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여정(26회)
김시우
2007.06.03 22:48
2,167
5
본문
“ 이게 뭐냐?”
“ 오다가 주차장에서 장사장님 만났어요… 근데 또 이렇게 한 움큼 쥐어주지 뭐예요.”
“ 내가 장사장님 돈 받지 말라고 했지? ”
“안 받으려고 하니까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면서 내 손목을 끌어잡아 당겨 손바닥에 얹혀주시고는 성큼 성큼 도망치듯 가셨어. 엄마 죄송해요...나중에 다시 오시면 그 때… ”
노기에 가득한 눈을 했던 포항 댁의 눈망울과 은숙의 그것이 흔들렸다. 포항댁이 콧물이 콧망울 밖으로 빠져 나올 것 같았는지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술을 내밀어 심호흡을 내리 쉰 후 벌떡 일어서 바 안으로 들어갔다. 양주 진열장 위에 놓아두었던 무선호출기가 울렸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들은 포항댁의 슬픔으로 구겨졌던 얼굴이 머쓱해졌다.
그녀의 추억은 추억이고 그리움은 그리움이며 남편은 바다에서 소식이 끊겼으니 그녀가 인정하지 않아도 사실상 과부이고, 일상은 일상이니 삐삐는 울려대는 것이다. 그녀가 상념에 잠길 틈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삐삐에 찍힌 번호를 잠시 들여다 본 포항댁은 전화를 잡으려다 말고 은숙에게 저녁은 먹었냐고 물어보자 은숙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포항댁이 또 다시 영업부장 눈치를 보며 호박 부침개를 꺼내 은숙에게 건네자 울먹이던 은숙이 나중에 먹겠다며 한 켠에 밀어놓았다.
사루비아 아줌마... 아니 은숙 어머니?...달수는 생각지도 못한 해프닝에 정신을 팔렸다. 정신을 가다듬자 언젠지 모르게 넥타리를 풀어 이마에 질끈 동여메고 무대에 올라간 손님의 멱따는 소리와 여기 저기 코너에서 취객의 톤이 높아진 목소리... 그들을 생계의 대상으로 삼은 하나같이 몸에 바싹 달라붙는 옷차림으로 몸내를 드러내는 바텐더들의 교성 섞인 목소리들이 섞여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마치 하나의 그 무엇에서 내는 소리로 뭉쳐 달수의 귀청을 때렸다.
“ 김중위님… 저 사람 내려왔어요, 저 사람 조금 있으면 다시 올라갈 거예요. 스피커가 찢어지도록 서 너곡 더 하기 전에 노래 하나 하세요…기를 팍 꺽어서 다시 못 올라가게…”
“ 하하하… 됐어요, 저렇게 취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이 체면이고 뭐고 있겠어요. 오늘은 노래부를 기분이 아녜요, 컨디션도 안좋고… 그리고 저 중위 아닙니다. 이거 안보이세요? 저 대위 진급했어요.”
“ 어머 그러세요, 축하드립니다. 저는 오랜 동안 안 보이시길래 제대한 줄 알았죠. 그 사람처럼…”
“ 그 사람? 누구요?”
“ 아니 그런 게 있어요. 암튼 그러지 말고 여기에서 신청곡 적어주시면 제가 웨이터에게 갖다 드릴께요. 아니 그 때 그게 뭐였더라 그래 맞아, 가까히 하기에 너무 먼 당신… 그거 대신 여기다 적을께요… 그리고 다른 거 하나 더 하세요.”
은숙은 노래 신청서를 웨이터에게 넘기면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렇게 끝을 맺는 노래가 엄마의 18번 이라고 했다. 엄마는 고향인 포항에 돌아가지 못하고 3년을 기다려도 아버지 배는 돌아오지 않고, 제대할 때 자신을 서울로 데리고 가겠다던 그 육군 중위도 배처럼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기에, 남자들의 속삭임은 항구를 떠나며 다시 돌아오지 않은 배의 고동소리라고 했다. 그녀는 절대 배를 타는 사람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뻗어나갈 수 없는 땅끝 마을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했다.
