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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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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여정(40회)

김시우
2007.08.05 16:54 2,010 1

본문

달수는 당시에 경림이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잠시 혼란스러웠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미소로 웃어넘겼었다.  달수가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정작 그녀가 달수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경림이 많은 남자들을 알고 지냈는데  그래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달수는 또 주체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고 있다.

“ 내가 또 잘못하고 있는 건가. 내가 경림을 가까이에 두면 안 되는데 이러는 것은 아닌가…”

달수는 결심했다. 희정을 만나기로… 그녀를 만나 마음정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 소리치고 싶었다.

“ 아! 그 망할 놈의 올해의 기업인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달수는 중소기업청 수상식에 참석한 것을 탓하고 있었다. 그 수상식장에서 희정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그런데로 일에 만족하며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또 희정이 속을 휘집어 놓은 것을 탓하며 엄한 곳에다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달수가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사오신 그림책에서 보았던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의 집과 백설공주의 모래성들…파도가 그 모래성을 무너뜨렸듯이, 모래성 귀퉁이가 무너지듯 달수의 다 잡은 마음 한구석이 어쩔 수 없이 스르르 그의 통제를 빠져나가면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달수가 희정을 오늘에서야만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동찬이 유명인사가 된 이후로 그가 매스컴에 오를 적마다 그의 곁을 지키는 희정은 달수의 예민한 안테나에 언제나 포착되고 있었다. 달수는 그럴 때마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희정이 불쑥 자맥질 하듯 떠오르기도 하였지만 며칠 뒤면 대개는 잊고 지냈었다. 언제부터인지 일중독에 빠져 벌려 놓은 일들이 그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년을 넘게 잊었었는데 이제사 못 잊을 이유도 없다고 달수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부벼누르며 견뎌왔다. 그런데 오늘 이 순간 달수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그는 어느새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큼 쥐어 뜯고 있었다.

인간의 두뇌는 사랑과 마약에 비슷한 반응을 한다. 뇌 안의 신경물질로 알려진 도파민의 생성과정이 마약을 흡입했을 때와 흡사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달수는 마약에 중독되듯 사랑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희정을 떠올릴 적 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할 적 마다 도파민이 생성되었고 결국 반복되는 그 신경물질이 쌓이고 쌓여 결정체가 되어 그의 뇌속 어딘가에 굳혀져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마약 중독자의 금단현상처럼 달수가 희정에 대한 사랑을 끊으려 하면 할수록 그의  머리속에서 커다란 모터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아우성 같은 혼미 속에서도 그 옛날 자유공원 언덕 길을 함께 오르던 희정의 뜻 모를 미소는 떠올랐다. 아예 눈을 감아버리자 희정의 모습은 더욱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달수는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시계소리가 예민해진 그의 귀를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 그래 이렇게 뜬구름 잡듯이 살 순 없어… 그렇다면… 그렇다면… 동찬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 정말 미치겠다.”

달수는 이미 희정을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사무실 소파에 앉았다 일어섰다 서성거림을 반복하는 달수가 책상으로 다가가서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그의 음성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그만이 느끼고 있었다.


“ 저… 이 희정 교수님 계신가요?”

“ 제가 이희정입니다만 누구신가요?”

“ ………”

조교 아닌 희정이 직접 전화를 받자 잔뜩 긴장해있던 달수는 반쯤 열린 입을 더 열지도 닫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처음 희정을 만났을 때 지칠 줄 모르고 그녀의 뒤를 쫓았던 그 열정과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희정에게 당당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서도 아니었다. 어쩌면 희정에게 매몰차게 거절을 당하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예견해서 일지도 모른다.

“ 여보세요. 제가 이희정입니다. 말씀하세요.”

“ 저어~ 김달숩니다.”

“ ………”

“ 많이 망설였습니다. 근데 꼭 망설일 만한 이유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심각할 것도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 좀 내 주실런지요”

“ 심각할 게 없다구요? 글쎄요. 달수씨… 우린 할 얘기도, 나눌 얘기도 없지 않나요? 할 얘기는 이미 과거에 묻혔고,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니 나눌 얘기도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이런 말을 하는 희정의 뇌리에 그 옛날 수연이 달수의 팔을 감아 한 몸이 되어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질투는 그 만큼 여자의 무기이자 독인 것이다.

“ 그렇지 않아요. 희정씨는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난 한결같이 희정씨와 같은 길을 걸었어요. 희정씨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단 말입니다.”

“난 당신의 기억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로프에 의지하는 등산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말이죠. 당신에 대한 기억을 놓쳐버리면 한 없이 추락해버릴 것 같았어요. 그게 내가 살아온 이유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단 말이예요.”

“ 그렇다고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거예요. 동찬씨가 하는 말이 있어요. 전투기를 조종하다 보면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는데 한 번 돌아서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달수씨는  저하고 다른 포인트를 찾고 계신 것 같네요.”

달수의 입이 얼어붙었다. 그토록 망설이면서 통화만 되면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뇌활동이 모두 정지한 듯한 멍한 기분을 느꼈다.

“ 달수씨 옛날의 혈기와 열정만으로 우리 사이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 아시잖아요. 과거는 과거에 머물게 그대로 놔 두세요. 그럼…”

“희정씨, 희정씨이...”

매몰차게 끊어지는 놓여지는 수화기 소리에 이어지는 ‘뚜’하는 전자음… 달수는 들고있던 수화기를 전화에 제대로 걸쳐 놓지도 못한 채 쇼파에 펄썩 주저 앉았다. 울고만 싶었다. 살면서 이렇게 스스로 한없이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달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그의 촉촉해진 속 눈썹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 빛을 받아 반짝였다.

“ 아~ 정말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적어도 우리가 왜 다른 길을 가고야 말았는지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달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셔 위로 휴가를 나왔을 때 부대에 복귀하기 며칠 전 희정을 찾아 나섰었다. 희정의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잃어버려 그녀의 근무하던 이화여대 불문과를 찾아갔으나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낙심하여 그녀를 그리며 쓴 글이 담긴 종이가 지금 달수의 발 밑에 구르고 있었다.

어느날 이른 아침 산책 길에  발목을 적시는 이슬처럼 청량한 모습으로
살며시 내 가슴속에 들어온 당신,

그러다 당신이 사냥꾼한테 쫓기는 사슴처럼 덜덜 떨면서
내 가슴에 확 다시 안겨 온 날
난 그게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당신, 난  그런 당신이 자꾸만 좋아집니다.
당신을 우연히 만나고 좋아한 다음부터 가슴 벅차옴으로 터질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면회를 왔었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당신이 있어 이 산 골짜기  부대의 독신 숙소에서
혼자 육지에서 떨어져 나간 조그만 섬 같은 마음이 일지만
그대를 그리고 있는 난 이 순간에도 행복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당신은 나의 행복한 비밀입니다.
그런 당신에게 나의 마음을 전합니다.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댓글목록 1

현중재님의 댓글

현중재 2007.08.09 13:44
  인간은 잊을 수 없는 보배로운 추억 하나만 가져도 생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br />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은 <br />
참으로 고마운 인생의 혜택이며 신뢰할 만한 보증이 되는 일입니다. <br />
<br />
이 어지러운 시대, <br />
수없이 만났다 수없이 헤어지는 교차로에 서서 잠깐 손을 들었다간 <br />
<br />
그대로 잊어버리고 마는 정신없는 시대를 살면서 <br />
잊을 수 없는 사람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다는 건 <br />
얼마나 소중한 삶의 보람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