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 여정 43회
김시우
2007.12.10 16:06
2,206
5
본문
경인 고속도로에 올라선 택시는 거침없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 둘을 저지할 수 없을 것 같은 거침없는 회오리 바람을 닮았다고나 할까. 그때 달수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희정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슴을 알아차리고 흠칫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고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달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희정의 멈추지 않는 눈물은 앞만 바라보고 있던 달수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달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희정이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적어도 희정에게는 그 옛날 달수를 찾아 먼 길을 떠났던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두근거리며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따위는 지워버린 지 오래 되었던 날들이었다. 그 때처럼 호흡이 가빠올 정도의 설레임은 또 다시 찾아왔지만 왜 이다지도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한 회의감이 그녀의 눈물에 녹아내리 것일까. 끊이지 않는 희정의 눈물은 그녀의 뺨을 번들거리게 하기에 충분했고 넘쳐 난 눈물은 턱에 달려있다. 그 대롱거리며 떨어질 듯 아슬거리는 눈물을 달수가 손수건으로 훔쳤다.
우유로 빚은 듯한 피부를 가진 그녀의 얼굴에 피곤함에 느껴졌다. 달수는 그녀의 표정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기나긴 여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사람의 표정이랄까. 가야 할 길은 너무 멀고 되돌아가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고달픈 표정, 가야 할 먼 길의 한 가운데에서 잠시 다리를 쉬는 사람이 짓는 표정, 쉬고 있는 이 순간보다 걸어가야 할 길에 더 마음을 빼앗긴 근심스러운 표정이 그녀의 뚜렷한 윤곽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달수는 그러한 표정 속에서 희정이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강릉 시댁으로 향하던 그 날의 희정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마치 바위 투성이의 계곡에 빠져 있다가 목자를 발견한 산양처럼 달수의 어깨에 기대앉았던 그녀를…
택시는 해가 저물어 가는 즈음의 초저녁 인하대학교 후문가에 도착했다. 수업이 모두 끝난 교정에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달수와 희정은 그들을 마주보며 마치 물살을 헤치고 추억을 찾아 역행하는 연어같이 그들의 틈을 비집고 교정 안으로 들어섰다.
호수물까지 축 늘어져 담긴 하늘 하늘한 버드나무 가지아래에 있는 벤치에 둘은 앉아 막 저물어 가는 해가 만들어 낸 노을이 물살 위에 잠겨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순환하지 않는 인공호수의 물은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고, 여기 저기 그 녹색과 구별이 잘 안 되는 연꽃잎이 가늘게 떨리는 물살을 타고 있었다.
재학시절 한 번도 인정호수가의 벤치에 앉아보지 않았던 달수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남자는 의례히 납작한 돌을 들고 허리를 숙여 힘차게 호수의 표면위로 던지고, 여자는 물의 표면장력 때문에 돌이 통통 튀어오르는 숫자를 세며 즐거워하는 그런 판박힌 연인의 모습과는 둘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달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호수의 어딘가를 멍한 초점을 맞춘 희정을 살며시 훔쳐보았다.
희정은 이런 달수의 시선을 느꼈지만 신촌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달수는 희정의 눈치만 살피는 일 이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 많던 할 말이 겹겹히 쌓이고 쌓여 그 자체 중력에 의해 굳어버려 풀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이렇게 그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곁가지가 필요없이 충분히 그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까. 달수 역시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왠지 어색한 분위기를 걷어내려고 하는 듯 달수가 반쯤 땅에 박힌 주먹만한 돌을 발끝으로 톡톡 걷어찼다. 떼구르 구르는 그 돌 밑에 숨어있던 두 마리의 바퀴벌레가 밀회를 들켜버린 듯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었다.
“ 희정씨 그거 알아요? 바퀴벌레는 왜 바퀴도 없는데 바퀴벌레일까요, 그리고 닭살 돋는 커플에게 왜 귀엽지도 않은 바퀴벌레 한 쌍이라고 하는 건지…”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달수의 노력이 가상했던 지 희정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더욱 멎적어진 달수였지만 그의 희정을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은 드디어 발동하는 듯 싶었다.