은숙도 가난한 어촌의 처녀들처럼 의무 복무기간을 채우고 전역하는 군인을 만나 서울에 가서 사는 것이 신기루 같은 소망처럼 늘 마음 한 켠에 감아 돌았을 것이다. 달수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그것을 안주 삼아 양주 반 병을 비웠다. 달수는 예민한 코와 혀가 놓지지 않는 화학 약품 같은 특유의 양주냄새와 맛를 역겨워 하면서도 스스로 수연을 떠나와 또 스스로 만들어낸 망상으로 허전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기에 참을 만했다. 은숙에게 등이 떠밀려 무대에 오른 달수가 밴드 마스터의 올갠 위에 얹혀있는 통에 천원짜리를 두 장 넣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 가까~히 하~기에에엔~ 너무 먼 당신~ 을 난~ 난 잊을테요~”
일절을 부르고 이절을 기다리며 반주를 듣고 있는 달수 눈에 현관문 앞에서 언제부터인지 서있는 수연이 들어왔다. 달수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마이크를 잡은 손을 툭 떨구고 무대복을 벗어던지고 정장으로 갈아입은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꼭 탈바가지처럼 짙은 무대 화장을 뒤집어 쓴 수연의 얼굴은 어느새 화장기 없는 얼굴로 변해있었다. 달수가 마이크를 거치대에 끼우고 무대를 내려오자 상체를 흔들어가며 감흥에 젖어 연주를 하던 올갠 연주자가 놀란 눈으로 달수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음 노래를 부를 사람의 이름을 호명했다. 달수는 사루비아 코너에 가서 말없이 앉았다.
“ 김대위님, 왜 그러세요 참 좋았는데… 어? 어서오세요…”
은숙은 자신의 인사에 보일 듯 말듯한 눈인사를 한 수연이 달수의 곁에 와 앉아도 수연을 돌아보지도, 반기지도 앉는 달수를 보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도 그렇지만 둘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슴에 궁금증이 더해졌다. 은숙이 양주잔을 수연 앞에 내놓았다. 수연도 양주를 마시면 속이 아프고 마신 다음날 맥을 못 춘다고 했다. 그래서 달수와 수연은 같은 체질을 놓고 서로 잘 맞는 천생연분이라고 억지로 같은 족속으로 서로를 새끼줄같이 엮어가고 있었다.
수연이 달수에게 시위라도 하듯 은숙이 따른 양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넣었다. 은숙이 흠칫 놀라며 직업적으로 다시 한 잔을 채우자 수연이 역시 손목을 꺽어, 그녀에게는 독물 같은 그것을 목구멍이 밀어내는 것을 눈을 질끈 감으며 참고 삼켰다. 은숙이 다시 잔을 채우는 것을 머뭇거리자 수연이 직접 양주병을 잡아 잔을 채우려는데 달수가 술병을 잡은 수연의 손목을 잡았다.
“ 뭐 하는 짓이야? 내 앞에서 죽어서 나를 괴롭힐 생각이면 당장 그만 둬.”
수연이 달수를 노려보며 달수의 손에 잡힌 팔을 당겨 빠져 나오려고 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는 일… 수연의 팔에 힘이 풀려 술병을 내려놓았다. 수연의 눈은 여전히 달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왠지 그 눈빛은 달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 적의로 위장된 눈빛은 사실은 애증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고 있는 것이다.
“ 호호호… 두 분이 무슨 일로 이러실까? 참 좋은 시절입니다. 나는 그 시절도 다 갔고 배타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붙박이 항구가 되었지요. 내가 다시 젊은 날로 돌 아 간다면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도 내 아이려니 하고 키울 자신도 있어요. 그 때 남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말이죠…”
“ 엄마 또 울려고? 술만 먹으면 울면서…”
포항댁이 은숙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양주 한 병을 꺼내어 자신의 잔에 따르며 말했다. 순간 달수를 바라보고 있는 수연의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왔지만 달수와 수연 누구도 말이 없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은숙은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등을 돌려 진열장에 거꾸로 놓여진 술잔들을 하얀 면포로 닦는 척을 했지만 포항댁은 그 분위기를 즐기는 듯 했다. 자신이 나이가 있어 코너를 찾는 손님들 역시 중장년층이 많기에, 언제나 따분한 음담패설에 찌들어 버린 그녀의 정서가 달수와 수연의 사랑싸움에 새파랗게 새순을 돋아내는 듯 했다. 자식 같은 젊은 남녀에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라도 들려주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듯 아예 구석에 밀어놓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 자고로 연애란 꽂힐 때 찔러야 되는 법이야, 가릴 것 다 가리고 사릴 것 다 사리면 언제 연애다운 연애 한 번 해보겠어.”
