건네 주고 밴드 마스타가 호명을 하면 무대로 올라가 노래를 불러야 했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 술과 노래보다 달수를 이곳으로 이끌어온 것은 지난 번에 사루비아 아주머니 와 함께 있던 젊은 바텐더였는지도 모른다. 꽉 다물은 듯한 입가에 한 줌 미소 외에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지만 어둑한 바 안에서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청초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달수는 사루비아 아주머니에게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는 게 어색하여 양주병의 반을 비우는 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지낸다는 것이 이렇게 외로움을 덜어줄 사람을 찾아 헤메는 연속선의 한 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달수는 고향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 아주머니 오늘은 혼자 계시네요…”
중년 남자들이 새로 시킨 마른 오징어의 다리와 몸통을 쪼개며 야하디 야한 걸쭉한 농담을 잘도 받아넘기며 달수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도둑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듯, 뒷짐 짓고 이리 저리 어슬렁거리며 자체 안주를 파는 것을 감시하는 영업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부침개를 더 내어오는 오자 달수가 물었다.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한 달수의 질문의 진의를 파악했다는 듯이 미소를 짓자 달수는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은숙이? 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오늘 학교에서 종강 파티가 있다고 해서 잠깐 들렀다가 온다고 했어요?”
“ 아르바이트 학생인가 보네요…그래도 착하네 룸싸롱 같은데서 일하지 않고…”
“……………”
양주를 다 비운 두 중년남자가 자리를 일어서며 흰 봉투를 사루비아 아주머니에게 건네자 그녀가 손사레를 치며 봉투를 들고 현관 밖까지 그들을 따라나갔다가 여전히 그 봉투를 들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 중년 신사중 한 명은 그녀를 포항댁 이라고 불렀다. 그는 포항에서 본사를 둔 고기잡이 선박회사의 사장 장상국 이다. 포항댁 남편의 친구이며 고용주이기도 했다. 포항댁의 남편은 포항에서 살다가 근무하는 선박회사가 오징어잡이 사업을 확장하여 눈이 시리도록 환하게 수은등을 밝혀놓은 오징어 잡이배를 제공받고 속초에 자리를 틀은 지 1년이 채 못되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남편의 친구인 사장은 일년에 한 번 정도 그녀를 찾아와 약간의 위로금을 전하며 죄의식을 달래고 간다고 했다. 그를 뒤 따랐다 돌아온 그녀가 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달수의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때 약간 상기된 표정의 은숙이 들어오다가 달수를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달수 역시 입꼬리가 약간 올라갈 정도로 가볍게 눈 인사를 했다. 그녀는 포항댁이 바 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 안으로 들어가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은행에서 막 꺼내옴 직한, 중간에 하얀 종이띠가 돌려있는 두툼한 만원짜리 한 다발을 포항댁에게 내밀었다.
결제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상무실에서 나온 개발부장 전영식이 이천의 아파트 개발 후보지역의 개발이익 보고서를 작성하는 달수의 고개를 일으켜 세웠다. 국방부와 기업들이 연대하여 실시하는 전역장교 취업반에서 건축법 과정을 수료한 달수는 신동아 건설에 입사하여 총무과에서 1년 여 근무하다 회사 자체 광고문구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 채택이 되어 홍보실에 발탁이 되었으나, 처음부터 지원부서보다는 직접 건설과 관련된 부서에 근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꼼꼼하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인정받아 기획조정실 개발팀의 건축부지 선정 및 개발이익분석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 자네 건설분쟁 조정일을 해보지 않겠나? ”
“ 그게 무슨 일입니까?”
듣도 보도 못한 직무에 달수가 김철근 상무에게 되물었다. 건설 붐이 과도하여 건설업자간에 경쟁과 투기가 극성을 부리던 때, 정부에서 5.18 조치를 내려 건축허가 제한 및 자재공급을 통제하자 회사에서 진행하던 일부 공사가 중단되고, 그 공사현장이 우범화가 되어 민원이 들어오고 있어 회사에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어떤 공사현장은 이미 지하 수십 미터를 파내려 갔을 때 공사가 중단되어, 인근 건물의 지하에 있는 지하수와 모래가 동시에 빠져나가는 공동화 현상으로 인근 빌딩들이 벽에 금이 생기고 상가의 바닥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주민들이 피켓을 들고 공사현장에서 데모를 하고 언론에 보도가 되어 회사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수 있는 처지에 놓였다.