“ 그것 말고 또 있어요. 젓가락은 시옷 받침이고 왜 같은 식사 도구인 숟가락은 디귿 받침일까요, 숟가락은 숟갈로 줄여 부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젓가락을 젓갈이라고 줄이면 왜 새우젖이 생각나는 걸까요? ”
달수의 이런 쓸데 없는 농담을 들은 희정이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허리를 숙이고 배꼽이 빠지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10 여년 전에도 그랬듯이 희정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이뻤다. 웃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설풋 냉정해 보이는 이미지를 풍겨서 일까, 달수는 그녀가 웃을 때면 구름에 가렸던 해가 밀려나오듯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달수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의 뒤 켠 허공에는 소낙비가 모든 먼지를 걷어가 버린 청명한 하늘에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기운을 느꼈었다. 희정과 함께 있는 동안 달수는 마치 희정이 품어내는 산소로 숨쉬는 미약한 존재였다.
달수는 그렇게 그녀의 얼굴을 보며 행복에 젖다가도, 자신이 농담으로 삼았던 일관성 없는 언어처럼 우리네 삶도 수학공식 같지 않아 정리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수는 희정과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편하지 않은 것을 덜어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은 생사를 같이 했던 시절의 친구의 아내가 아니던가. 달수는 정말이지 희정과 자신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 희정씨 내가 꼭 희정씨하고 가고픈 데가 있어요…”
“ 여기 말고 또 있나요?”
“ 궁합나무…”
“ 궁합나무?…”
“ 예 마치 새총처럼 생긴 나문데요, 나무가 밑둥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어요. 두 남녀가 그 나무 가지에 같이 앉을 수 있으면 궁합이 맞는 거래요.
이미 어둑해진 하늘빛은 캠퍼스의 저편에 있는 도서관의 불빛을 더욱 밝게 만들었다. 달수가 일어서자 희정의 천천히 따라 일어섰다. 달수가 앞장 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자 희정은 여전히 그 벤치 앞에 서 있었다. 뭔가 불안하고 쫓기는 것 같은 심정은 희정도 마찬가지였다. 달수가 그녀에게 돌아서 다가갔다.
“ 가봐야 하죠?…내가 너무 내 멋대로인 거 알아요. 하지만……”
생선회칼로 저며낸 듯한 그 얇고 투명한 짧은 시간, 오웬의 마지막 잎새처럼 억지로 정지시켜버린 시간의 절박함 앞에서 둘은 가슴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돌아섰던 그 시절의 그들의 수줍은 사랑은 이제는 희정의 몫으로 남아있었다. 희정이 수연을 언급한 이후 일순간 기세가 꺽였던 달수의 적극적인 사랑공세는 그 옛날의 강도를 다시 되찾아가고 있었다.
“ 근데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조금 더 같이 있어요. “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과, 산사람이 정상이 얼마 남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누드 모델 사진작가가 모델에게 마지막 포즈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달수의 마지막 만남으로 포장된 절박한 마음을 품은 희정이 걸음이 속도를 줄이자 흐릿한 달빛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검푸른 캠퍼스의 잔디의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그 둘은 광활하게 펼쳐진 검푸른 바다를 오로지 단 둘이 의지하며 헤엄쳐가는 결속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다지 밝지 않은 달 때문인지 둘의 머리 위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고 코끝으로 느껴지는 다소 습하고 차가운 공기는 달수가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 후우~ 희정씨도 한 번 숨을 크게 쉬어봐요, 마음 속에 꽉 들어찬 답답함이 좀 후련해질 거예요, 그리고 이 팔도 여기에 이렇게 걸치고요…”
달수는 어떻해든 언제 다시 찾아올 지 모르는 이 순간을 가급적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시금 간직하고 싶었다. 달수의 왼팔을 감아 쥔 희정을 달수가 사랑스럽게 내려다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문을 향해 걷던 달수의 눈에 저만치 궁합나무라고 불리는 나무가 들어왔다. 얼마나 많은 젊은 청춘들이 그 나무에 올라 앉았었는지 나무는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은 마치 광택제를 바른 듯 번들거리며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뭐하세요? 어서요… 여기에 앉아봐요.”