포항댁이 남편과 처음 만난 것부터 해서 배를 타고 떠난 마지막 날까지 들으려면 아마도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은 지루함이 이미 달수에게 느껴졌다. 달수가 수연의 손목을 잡고 바를 빠져 나왔다. 수연의 손목을 놓아 몇 발자국 앞서가는 달수 뒤로 수연이 축 늘어진 팔로 바닥에 끌릴 듯 핸드백의 끈을 잡고 따랐다. 그녀가 욱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 앉아 한 움큼 토해냈다. 달수가 뒤돌아 그녀에게 뛰어가 핸드백을 받아들고 등을 두드렸다. 입주위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다시 일어선 수연의 눈에 이전에 흘린 눈물인지 토할 때 눈물샘이 자극되어 나온 눈물인지 모를 눈물이 그렁거렸다.
수연이 다시 욱 소리를 내며 토할 듯 하자 달수가 수연의 허리를 감아잡아 부축하여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보도블럭 가까히 수연을 끌어 앉혔다. 수연의 쪼그리고 앉아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여 토하는 것을 달수가 허리를 굽이고 안타까와하고 있는데 한 사내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보도에 가깝게 주차한 그 사내의 검정 승용차에 수연의 토사물이 튀는 것을 달수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 이러니 통일이 안되지…”
달수가 허리를 세워 대신 그에게 사과를 하는데 군복을 입은 달수를 본 차주인이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달수의 위 아래를 훝어보더니 한 마디 뱉고 차를 몰고 떠났다. 달수가 모든 군인을 싸잡아 비하하는 모욕적인 말에 울컥하였지만 그보다 속에서 받지않은 양주 탓에 속이 울렁거리고 거북하여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시큰한 무엇인가를 먹고 싶었다. 여자들이 임신하여 속이 울렁거리면 귤 같은 시큰한 것이 먹고 싶다고 하는데, 달수는 그 와중에 이렇게 술 마시고 속이 울렁거려도 시큼한 것을 먹고 싶은 것과 연관이 있는 걸일까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수연과 같이 갔었던 횟집을 찾았다. 시큼 새큼한 식초물에 오징어회를 송송 쓸어 담은 물회를 먹으면 속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았다.
둘은 해안이 바라보이는 식당의 마루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서 마주 앉았다. 창 밖으로 수 십 척의 오징어 잡이배가 눈이 시도록 밝은 촉수의 불을 밝히고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 배에서 잡은 오징어가 바로 자신의 식당으로 옮겨진다며 싱싱한 회감을 자랑하는 식당 주인 아주머니와 달리, 은숙의 어머니는 저 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달수는 속초시가 관광상품으로 개발한다는 오징어 잡이 배를 보면서, 그것을 바라보며 즐기는 사람들과 저 배에서 어깨가 빠지도록 그물을 잡아 올리는 어부들과 그리고 은숙 어머니 포항댁을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버지에게 버림 받다시피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을 배경으로한 복수심이 명치끝에서부터 밀고 올라왔다. 돌아올지 않는 남자의 기다리며 살아가는 여자들...어쩌면 같은 장소의 같은 현상을 보고 그 내부에 감추어진 몇가지의 실체를 보게되는 것이 결코 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달수도 저 관광객들처럼 그저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것을 즐기는 부류의 한 사람 이었으면 했다.
몸으로 느끼는 예상이 적중했다. 달수는 시큼한 물회를 먹고 나니 속이 한결 편해지고 수연을 다시 바라보니 속이 아플 때보다 이뻐 보였다. 육체적 감성과 동물적 본능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쫓아 즐기고 헤매는 자신이 들킬까봐 달수는 여전히 영랑 스텐드 바에서 수연을 보았을 때 가지고 있던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수연은 물회 사발을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돌려 푸른빛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도록 밝디 밝은 빛을 내고 있는 오징어 잡이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수가 수연을 바라보던 고개를 창문으로 돌리고 수연이 바라보고 있는 배로 시선을 가져가 수연과 동화되는 듯한 모습이다. 달수가 다시 수연을 바라보니 화장을 모두 지우고 술을 토해낸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어 유난히 까맣게 보이는 검정 눈동자에 오징어잡이 배의 하얀 불빛이 담겨 있슴을 보았다.
1년 반전에 학교 지하 서클룸에서 함께 있었던 그날 밤의 수연의 눈동자도 저렇게 까맣고 그 안에 촛불이 담겨 이글거렸었다. 그런데 오늘 수연의 까만 눈동자는 하얀 오징어 유인등에 녹아 내리듯 그렁거렸다. 달수는 수연의 핏기없는 얼굴에 도두라진 눈이 예전의 사랑과 음악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생계로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 그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일까.
