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 여정 44회
김시우
2007.12.16 20:10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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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 때 희정이 새총에서 튕겨나가는 조약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란 달수의 몸이 희정이 앉았던 자리로 쏠리면서 달수가 간신히 나뭇가지를 잡아 균형을 유지했다.조금전 뒤로 자빠질 때 같은 우스꽝스런 분위기 또 한 번 연출되었지만 이전에 사정이 달랐다.
“ 가야겠어요.”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희정이 빠르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잠시 흠칫하던 달수가 희정을 따라잡으면서 소리쳤다.
“ 왜요?…무엇 때문에 그렇게 도망치듯 가야 하는데요? 네?… 말 좀 해보세요.”
달수는 목구멍을 밀고 나오는 격정을 토해내면서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 벌린 팔을 허공에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그는 어쩌면 도망쳐 달아나야 할 사람은 자신과 희정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무책임한 사랑의 죄인은 자신이 아니라 희정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단편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라는 것을 달수는 알지 못했다. 희정이 멈칫 서서 달수에게 등을 보인 채 다소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달수씨는 단 하룻밤 나를 차지하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대가를 치른 건 달수씨가 아니라 나였어요. 지금 생각하니 턱없는 희망에 사로 잡혀서 완기씨가 죽은 지 채 한 달이 못 되어 달수씨를 찾아간 것이 지금도 나의 양심을 이렇게 갉아먹고 있는데…그 때 우리의 마음이 적어도 거짓이 아니었다면 우린 왜 이렇게 오랜 동안 다른 길을 걸었어야 했을까요, 달수씨가 나 대신 택했던 것은 대체 무엇인가요 수연이었나요?”
달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희정이 수연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을 물어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에 휩싸였다. 앞만 보고 있던 희정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달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달수에게 따갑게 느껴진 그녀의 눈빛은 격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심과 달리 어떻해든 이성에 호소하여 달수와 함께 있으면 주체할 수 없이 봇물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잠재우고 싶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희정은 그 모든 애증에 종지부를 찍는 결심을 한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손에 잡힌 무엇인가를 펼쳐보였다.
" 그 날 이것을 전해주려 갔었어요."
그것은 십 삼년 전 달수가 희정의 뒤를 쫓기위해 잡아 탄 택시기사에게 택시 요금대신 건넨, 달수의 희정에 대한 순진무구한 사랑처럼 청명함 잃지 않은 에머럴드 빛 반지였다. 희정은 그 반지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달수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우연히 달수가 수연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것도 털어놓았다. 달수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도 언제 불쑥 나타 날지 모르는 달수씨를 위해 내가 날마다 한자리에서 석고상 처럼 앉아있기를 바랬나요? 바람소리에 창문만 덜컹여도 혹시나 하고 벌떡 일어나서 발자국 소리가 골목을 다 빠져 나갈 때 까지 바늘 끝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앉아 있기를 바랐나요 ?"
가시 돋친 말투였다.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 적의였다. 그러한 희정의 적의에는 사실 애증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달수는 잠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소 등짝에 지져 박히는 화인처럼 그의 가슴에 와 박히는 바람에 그는 심장이 멈춘 것 같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리고 이제와서 달수씨 마음속에 빠져나간 바람 때문에... 그 허전한 공간을 채우려고, 그래서 세상이 변해버렸으니 젊은 날에 못했던 사랑이나 해 보려고… 내가 아직도 달수씨를 사랑하고 있는지, 동찬씨야 피를 토하고 죽어 넘어가든지 상관말고 달수씨를 기다리면서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바람이 나기를 바라는 건가요? 내가 그걸 바라고 있나 아닌가, 정말 그런 건 아닌가, 그걸 확인하려 왔나요? 그런 건가요?”
아직 눈가를 적시지 않은 달수의 절제된 눈물을 본 희정이 잠시 눈을 허공에 멈추더니 곧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어깨가 격하게 들먹였다. 그 동안 표현할 수 없었던 상처난 자존심, 슬픈 사랑의 기억, 수치심으로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제셔야 달수는 자신의 무책임한 열정이 빚어낸 사랑의 정체와 상처를 스스로 짚어낼 수 있었다.
달수와 수연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사랑은 호기심과 말초적인 육체관계로 시작한 대리배설적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희정에게 남긴 것이 배신의 상처였던 것을 달수가 알지 못했고,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 그랬었군요. 그래서… 그렇게 바람같이… 흔적도 없이… 난 바보같이 그걸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요. 그것을 알기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걸까요. 희정씨가 그런 고통에 빠져 나를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도 미련없이 잊고 살았을텐데… 아니 뭐라고 변명부터 먼저 했을텐데… 그리고… 그리고 나 역시도 이토록 오랜 시간 희정씨를 가슴에 품고 흔들리는 삶을 살지 않았을텐데… 미안해요… 희정씨.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군요. 난 그것도 모르고…이미 끝난 일을 제가 괜히 여기까지 질질 끌어왔나 봅니다. 내가 나빴어요. 이제 희정씨를 놓아드리겠습니다.”