먼저 궁합나무에 앉은 달수가 멀뚱하게 서있는 희정에게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희정이 미간을 약간 찌뿌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달수가 일어서 희정의 손을 잡아 끌어 궁합나무에 먼저 앉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자신이 앉을 공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달수가 잠시 멈칫했다.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희정의 곁에 앉으려 엉덩이를 비집고 들이밀다가 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 자빠졌다.
깜짝 놀란 희정이 자리에서 일어서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데, 달수가 다시 희정을 궁합나무에 앉히고 희정의 어깨를 왼팔로 감싸고 최대한 몸을 밀착하니 둘은 간신히 나무에 걸터 앉을 수 있었고 둘의 엉덩이와 옆구리에는 면도칼 하나 들어갈 공간이 없이 한 몸이 되었다.
“ 거봐요 우리 궁합이 맞잖아요.”
“ 이게 어디 맞는 거예요, 억지로 끼워 맞춘거죠.”
“ 너무 쉽게 아귀가 맞는 것 보다 이렇게 맞춰간다는 것… 그게 더 의미있는 것 아닐까요?”
“ …… 달수씨 여전하군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달수를 올려다 보는 희정과 달수의 눈이 마주쳤다. 희정의 한 쪽 눈을 가린 앞머리를 달수가 훔쳐 올리고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와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희정은 이러는 달수의 눈을 강렬하게 바라보았다. 달수가 그의 얼굴을 희정 가까히 가져갔다. 달수는 그녀에 입을 맞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을 이마를 대고 눈을 감고 가만히 속삭였다.
“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어요.”
희정의 멈추지 않는 눈물은 앞만 바라보고 있던 달수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달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희정이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적어도 희정에게는 그 옛날 달수를 찾아 먼 길을 떠났던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두근거리며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따위는 지워버린 지 오래 되었던 날들이었다. 그 때처럼 호흡이 가빠올 정도의 설레임은 또 다시 찾아왔지만 왜 이다지도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한 회의감이 그녀의 눈물에 녹아내리 것일까. 끊이지 않는 희정의 눈물은 그녀의 뺨을 번들거리게 하기에 충분했고 넘쳐 난 눈물은 턱에 달려있다. 그 대롱거리며 떨어질 듯 아슬거리는 눈물을 달수가 손수건으로 훔쳤다.
우유로 빚은 듯한 피부를 가진 그녀의 얼굴에 피곤함에 느껴졌다. 달수는 그녀의 표정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기나긴 여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사람의 표정이랄까. 가야 할 길은 너무 멀고 되돌아가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고달픈 표정, 가야 할 먼 길의 한 가운데에서 잠시 다리를 쉬는 사람이 짓는 표정, 쉬고 있는 이 순간보다 걸어가야 할 길에 더 마음을 빼앗긴 근심스러운 표정이 그녀의 뚜렷한 윤곽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달수는 그러한 표정 속에서 희정이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강릉 시댁으로 향하던 그 날의 희정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마치 바위 투성이의 계곡에 빠져 있다가 목자를 발견한 산양처럼 달수의 어깨에 기대앉았던 그녀를…
택시는 해가 저물어 가는 즈음의 초저녁 인하대학교 후문가에 도착했다. 수업이 모두 끝난 교정에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달수와 희정은 그들을 마주보며 마치 물살을 헤치고 추억을 찾아 역행하는 연어같이 그들의 틈을 비집고 교정 안으로 들어섰다.
호수물까지 축 늘어져 담긴 하늘 하늘한 버드나무 가지아래에 있는 벤치에 둘은 앉아 막 저물어 가는 해가 만들어 낸 노을이 물살 위에 잠겨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이 순환하지 않는 인공호수의 물은 짙은 녹색을 띠고 있었고, 여기 저기 그 녹색과 구별이 잘 안 되는 연꽃잎이 가늘게 떨리는 물살을 타고 있었다.