달수는 수연이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마친 후 무대를 내려가 손님의 품에 안기다시피 다가 앉자 손님이 깊이 파인 그녀의 가슴에 만원짜리를 꽂았을 때 그것을 내려다 보는 아주 짧은 찰나의 수연의 눈빛을 보았었다. 그 때 수연은 동냥을 받는 걸인처럼 비굴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맑고 강렬했던 수연의 눈동자는 생존을 위한 삶을 통해 시들어가고 있었고, 달수의 수연을 향하던 눈동자의 빛도 덩달아 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달수는 그 모든 변화가 자신이 아닌 수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경민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 그녀에 대한 열정의 감퇴속도는 탄력을 받으며 찬물을 맞은 듯 식고 있었다.
횟집을 나온 달수와 수연은 방파제 위에 서 있다. 파도가 밀려와 방파제 아래로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 같이 얼키 설키 포개지고 널부러져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인 방파석에 부딪히며 부서졌다. 부서지는 파도로부터 뿌리쳐 나온 작은 물 알갱이들이 수은등의 불빛을 받아 안개처럼 허공에 피어올랐다. 돌아가는 등대의 강한 직사광선도 중간에서 끊겨 넓디 넓은 동해바다물 위의 극히 부분만을 비추었다. 싸늘한 바람이 더운 뺨에 와서 부딪힐 때마다 코끝이 싸아했다. 수연의 뺨도 그 찬 바람에 발갛게 할퀴어져 있었다.
수연이 치렁거려 귀찮다는 것을 달수가 자르지 못하게 하여 어깨를 넘어설 만큼 자란 수연의 머리카락이 바다바람에 밀려 날리면서 수연의 긴 목이 드러났다. 달수가 군용 야전잠바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그녀의 시리고 여린 목을 덮었다. 바다의 짠 냄새를 느낀 달수는 갑자기 목덜미를 핥고 지나가는 소름을 느꼈다. 수연의 옆 모습 실루엣에서 희정과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달수는 오직 달빛과 듬성 듬성 서있는 가로등의 어둑한 불빛아래에서, 이목구비보다는 프로파일이 한 눈에 들어오는 수연을 희정으로 착각하는 환영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달수는 희정을 닮은 수연을 원했었는지 모른다. 외모에서나 성격에서나 희정은 달수에게 완벽한 여자였다. 그래서 수연의 머리가 길어졌고 희정의 요조숙녀 같은 행동거지와 수연의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방종적인 생활이 비교되면서 화가 나게 했던 잠재의식을 달수는 알 듯 모를 듯 가지고 있었다. 수연도 달수에게는 참 매력적인 여자임에 틀림없다. 달수가 좋아하는 마른 듯한 체형에 볼륨까지 있고, 달수의 취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음악에 대한 재능에다 양주를 못 마시는 체질까지 닮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녀를 대할 때 마다 달수를 좌불안석하게 만드는 것인지 달수 역시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그 불안감은 경민의 전화를 받은 다음부터 더욱 또렷해졌다.
곧 전역을 앞둔 달수는 인생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수연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지속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수연이 경민을 전혀 마음에 두고있지 않다고 했지만 경민이 공공연히 수연을 좋아하는 표현을 달수는 보았고, 경민이 그렇게 간절히 수연을 원하고 있으니… 달수는 만일 수연와 더욱 관계가 깊어진다며 혹 결혼이라도 한다면 후배의 애인을 강취한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사랑도 전쟁인데 그런게 어딨어. 강한자가 사랑을 취하는 거지…” 수연의 이러한 두둔에도 달수는 위안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군에 적응하지 못해 전역 지원서를 제출한 미래가 불투명한 자신보다 전도창창한 대형연예기획사의 잘 나가는 메니져인 경민이 수연에게 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수연아, 우리의 사랑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시작했어.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저 서로 반했을 뿐이야. 반한 것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사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열매가 아냐. 조개 속의 진주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모양이 형성되는 까다로운 작품이야…”
달수는 이 말을 남기고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멀어지는 둘 사이의 빈 공간을 수평선에서 밀려온 바다 바람이 채우고 빨간 등대만이 그들을 멀뚱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오다가 주차장에서 장사장님 만났어요… 근데 또 이렇게 한 움큼 쥐어주지 뭐예요.”