김 상무가 달수에게 제안한 업무는 비 정상적인 공사현장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민원과 법률문제를 처리하는 그야말로 남들이 버리고 간 오물을 치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업무였다. 그러나 회사입장에서는 쓰레기 통을 비우지 않으며 쓰레기를 모아 버릴 공간이 없듯이 머물거릴 틈 없이 당장 해결 해야하는 다급한 문제이기에 회장의 지시에 의해 부장급에서 전결할 수 있는 사안을 상무급에서 검토하여 신중히 결정하도록 하였다. 김상무와 전부장이 이미 달수를 적임자를 정해놓고 달수의 의중을 떠보는 것을 달수가 모를 리 없다.
달수는 서울, 인천 수원 김포등의 여러 공사현장을 뛰어다녔다. 와이셔츠 목에 새까맣게 때가 끼고, 코를 풀면 검은 공사현장 먼지가 콧물에 섞여 갈색 빛을 만들어냈다. 공사현장 주민에게 넥타이가 잡히는 것은 예사였고 뺨을 맞기도 했다. 하루는 달수가 씩씩거리며 김상무를 찾았다. 공사민원과 관계되는 서류의 중간 결재권자로 자신을 넣고 화급을 다투는 사안에 해서는 전결권을 달라고 건의하기 위함이었다. 현장에서 민원을 처리하다 본사의 결재라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어 예방할 수 있는 민원이 생기거나 내용을 몰라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자신도 모르게 무능력한 관리자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달수가 전결권을 가지게 되자 달수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 협조하는 현장 근무자들도 달수를 믿고 따르게 되었, 사소하지만 자칫 간과하다가 공정에 큰 영향을 주고 결국 회사의 이익과 직결될 수도 있는 문제점을 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달수는 이렇게 현장소장과 함께 현장을 돌면서 현장노동자와 장작불에 얼은 몸을 녹이며 막걸리를 나누어 먹는 유일한 본사 직원이 되어, 그들의 불만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본사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메신져가 되었다. 달수는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피한 현장관리를 통해서 토목 건설기술자가 아님에도 상당한 현장 노하우를 갖게 되었다. 부평의 공사현장 인근 상인과 주민들의 공사금치가처분 신청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방치되었을 때, 달수가 신청자들과 일일히 접촉하여 설득한 끝에 극적으로 합의하여 공사가 재개되었다. 이렇게 준공 예정일을 6개월이나 넘겨 우여곡절 끝에 공사가 완료된 부평 현장의 모델 하우스에서 이례적으로 사장과 이사급 간부가 참석하여 현장 기술자 및 근로자를 위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달수는 그 시간에 또 하나의 문제 현장인 김포의 공사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 사장님예… 김달수 대리가 없었으면 현장에 드러누워 목숨걸고 공사를 방해하는 주민들 때문에 공사를 제때에 마치지 못했을 껍니더… 이 자리에 사장님이 아닌 김달수 대리가 나왔어야 합니데.”
현장 근로자들이 달수가 보이지 않자 달수가 어디 있냐고 사장과 임원들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퇴직 보상금을 주지 않으려고, 해당 직원이 없는 사이에 책상을 복도에 내다 놓아, 무능한 직원에게 자진 퇴직을 압력하는 것이 용인되는 비열하고 처절한 직장 분위기였지만, 현장을 돌아다니는 주인이 거의 비어있는 달수의 책상은 바닥에 고정된 듯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 달수의 민원처리 능력과 행정능력은 일취월장 발전하여, 사장급인 기획조정실장 직속의 건설분쟁조정팀장이란 신설 직책을 받고, 현장에서 들어오는 민원서류를 분석하고 법적인 대응 방안을 강구하는 간부로 성장하여, 자신보다 3년 먼저 입사한 동기생보다 먼저 과장으로 승진되었다.