재학시절 한 번도 인정호수가의 벤치에 앉아보지 않았던 달수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남자는 의례히 납작한 돌을 들고 허리를 숙여 힘차게 호수의 표면위로 던지고, 여자는 물의 표면장력 때문에 돌이 통통 튀어오르는 숫자를 세며 즐거워하는 그런 판박힌 연인의 모습과는 둘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달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호수의 어딘가를 멍한 초점을 맞춘 희정을 살며시 훔쳐보았다.
희정은 이런 달수의 시선을 느꼈지만 신촌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달수는 희정의 눈치만 살피는 일 이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 많던 할 말이 겹겹히 쌓이고 쌓여 그 자체 중력에 의해 굳어버려 풀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이렇게 그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곁가지가 필요없이 충분히 그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까. 달수 역시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왠지 어색한 분위기를 걷어내려고 하는 듯 달수가 반쯤 땅에 박힌 주먹만한 돌을 발끝으로 톡톡 걷어찼다. 떼구르 구르는 그 돌 밑에 숨어있던 두 마리의 바퀴벌레가 밀회를 들켜버린 듯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었다.
“ 희정씨 그거 알아요? 바퀴벌레는 왜 바퀴도 없는데 바퀴벌레일까요, 그리고 닭살 돋는 커플에게 왜 귀엽지도 않은 바퀴벌레 한 쌍이라고 하는 건지…”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달수의 노력이 가상했던 지 희정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더욱 멎적어진 달수였지만 그의 희정을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은 드디어 발동하는 듯 싶었다.
“ 그것 말고 또 있어요. 젓가락은 시옷 받침이고 왜 같은 식사 도구인 숟가락은 디귿 받침일까요, 숟가락은 숟갈로 줄여 부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젓가락을 젓갈이라고 줄이면 왜 새우젖이 생각나는 걸까요? ”
달수의 이런 쓸데 없는 농담을 들은 희정이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허리를 숙이고 배꼽이 빠지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10 여년 전에도 그랬듯이 희정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이뻤다. 웃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설풋 냉정해 보이는 이미지를 풍겨서 일까, 달수는 그녀가 웃을 때면 구름에 가렸던 해가 밀려나오듯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달수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의 뒤 켠 허공에는 소낙비가 모든 먼지를 걷어가 버린 청명한 하늘에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기운을 느꼈었다. 희정과 함께 있는 동안 달수는 마치 희정이 품어내는 산소로 숨쉬는 미약한 존재였다.
달수는 그렇게 그녀의 얼굴을 보며 행복에 젖다가도, 자신이 농담으로 삼았던 일관성 없는 언어처럼 우리네 삶도 수학공식 같지 않아 정리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수는 희정과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편하지 않은 것을 덜어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은 생사를 같이 했던 시절의 친구의 아내가 아니던가. 달수는 정말이지 희정과 자신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 희정씨 내가 꼭 희정씨하고 가고픈 데가 있어요…”
“ 여기 말고 또 있나요?”
“ 궁합나무…”
“ 궁합나무?…”
“ 예 마치 새총처럼 생긴 나문데요, 나무가 밑둥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어요. 두 남녀가 그 나무 가지에 같이 앉을 수 있으면 궁합이 맞는 거래요.
이미 어둑해진 하늘빛은 캠퍼스의 저편에 있는 도서관의 불빛을 더욱 밝게 만들었다. 달수가 일어서자 희정의 천천히 따라 일어섰다. 달수가 앞장 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자 희정은 여전히 그 벤치 앞에 서 있었다. 뭔가 불안하고 쫓기는 것 같은 심정은 희정도 마찬가지였다. 달수가 그녀에게 돌아서 다가갔다.