“………”
희정이 과연 이런 달수의 절규하는 듯한 회한을 들으려 한 것일까, 희정은 막 울다가 솜사탕에 울음을 뚝 그쳐버린 아이처럼 표정이 일순간 바뀌었다. 눈을 말똥 말똥 굴리고 하늘의 향해 고개를 들어 한숨을 크게 쉰 후, 언제 흥분했었냐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정색을 했다. 순간 부끄럽기도 했지만 스스로 약해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항상 만족스런 삶을 살 수는 없었지만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잘 굴러가고 그 동안 별 탈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달수의 출현이 뭐 대수라고, 자신을 이렇게 흔들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둘은 점차 겉으로나마 안정을 되찾은 듯 보였다.
“ 희정씨… 요즘은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는 식탐이 많았다고 엄마가 돌아가시 전 그러더군요. 초등학교 소풍전날 엄마가 김밥을 만들려고 사온 소시지를 엄마가 없는 틈을 타서 몽땅 먹어버렸어요. 그래서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당근을 소시지 대신 김밥에 넣었어요. 근데 가늘게 채 쓸어서 씹기 좋도록 말이죠. 제 식탐 버릇도 고치고 제 건강도 챙겨드리려고 했던 마음을 모르고 그 김밥을 모두 버렸지요.”
“ ………”
“그리고 자존심은 있어서 소풍 내내 친구들에게 구걸하지 않고 쫄쫄 굶다가 집에 와서 부엌에 찾아 들어갔는데 냉장고에 당근만 있었어요. 냉장고 문을 세게 닫아버렸죠.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파 엄마가 일부러 계획을 세운 것인 줄 알면서도 자존심 상하지만 그 싫어하는 당근을 먹었어요. 배고픈 데 장사가 없더라구요. 하하하...근데 너무 고소하고 맛있었어요. 그런데 전 지금도 당근을 먹지 않아요. 그 특유의 냄새가 아무리 애를 써도 비위에 맞지 않을 뿐더러 억지로 먹었다 하더라도 속이 뒤집혀요. 일종의 알러지같아요.”
“ ……”
햇살이 부서지는 모래 속의 형광물질처럼, 비온 뒤 가로등을 빛을 받아 깨끗해진 거리의 아스팔트 표면의 촘촘한 홈에 고여있는 빗물의 잔재처럼, 고개를 들어 달수를 바라보는 희정의 검은 눈동자를 도포하고 있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의 수막이 달빛을 받아 쪼개지며 빛을 내고 있었다.
“ 수연과 헤어지고 그렇게 찾아헤멨던 희정씨가 떠난 것을 알아버린 뒤, 내 말초신경 입맛을 자극하는 소시지 같은 열정이 식은 후에...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여자와 다시 만나 결혼을 했어요. 난 그녀가 당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왔지요. 처음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자꾸 되씹으면 고소한 맛을 내는 당근처럼 그녀를 선택했던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당근은 당근이더군요. 그녀를 소화해낼 수 없었어요.”
“ 무슨 말이예요? 달수씨 답지 않군요. 말을 돌리시고…”
희정의 공격적인 말투에 달수가 움찔했다. 그렇지만 희정이 달수의 말에 반응을 보이고 물음을 던진 것은 오늘 둘이 만난 후에 처음이었다. 사실 달수는 희정이 자신의 반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에 애틋한 사랑의 냄새를 맡았고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 것에 대해 무척 기뻤다. 또한 내내 목석같았던 그녀가 자신과 동화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자 달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배고프니까 어쩔 수 없이 당근을 먹었던 것처럼 외로워서, 힘이 들어서, 희정씨가 본대로 수연이와 사랑을 나누었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어요. 그 동안 돈과 명예를 찾아 다닌 것은 풍요로움과 보람을 통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내세우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한편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취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달수는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것을 말로 구체화시키니 자신의 과거의 삶의 태도를 스스로 투영할 수 있었다. 달수는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채 그저 많으면 상대적으로 적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거나 지배적 위치에 오르는데 사용해왔다. 군에서 전역하고 사회로 복귀한 달수가 군 시절에 몸에 베었던 계급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급이란 권력에 갈음하는 재물에 집착하였던 것이다.