사장급인 기획조정실장 최상수는 회장의 외조카 였지만 공사구별이 분명하고 인력평가에 있어 공평한 사람이었다. 달수를 유심히 지켜보던 그가 달수에게 대학원이나 법 전문학원에 입학하여 업무능력을 향상시킬 것을 권유했다. 달수는 대학원 보다는 현장에 바로 적용되는 실질적인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 법 전문 학원에 등록하여 1년 뒤에 법무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후 6개월이 지나 회장의 추천서를 가지고 서울 대학원 건축과 도시개발 대학원에 등록을 하던 날, 학교 본관 로비에서 7년만에 우연히 동찬과 조우하고 뜻하지 않은 희정을 만났다.
그리고 희정과 말 한마디, 아니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굳어있다가 인천행 전철에 올랐었다. 달수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외면하던 희정을 다시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달수는 자리가 남아도는 전철에서 앉지 않고 출입구 옆에 있는 쇠기둥에 기대어 서서 고개를 틀어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달수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마침 용산역으로 들어서는 전철에서 내려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번호부 책에서 동찬이 인수하였다는 관악 법학원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 원장님 사모님과 통화할 수 있습니까?”
“ 아! 이 교수님이요? 1시간 전쯤 원장님과 같이 잠깐 들리셨다가 곧 귀가하셨는데요.”
“ 교수님이요?”
“ 원장님 사모님…서울대 불문학과 교숩니다.”
달수는 전철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며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처럼 7년전 그날 그녀를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 집요하게 데이트 신청을 하여 같이 보낸, 채 하루도 안 되는 그 시간속에 숨겨진 사건들을 1막 1장도 안되는 연극무대에 올려 자신과 희정의 연기를 그려보았다. 자신은 주연 배우가 아닌 마치 관객이 된 것인양... 달수는 생각했다. "교수님이라…나만 변한 것이 아니구만…"어떻게 그녀가 동찬의 아내가 되고, 나는 수연도 아닌 진희의 남편이 되었단 말인가…" 철로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덜컹거리며 인천으로 향하는 전철 객실의 쇠기둥에 기대어 창 밖을 바라보는 달수의 머리 속은 복잡하다. 그 복잡함에 희정과 수연과 진희가 얽혀 들어앉아 있었다.
달수와 수연의 만남은 1년 6개월 동안 달수가 전역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때가 달수가 전역 예정일을 두 어달 남겨두고, 달수와 수연의 관계를 모르고 공공연히 자신이 수연의 애인이라고 떠벌이고 다니던 후배 경민이 달수에게 전화를 할 때 쯤인 것 같다. 경민은 자신의 전화를 피하는 수연이 있는 공연하는 호텔을 달수에게 알려주면서 그녀가 서울에 진출할 기회가 있으니 달수에게 연락을 취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수연은 대학 졸업후 음반을 취입했으나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아 낙향하여 강릉 고향집에 머물면서 강릉 및 속초 일대의 관광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주말이면 달수가 수연이 공연하는 호텔에 찾아가고, 공연이 없는 주중에는 둘은 강릉이나 속초 시내에서 만났다. 하루는 달수가 설악산 기슭에 있는 호텔에 일찍 도착하여 수연이 공연하는 나이트 클럽에 찾아 들었다. 수연이 노래를 부른 후 객석으로 내려와 손님들과 동석하며 그 들의 품에 안겨 술잔을 나눌 때 한 손님이 지폐를 그녀의 가슴에 꽂아 넣는 것을 보고 달수는 그 자리를 나와버렸다. 대학 가요제 입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수연이 마치 호스티스 같은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 달수는 이해될 듯 하면서도 못 마땅했었다. 달수는 그녀가 지상 전파 방송을 타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연예계가 실력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달수는 잘 알지 못했다.