“ 내가 장사장님 돈 받지 말라고 했지? ”
“안 받으려고 하니까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면서 내 손목을 끌어잡아 당겨 손바닥에 얹혀주시고는 성큼 성큼 도망치듯 가셨어. 엄마 죄송해요...나중에 다시 오시면 그 때… ”
노기에 가득한 눈을 했던 포항 댁의 눈망울과 은숙의 그것이 흔들렸다. 포항댁이 콧물이 콧망울 밖으로 빠져 나올 것 같았는지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술을 내밀어 심호흡을 내리 쉰 후 벌떡 일어서 바 안으로 들어갔다. 양주 진열장 위에 놓아두었던 무선호출기가 울렸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들은 포항댁의 슬픔으로 구겨졌던 얼굴이 머쓱해졌다.
그녀의 추억은 추억이고 그리움은 그리움이며 남편은 바다에서 소식이 끊겼으니 그녀가 인정하지 않아도 사실상 과부이고, 일상은 일상이니 삐삐는 울려대는 것이다. 그녀가 상념에 잠길 틈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삐삐에 찍힌 번호를 잠시 들여다 본 포항댁은 전화를 잡으려다 말고 은숙에게 저녁은 먹었냐고 물어보자 은숙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포항댁이 또 다시 영업부장 눈치를 보며 호박 부침개를 꺼내 은숙에게 건네자 울먹이던 은숙이 나중에 먹겠다며 한 켠에 밀어놓았다.
사루비아 아줌마... 아니 은숙 어머니?...달수는 생각지도 못한 해프닝에 정신을 팔렸다. 정신을 가다듬자 언젠지 모르게 넥타리를 풀어 이마에 질끈 동여메고 무대에 올라간 손님의 멱따는 소리와 여기 저기 코너에서 취객의 톤이 높아진 목소리... 그들을 생계의 대상으로 삼은 하나같이 몸에 바싹 달라붙는 옷차림으로 몸내를 드러내는 바텐더들의 교성 섞인 목소리들이 섞여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마치 하나의 그 무엇에서 내는 소리로 뭉쳐 달수의 귀청을 때렸다.
“ 김중위님… 저 사람 내려왔어요, 저 사람 조금 있으면 다시 올라갈 거예요. 스피커가 찢어지도록 서 너곡 더 하기 전에 노래 하나 하세요…기를 팍 꺽어서 다시 못 올라가게…”
“ 하하하… 됐어요, 저렇게 취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이 체면이고 뭐고 있겠어요. 오늘은 노래부를 기분이 아녜요, 컨디션도 안좋고… 그리고 저 중위 아닙니다. 이거 안보이세요? 저 대위 진급했어요.”
“ 어머 그러세요, 축하드립니다. 저는 오랜 동안 안 보이시길래 제대한 줄 알았죠. 그 사람처럼…”
“ 그 사람? 누구요?”
“ 아니 그런 게 있어요. 암튼 그러지 말고 여기에서 신청곡 적어주시면 제가 웨이터에게 갖다 드릴께요. 아니 그 때 그게 뭐였더라 그래 맞아, 가까히 하기에 너무 먼 당신… 그거 대신 여기다 적을께요… 그리고 다른 거 하나 더 하세요.”
은숙은 노래 신청서를 웨이터에게 넘기면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렇게 끝을 맺는 노래가 엄마의 18번 이라고 했다. 엄마는 고향인 포항에 돌아가지 못하고 3년을 기다려도 아버지 배는 돌아오지 않고, 제대할 때 자신을 서울로 데리고 가겠다던 그 육군 중위도 배처럼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기에, 남자들의 속삭임은 항구를 떠나며 다시 돌아오지 않은 배의 고동소리라고 했다. 그녀는 절대 배를 타는 사람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뻗어나갈 수 없는 땅끝 마을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했다.