“ 가봐야 하죠?…내가 너무 내 멋대로인 거 알아요. 하지만……”
생선회칼로 저며낸 듯한 그 얇고 투명한 짧은 시간, 오웬의 마지막 잎새처럼 억지로 정지시켜버린 시간의 절박함 앞에서 둘은 가슴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돌아섰던 그 시절의 그들의 수줍은 사랑은 이제는 희정의 몫으로 남아있었다. 희정이 수연을 언급한 이후 일순간 기세가 꺽였던 달수의 적극적인 사랑공세는 그 옛날의 강도를 다시 되찾아가고 있었다.
“ 근데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조금 더 같이 있어요. “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과, 산사람이 정상이 얼마 남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누드 모델 사진작가가 모델에게 마지막 포즈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달수의 마지막 만남으로 포장된 절박한 마음을 품은 희정이 걸음이 속도를 줄이자 흐릿한 달빛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검푸른 캠퍼스의 잔디의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그 둘은 광활하게 펼쳐진 검푸른 바다를 오로지 단 둘이 의지하며 헤엄쳐가는 결속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다지 밝지 않은 달 때문인지 둘의 머리 위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고 코끝으로 느껴지는 다소 습하고 차가운 공기는 달수가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 후우~ 희정씨도 한 번 숨을 크게 쉬어봐요, 마음 속에 꽉 들어찬 답답함이 좀 후련해질 거예요, 그리고 이 팔도 여기에 이렇게 걸치고요…”
달수는 어떻해든 언제 다시 찾아올 지 모르는 이 순간을 가급적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시금 간직하고 싶었다. 달수의 왼팔을 감아 쥔 희정을 달수가 사랑스럽게 내려다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문을 향해 걷던 달수의 눈에 저만치 궁합나무라고 불리는 나무가 들어왔다. 얼마나 많은 젊은 청춘들이 그 나무에 올라 앉았었는지 나무는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은 마치 광택제를 바른 듯 번들거리며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뭐하세요? 어서요… 여기에 앉아봐요.”
먼저 궁합나무에 앉은 달수가 멀뚱하게 서있는 희정에게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희정이 미간을 약간 찌뿌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달수가 일어서 희정의 손을 잡아 끌어 궁합나무에 먼저 앉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자신이 앉을 공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달수가 잠시 멈칫했다.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희정의 곁에 앉으려 엉덩이를 비집고 들이밀다가 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 자빠졌다.
깜짝 놀란 희정이 자리에서 일어서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데, 달수가 다시 희정을 궁합나무에 앉히고 희정의 어깨를 왼팔로 감싸고 최대한 몸을 밀착하니 둘은 간신히 나무에 걸터 앉을 수 있었고 둘의 엉덩이와 옆구리에는 면도칼 하나 들어갈 공간이 없이 한 몸이 되었다.
“ 거봐요 우리 궁합이 맞잖아요.”
“ 이게 어디 맞는 거예요, 억지로 끼워 맞춘거죠.”
“ 너무 쉽게 아귀가 맞는 것 보다 이렇게 맞춰간다는 것… 그게 더 의미있는 것 아닐까요?”
“ …… 달수씨 여전하군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달수를 올려다 보는 희정과 달수의 눈이 마주쳤다. 희정의 한 쪽 눈을 가린 앞머리를 달수가 훔쳐 올리고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와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희정은 이러는 달수의 눈을 강렬하게 바라보았다. 달수가 그의 얼굴을 희정 가까히 가져갔다. 달수는 그녀에 입을 맞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을 이마를 대고 눈을 감고 가만히 속삭였다.
“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어요.”
댓글목록 5
채승묵님의 댓글
박명근님의 댓글
소설속에 흐른 세월이 얼마야?<br />
<br />
글구 김시우 동문은 그쪽 동네 연말모임에 갔었나요?<br />
왜 사진 한장이 안올라오지요?<br />
소식들 올리라고 전해 주세요
최강일님의 댓글
장용석님의 댓글
이번에는 일정상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음 모임때(내년 구정)는 꼭 함께 할 수 있기를...
임성택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