달수는 수연에게 자신을 만나는 동안 경민을 만나지 말 것을 다짐 받았었다. 경민은 대형 연예 기획사에 취직하여 메니져로 일하면서 비교적 굴직한 스타들을 관리할 만큼 성장한 것은 이미 기대한 바 이나, 그가 여성 편력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을 신문기사를 통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수이외에도 국민배우로 칭송받는 배우들을 관리하면서 스타의 그늘에 가려있는 메니져로서는 드물게 유명세를 타고, 스타보다 더 유명한 스타로 공중파 연예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달수는 수연이 마치 접대부 처럼 팁을 구걸하는 듯한 모습을 본 이후로 차라리 수연이 경민의 보호를 받으며 경민의 회사에서 방송사에 줄에 대어 밤무대 가수가 아닌 지상 전파 방송사에 진출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려면 달수는 수연을 경민에게 떠나 보내야 했다. 그렇게 수연을 놓고 갈등을 하던 달수는 취한 몸을 이끌고 밤 늦게 관사로 귀가한 날, 전화기의 자동 응답기의 버튼을 눌렀을 때 수연이 격앙된 목소리로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 내가 이제 싫다고 말하면 되지 왜 연락을 끊어…내가 밤무대 가수라서 그래? 그게 내 직업이란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수연의 가벼운 흐느낌... 그 이후에도 달수는 왠지 수연이 공연하는 호텔 나이트 클럽을 몇 번 더 찾아갔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객석의 술 취한 손님의 환호 속에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녀가 자신의 여자가 아닌, 후미진 자신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무대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지며 차마 그녀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다. 달수가 그녀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클럽을 빠져나와 호텔 현관문을 밀고 나와 담배를 물었다. 대형 스피커를 찢을 듯 한, 음악이라기 보다는 소음에 가까운 기계음을 견디었던 고막이 멍하다. 호텔을 둘러싸고 있는 솔잎을 지나 코 점막을 상쾌히 적시는 맑은 공기도 그제서야 제대로 느껴졌다. 설악산 중턱에 있는 호텔은 속초 시내의 대부분과 동해를 한 눈을 굽어볼 수 있었다. 달수는 몇 개월전 이 호텔 11층 객실 베란다에서 수연과 함께 뿌옇게 밝아오는 속초시내와 떠오르는 동해의 아침 해를 바라본 적이 있다. 그 때 수연이 그랬었다.
“오빠 우리도 저 해처럼 매일 새롭게 태어나자, 나 처음처럼 오빠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꺼야. 오빠도 그래야 돼 알았지?”
그러나 지금 달수가 서서 바라보는 저 동해 바다는 어둠에 묻히고 오징어 배의 유인등만이 수평선 근처에서 가물거렸다. 그 해는 내일 아침이 되어도 그 어둠을 뚫고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담배 서너 모금을 빨았을 즈음 달수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달수가 택시에 앉아 문을 닫는 순간 수연이 가슴이 깊게 파이고 치렁 지렁 바닥에 끌리는 무대복의 치마를 추겨올려 잡고 호텔 현관 밖으로 뛰어나왔다. 달수와 수연의 눈이 허공에서 잠시 만났지만 달리는 택시가 그 짧은 만남마저 태워갔다. 달수는 알고 있었다. 수연이 호텔 현관입구에 그대로 서있을 거라는 것을… 그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를 다시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그러나 달수는 택시의 백밀러를 통해 그녀를 보았다. 마치 동상처럼 굳어있는 그녀를… 달수는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자신과 그녀를 위하는 것이라고 순간 생각했다. 사랑과 열정의 중간쯤에서 헤메고 있는 그는 중얼거렸다.
“ 그래 사랑은 없었어… 열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수연아… 넌 서울로 가서 스타가 되야해… 여기서 나와 같이 있으면 안돼…”
택시 기사가 행선지를 물었으나 달수가 대답이 없자 조금 큰 소리로 되물었다. 달수는 그제서야 기사의 말을 제대로 들었지만 또 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행선지를 정하고 택시에 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달수가 속초시내에 가본 곳이라곤 수개월전 수연과 물회를 먹고 찾아갔던 스탠드바 였다.
“...... 속초 시내로 갑시다. 시청 뒤 켠에 스탠드 바… 가게 이름이 뭐였더라…”
“ 영랑 스탠드 바 말씀하시는 거예요?”
“ 아! 예 맞습니다.”
영랑은 속초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그 스탠드 바에서 영랑호가 보였다. 달수는 그냥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수연처럼 노래라도 부르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건물 안으로 들어간 달수가 내부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같은 간판에 같은 스탠드 바였는데 내부가 낯설고 상당히 넓어진 느낌에다가 시장에 좌판을 벌려놓은 듯이 수십 개의 코너로 구분되어 있어 연숙이 어느 코너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멀뚱히 입구에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중년 아주머니가 어딘가를 다녀오며 달수의 어깨를 툭치며 반색을 했다.