은숙도 가난한 어촌의 처녀들처럼 의무 복무기간을 채우고 전역하는 군인을 만나 서울에 가서 사는 것이 신기루 같은 소망처럼 늘 마음 한 켠에 감아 돌았을 것이다. 달수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그것을 안주 삼아 양주 반 병을 비웠다. 달수는 예민한 코와 혀가 놓지지 않는 화학 약품 같은 특유의 양주냄새와 맛를 역겨워 하면서도 스스로 수연을 떠나와 또 스스로 만들어낸 망상으로 허전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기에 참을 만했다. 은숙에게 등이 떠밀려 무대에 오른 달수가 밴드 마스터의 올갠 위에 얹혀있는 통에 천원짜리를 두 장 넣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 가까~히 하~기에에엔~ 너무 먼 당신~ 을 난~ 난 잊을테요~”
일절을 부르고 이절을 기다리며 반주를 듣고 있는 달수 눈에 현관문 앞에서 언제부터인지 서있는 수연이 들어왔다. 달수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마이크를 잡은 손을 툭 떨구고 무대복을 벗어던지고 정장으로 갈아입은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꼭 탈바가지처럼 짙은 무대 화장을 뒤집어 쓴 수연의 얼굴은 어느새 화장기 없는 얼굴로 변해있었다. 달수가 마이크를 거치대에 끼우고 무대를 내려오자 상체를 흔들어가며 감흥에 젖어 연주를 하던 올갠 연주자가 놀란 눈으로 달수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음 노래를 부를 사람의 이름을 호명했다. 달수는 사루비아 코너에 가서 말없이 앉았다.
“ 김대위님, 왜 그러세요 참 좋았는데… 어? 어서오세요…”
은숙은 자신의 인사에 보일 듯 말듯한 눈인사를 한 수연이 달수의 곁에 와 앉아도 수연을 돌아보지도, 반기지도 앉는 달수를 보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도 그렇지만 둘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슴에 궁금증이 더해졌다. 은숙이 양주잔을 수연 앞에 내놓았다. 수연도 양주를 마시면 속이 아프고 마신 다음날 맥을 못 춘다고 했다. 그래서 달수와 수연은 같은 체질을 놓고 서로 잘 맞는 천생연분이라고 억지로 같은 족속으로 서로를 새끼줄같이 엮어가고 있었다.
수연이 달수에게 시위라도 하듯 은숙이 따른 양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넣었다. 은숙이 흠칫 놀라며 직업적으로 다시 한 잔을 채우자 수연이 역시 손목을 꺽어, 그녀에게는 독물 같은 그것을 목구멍이 밀어내는 것을 눈을 질끈 감으며 참고 삼켰다. 은숙이 다시 잔을 채우는 것을 머뭇거리자 수연이 직접 양주병을 잡아 잔을 채우려는데 달수가 술병을 잡은 수연의 손목을 잡았다.
“ 뭐 하는 짓이야? 내 앞에서 죽어서 나를 괴롭힐 생각이면 당장 그만 둬.”
수연이 달수를 노려보며 달수의 손에 잡힌 팔을 당겨 빠져 나오려고 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는 일… 수연의 팔에 힘이 풀려 술병을 내려놓았다. 수연의 눈은 여전히 달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왠지 그 눈빛은 달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 적의로 위장된 눈빛은 사실은 애증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고 있는 것이다.
“ 호호호… 두 분이 무슨 일로 이러실까? 참 좋은 시절입니다. 나는 그 시절도 다 갔고 배타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붙박이 항구가 되었지요. 내가 다시 젊은 날로 돌 아 간다면 남편에게 바가지 긁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도 내 아이려니 하고 키울 자신도 있어요. 그 때 남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말이죠…”
“ 엄마 또 울려고? 술만 먹으면 울면서…”
포항댁이 은숙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양주 한 병을 꺼내어 자신의 잔에 따르며 말했다. 순간 달수를 바라보고 있는 수연의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왔지만 달수와 수연 누구도 말이 없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은숙은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등을 돌려 진열장에 거꾸로 놓여진 술잔들을 하얀 면포로 닦는 척을 했지만 포항댁은 그 분위기를 즐기는 듯 했다. 자신이 나이가 있어 코너를 찾는 손님들 역시 중장년층이 많기에, 언제나 따분한 음담패설에 찌들어 버린 그녀의 정서가 달수와 수연의 사랑싸움에 새파랗게 새순을 돋아내는 듯 했다. 자식 같은 젊은 남녀에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라도 들려주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듯 아예 구석에 밀어놓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 자고로 연애란 꽂힐 때 찔러야 되는 법이야, 가릴 것 다 가리고 사릴 것 다 사리면 언제 연애다운 연애 한 번 해보겠어.”