“아유~ 오랜만에 오셨네, 많이 변했죠? 우리 코너는 저쪽이예요.”
달수는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2명의 중년 사내들이 앉아있는 스탠드 바로 향하여 앞장서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분양 받았다는 코너 벽면에는 사루비아 라는, 각 스탠드 바를 변별하는 조그만 간판이 있었다. 그리고 보니 모든 코너에 나름대로 고민해서 만든 간판이 붙어있었다. 달무리, 해바라기, 청초 등등, 그리고 물망초까지… 달수의 입가에 어슴치레 미소가 번졌다 졌다. 부대 근처에 있는 시장에 자리잡은 경림의 카페이름과 같은 물망초를 보니 그녀가 술이 취하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던 앙증맞은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수가 고개와 허리를 틀어 주위를 돌아보다가 정면을 향하여 자세를 고쳐 앉는데 사루비아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 나도 조금 여유 있었으면 저기 입구나 중간에 있는 별사탕을 분양 받았을텐데…”
“ 별사탕이요?”
“ 중간에 오각형으로 만들어진 코너 말예요…”
그녀가 턱으로 가리키는 곳을 달수가 돌아보았다. 벽을 돌아가며 고만 고만한 수십 여 개로 코너가 구분되어 있는 그 안으로 5개의 대형 원형 바가 들어앉아 있었다. 어둑한 조명아래 자세히 보니 그 원형은 5각형으로 그 안에 3-4명의 젊은 여자들이 손님들을 서빙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루비아 코너는 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잡고 다시 유심히 보니 현관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
“ 저 별사탕은 보증금이 1억이예요, 여긴 2천만원 이구요. 전세금 빼고 월세로 살면서 이것 간신히 마련했지요.”
그녀의 남편은 오징어 잡이 배의 선장이었다. 그는 3년 전에 배가 풍랑으로 좌초되어 실종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하루종일 해안에 앉아 소주병을 끼고 남편의 통통배가 수평선을 뚫고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1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 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들이 가출을 하여 소식이 끊겼고, 고등학생인 딸아이가 학교를 결근하며 방황하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 기다리다가 곁에 있는 사람마저 지키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을 깨우치고 영랑 스텐드바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딸을 뒷바라지 하였고 딸은 현재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수 개월전에 건물주가 내부공사를 하여 지금같이 여러 사람에게 코너를 분양하였고 그 중 가장 보증금이 싼 자리에 임대하여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달수가 입을 반쯤 열고 다시 한 번 건물 내부를 돌아다 보며 말했다.
“ 이거 완전히 기업형 스탠드 바네요.”
“ 그것 뿐 일줄 알아요? 안주는 무조건 건물주가 운영하는 주방에서 받아와야 해요, 우리는 술 팔아서 남은 이득금만 챙기는 거죠. 물론 손님에게는 안주값을 따블로 받지만... 분양자들이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장사가 잘되어 그 불평이 쏙 들어갔어요. 말 그대로 우린 물장사예요. 저기 별사탕 코너는 장군들도 가끔 들리는데 그 들 중 한 분이 별사탕이라고 이름을 져 준거래요, 오각형이 별처럼 생겼다고 그랬는지... 군용 건빵 안에 정력을 떨어뜨리는 별사탕이 들어있다면서요?”
" 아네요, 그건 그냥 녹말 덩어리예요. 사탕 주성분인 설탕이 잘 달라붙게 하여 모양을 만들기 위한 거죠."
그러고 보니 별사탕 코너는 가끔 뉴스에서 보았던 복잡하게 모니터가 위에 걸려있는 증권거래소의 거대한 테이블을 닮았다. 달수는 그 때 '돈 냄새가 난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수 명의 웨이터가 연신 주방에서 각 코너로 안주를 나르고 내부는 증권거래소 같이 북적거렸다. 달수는 옆자리에 양복을 차려 입은 중년신사가 마시고 있는 이름 모를 양주를 시켰다. 체질적으로 양주를 마시면 심한 구토를 하거나 다음날 머리가 뻐개질 듯한 두통을 느낀 경험을 한 후 한 번도 마시지 않았던 양주였다. 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몸 속에 켭켭히 쌓여있는 수연에 대한 묵은 정들을 모두 토해내고 머리가 뻐개져 뇌수에 심어져 있는 수연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버리고 싶었다. 달수는 무엇엔가 긴장이 되었던지 아님 체질이 변했는지 양주 석잔을 마셔도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집에서 만들어 왔다는 호박을 채 썰어 만든 부침개를 몇 조각 집어 먹어서 일까.
달수는 조금 취기가 오르자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그냥 코너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신청곡을 메모지에 적어 웨이터에게 건네 주고 밴드 마스타가 호명을 하면 무대로 올라가 노래를 불러야 했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 술과 노래보다 달수를 이곳으로 이끌어온 것은 지난 번에 사루비아 아주머니 와 함께 있던 젊은 바텐더였는지도 모른다. 꽉 다물은 듯한 입가에 한 줌 미소 외에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지만 어둑한 바 안에서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청초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달수는 사루비아 아주머니에게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는 게 어색하여 양주병의 반을 비우는 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지낸다는 것이 이렇게 외로움을 덜어줄 사람을 찾아 헤메는 연속선의 한 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달수는 고향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 아주머니 오늘은 혼자 계시네요…”
중년 남자들이 새로 시킨 마른 오징어의 다리와 몸통을 쪼개며 야하디 야한 걸쭉한 농담을 잘도 받아넘기며 달수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도둑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듯, 뒷짐 짓고 이리 저리 어슬렁거리며 자체 안주를 파는 것을 감시하는 영업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부침개를 더 내어오는 오자 달수가 물었다. 그녀는 뒷말을 잇지 못한 달수의 질문의 진의를 파악했다는 듯이 미소를 짓자 달수는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은숙이? 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오늘 학교에서 종강 파티가 있다고 해서 잠깐 들렀다가 온다고 했어요?”
“ 아르바이트 학생인가 보네요…그래도 착하네 룸싸롱 같은데서 일하지 않고…”
“……………”
양주를 다 비운 두 중년남자가 자리를 일어서며 흰 봉투를 사루비아 아주머니에게 건네자 그녀가 손사레를 치며 봉투를 들고 현관 밖까지 그들을 따라나갔다가 여전히 그 봉투를 들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 중년 신사중 한 명은 그녀를 포항댁 이라고 불렀다. 그는 포항에서 본사를 둔 고기잡이 선박회사의 사장 장상국 이다. 포항댁 남편의 친구이며 고용주이기도 했다. 포항댁의 남편은 포항에서 살다가 근무하는 선박회사가 오징어잡이 사업을 확장하여 눈이 시리도록 환하게 수은등을 밝혀놓은 오징어 잡이배를 제공받고 속초에 자리를 틀은 지 1년이 채 못되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남편의 친구인 사장은 일년에 한 번 정도 그녀를 찾아와 약간의 위로금을 전하며 죄의식을 달래고 간다고 했다. 그를 뒤 따랐다 돌아온 그녀가 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달수의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때 약간 상기된 표정의 은숙이 들어오다가 달수를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달수 역시 입꼬리가 약간 올라갈 정도로 가볍게 눈 인사를 했다. 그녀는 포항댁이 바 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 안으로 들어가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은행에서 막 꺼내옴 직한, 중간에 하얀 종이띠가 돌려있는 두툼한 만원짜리 한 다발을 포항댁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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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주님의 댓글
김시우님의 댓글
정창주님의 댓글
김시우님의 댓글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br />
힘내고 분발하십시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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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한님의 댓글
토론토에 사는 송대한입니다.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혹시 전화번호를 웹사이트에 올려 놓으면 <br />
전화 드리겠습니다.노력해 보겠습니다.너무 기대는 말구요.<br />
그리고 김시우 후배님의 연재 소설 잘 읽고 있습니다.내가 잘 아시는분의 아내의 언니가 김수현입니다.<br />
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br />
박명근 후배님도 잘 계시지요.<br />
요사이 바빠서 연락을 못했습니다.<br />
안녕히 계십시요.<br />
74학번 전자과 송 대한 드림.
김시우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