포항댁이 남편과 처음 만난 것부터 해서 배를 타고 떠난 마지막 날까지 들으려면 아마도 한 번 더 와야 할 것 같은 지루함이 이미 달수에게 느껴졌다. 달수가 수연의 손목을 잡고 바를 빠져 나왔다. 수연의 손목을 놓아 몇 발자국 앞서가는 달수 뒤로 수연이 축 늘어진 팔로 바닥에 끌릴 듯 핸드백의 끈을 잡고 따랐다. 그녀가 욱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 앉아 한 움큼 토해냈다. 달수가 뒤돌아 그녀에게 뛰어가 핸드백을 받아들고 등을 두드렸다. 입주위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다시 일어선 수연의 눈에 이전에 흘린 눈물인지 토할 때 눈물샘이 자극되어 나온 눈물인지 모를 눈물이 그렁거렸다.
수연이 다시 욱 소리를 내며 토할 듯 하자 달수가 수연의 허리를 감아잡아 부축하여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보도블럭 가까히 수연을 끌어 앉혔다. 수연의 쪼그리고 앉아 앞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여 토하는 것을 달수가 허리를 굽이고 안타까와하고 있는데 한 사내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보도에 가깝게 주차한 그 사내의 검정 승용차에 수연의 토사물이 튀는 것을 달수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 이러니 통일이 안되지…”
달수가 허리를 세워 대신 그에게 사과를 하는데 군복을 입은 달수를 본 차주인이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달수의 위 아래를 훝어보더니 한 마디 뱉고 차를 몰고 떠났다. 달수가 모든 군인을 싸잡아 비하하는 모욕적인 말에 울컥하였지만 그보다 속에서 받지않은 양주 탓에 속이 울렁거리고 거북하여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시큰한 무엇인가를 먹고 싶었다. 여자들이 임신하여 속이 울렁거리면 귤 같은 시큰한 것이 먹고 싶다고 하는데, 달수는 그 와중에 이렇게 술 마시고 속이 울렁거려도 시큼한 것을 먹고 싶은 것과 연관이 있는 걸일까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수연과 같이 갔었던 횟집을 찾았다. 시큼 새큼한 식초물에 오징어회를 송송 쓸어 담은 물회를 먹으면 속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았다.
둘은 해안이 바라보이는 식당의 마루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서 마주 앉았다. 창 밖으로 수 십 척의 오징어 잡이배가 눈이 시도록 밝은 촉수의 불을 밝히고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 배에서 잡은 오징어가 바로 자신의 식당으로 옮겨진다며 싱싱한 회감을 자랑하는 식당 주인 아주머니와 달리, 은숙의 어머니는 저 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달수는 속초시가 관광상품으로 개발한다는 오징어 잡이 배를 보면서, 그것을 바라보며 즐기는 사람들과 저 배에서 어깨가 빠지도록 그물을 잡아 올리는 어부들과 그리고 은숙 어머니 포항댁을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버지에게 버림 받다시피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을 배경으로한 복수심이 명치끝에서부터 밀고 올라왔다. 돌아올지 않는 남자의 기다리며 살아가는 여자들...어쩌면 같은 장소의 같은 현상을 보고 그 내부에 감추어진 몇가지의 실체를 보게되는 것이 결코 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달수도 저 관광객들처럼 그저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것을 즐기는 부류의 한 사람 이었으면 했다.
몸으로 느끼는 예상이 적중했다. 달수는 시큼한 물회를 먹고 나니 속이 한결 편해지고 수연을 다시 바라보니 속이 아플 때보다 이뻐 보였다. 육체적 감성과 동물적 본능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쫓아 즐기고 헤매는 자신이 들킬까봐 달수는 여전히 영랑 스텐드 바에서 수연을 보았을 때 가지고 있던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수연은 물회 사발을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돌려 푸른빛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도록 밝디 밝은 빛을 내고 있는 오징어 잡이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수가 수연을 바라보던 고개를 창문으로 돌리고 수연이 바라보고 있는 배로 시선을 가져가 수연과 동화되는 듯한 모습이다. 달수가 다시 수연을 바라보니 화장을 모두 지우고 술을 토해낸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어 유난히 까맣게 보이는 검정 눈동자에 오징어잡이 배의 하얀 불빛이 담겨 있슴을 보았다.
1년 반전에 학교 지하 서클룸에서 함께 있었던 그날 밤의 수연의 눈동자도 저렇게 까맣고 그 안에 촛불이 담겨 이글거렸었다. 그런데 오늘 수연의 까만 눈동자는 하얀 오징어 유인등에 녹아 내리듯 그렁거렸다. 달수는 수연의 핏기없는 얼굴에 도두라진 눈이 예전의 사랑과 음악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생계로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 그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일까.
달수는 수연이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마친 후 무대를 내려가 손님의 품에 안기다시피 다가 앉자 손님이 깊이 파인 그녀의 가슴에 만원짜리를 꽂았을 때 그것을 내려다 보는 아주 짧은 찰나의 수연의 눈빛을 보았었다. 그 때 수연은 동냥을 받는 걸인처럼 비굴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맑고 강렬했던 수연의 눈동자는 생존을 위한 삶을 통해 시들어가고 있었고, 달수의 수연을 향하던 눈동자의 빛도 덩달아 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달수는 그 모든 변화가 자신이 아닌 수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경민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 그녀에 대한 열정의 감퇴속도는 탄력을 받으며 찬물을 맞은 듯 식고 있었다.
횟집을 나온 달수와 수연은 방파제 위에 서 있다. 파도가 밀려와 방파제 아래로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 같이 얼키 설키 포개지고 널부러져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인 방파석에 부딪히며 부서졌다. 부서지는 파도로부터 뿌리쳐 나온 작은 물 알갱이들이 수은등의 불빛을 받아 안개처럼 허공에 피어올랐다. 돌아가는 등대의 강한 직사광선도 중간에서 끊겨 넓디 넓은 동해바다물 위의 극히 부분만을 비추었다. 싸늘한 바람이 더운 뺨에 와서 부딪힐 때마다 코끝이 싸아했다. 수연의 뺨도 그 찬 바람에 발갛게 할퀴어져 있었다.
수연이 치렁거려 귀찮다는 것을 달수가 자르지 못하게 하여 어깨를 넘어설 만큼 자란 수연의 머리카락이 바다바람에 밀려 날리면서 수연의 긴 목이 드러났다. 달수가 군용 야전잠바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그녀의 시리고 여린 목을 덮었다. 바다의 짠 냄새를 느낀 달수는 갑자기 목덜미를 핥고 지나가는 소름을 느꼈다. 수연의 옆 모습 실루엣에서 희정과 지나치게 닮아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달수는 오직 달빛과 듬성 듬성 서있는 가로등의 어둑한 불빛아래에서, 이목구비보다는 프로파일이 한 눈에 들어오는 수연을 희정으로 착각하는 환영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달수는 희정을 닮은 수연을 원했었는지 모른다. 외모에서나 성격에서나 희정은 달수에게 완벽한 여자였다. 그래서 수연의 머리가 길어졌고 희정의 요조숙녀 같은 행동거지와 수연의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방종적인 생활이 비교되면서 화가 나게 했던 잠재의식을 달수는 알 듯 모를 듯 가지고 있었다. 수연도 달수에게는 참 매력적인 여자임에 틀림없다. 달수가 좋아하는 마른 듯한 체형에 볼륨까지 있고, 달수의 취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음악에 대한 재능에다 양주를 못 마시는 체질까지 닮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녀를 대할 때 마다 달수를 좌불안석하게 만드는 것인지 달수 역시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그 불안감은 경민의 전화를 받은 다음부터 더욱 또렷해졌다.
곧 전역을 앞둔 달수는 인생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수연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지속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수연이 경민을 전혀 마음에 두고있지 않다고 했지만 경민이 공공연히 수연을 좋아하는 표현을 달수는 보았고, 경민이 그렇게 간절히 수연을 원하고 있으니… 달수는 만일 수연와 더욱 관계가 깊어진다며 혹 결혼이라도 한다면 후배의 애인을 강취한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사랑도 전쟁인데 그런게 어딨어. 강한자가 사랑을 취하는 거지…” 수연의 이러한 두둔에도 달수는 위안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군에 적응하지 못해 전역 지원서를 제출한 미래가 불투명한 자신보다 전도창창한 대형연예기획사의 잘 나가는 메니져인 경민이 수연에게 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수연아, 우리의 사랑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시작했어.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저 서로 반했을 뿐이야. 반한 것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사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열매가 아냐. 조개 속의 진주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모양이 형성되는 까다로운 작품이야…”
달수는 이 말을 남기고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멀어지는 둘 사이의 빈 공간을 수평선에서 밀려온 바다 바람이 채우고 빨간 등대만이 그들을 멀뚱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댓글목록 5
박명근님의 댓글
상기 내용중의 희정의 가 아니라 수연 이 아닌교?<br />
내가 잘못 읽었나?
김시우님의 댓글
희정이 아니란 수연이 맞습니다. 맞고요... 역시 선배님답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승태님의 댓글
김시우님의 댓글
정창주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