동찬이 불구의 몸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돈으로 사는 것과 같이 자신도 동찬과 별반 다름이 없는 속물임을 달수가 근간에 느끼고 있었다. 그 허무하고 허탈한 일상에 지친 달수는 희정을 찾아서 결국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다. 그의 곁에 있는 희정이 물었다.
“ 수연을 사랑했나요?”
“ 가야겠어요.”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희정이 빠르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잠시 흠칫하던 달수가 희정을 따라잡으면서 소리쳤다.
“ 왜요?…무엇 때문에 그렇게 도망치듯 가야 하는데요? 네?… 말 좀 해보세요.”
달수는 목구멍을 밀고 나오는 격정을 토해내면서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 벌린 팔을 허공에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그는 어쩌면 도망쳐 달아나야 할 사람은 자신과 희정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무책임한 사랑의 죄인은 자신이 아니라 희정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단편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라는 것을 달수는 알지 못했다. 희정이 멈칫 서서 달수에게 등을 보인 채 다소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달수씨는 단 하룻밤 나를 차지하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대가를 치른 건 달수씨가 아니라 나였어요. 지금 생각하니 턱없는 희망에 사로 잡혀서 완기씨가 죽은 지 채 한 달이 못 되어 달수씨를 찾아간 것이 지금도 나의 양심을 이렇게 갉아먹고 있는데…그 때 우리의 마음이 적어도 거짓이 아니었다면 우린 왜 이렇게 오랜 동안 다른 길을 걸었어야 했을까요, 달수씨가 나 대신 택했던 것은 대체 무엇인가요 수연이었나요?”
달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희정이 수연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을 물어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에 휩싸였다. 앞만 보고 있던 희정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달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달수에게 따갑게 느껴진 그녀의 눈빛은 격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심과 달리 어떻해든 이성에 호소하여 달수와 함께 있으면 주체할 수 없이 봇물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잠재우고 싶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희정은 그 모든 애증에 종지부를 찍는 결심을 한 듯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손에 잡힌 무엇인가를 펼쳐보였다.
" 그 날 이것을 전해주려 갔었어요."
그것은 십 삼년 전 달수가 희정의 뒤를 쫓기위해 잡아 탄 택시기사에게 택시 요금대신 건넨, 달수의 희정에 대한 순진무구한 사랑처럼 청명함 잃지 않은 에머럴드 빛 반지였다. 희정은 그 반지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달수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우연히 달수가 수연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것도 털어놓았다. 달수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도 언제 불쑥 나타 날지 모르는 달수씨를 위해 내가 날마다 한자리에서 석고상 처럼 앉아있기를 바랬나요? 바람소리에 창문만 덜컹여도 혹시나 하고 벌떡 일어나서 발자국 소리가 골목을 다 빠져 나갈 때 까지 바늘 끝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앉아 있기를 바랐나요 ?"
가시 돋친 말투였다.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 적의였다. 그러한 희정의 적의에는 사실 애증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달수는 잠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소 등짝에 지져 박히는 화인처럼 그의 가슴에 와 박히는 바람에 그는 심장이 멈춘 것 같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리고 이제와서 달수씨 마음속에 빠져나간 바람 때문에... 그 허전한 공간을 채우려고, 그래서 세상이 변해버렸으니 젊은 날에 못했던 사랑이나 해 보려고… 내가 아직도 달수씨를 사랑하고 있는지, 동찬씨야 피를 토하고 죽어 넘어가든지 상관말고 달수씨를 기다리면서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바람이 나기를 바라는 건가요? 내가 그걸 바라고 있나 아닌가, 정말 그런 건 아닌가, 그걸 확인하려 왔나요? 그런 건가요?”
아직 눈가를 적시지 않은 달수의 절제된 눈물을 본 희정이 잠시 눈을 허공에 멈추더니 곧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어깨가 격하게 들먹였다. 그 동안 표현할 수 없었던 상처난 자존심, 슬픈 사랑의 기억, 수치심으로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제셔야 달수는 자신의 무책임한 열정이 빚어낸 사랑의 정체와 상처를 스스로 짚어낼 수 있었다.
달수와 수연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사랑은 호기심과 말초적인 육체관계로 시작한 대리배설적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희정에게 남긴 것이 배신의 상처였던 것을 달수가 알지 못했고,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 그랬었군요. 그래서… 그렇게 바람같이… 흔적도 없이… 난 바보같이 그걸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요. 그것을 알기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걸까요. 희정씨가 그런 고통에 빠져 나를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도 미련없이 잊고 살았을텐데… 아니 뭐라고 변명부터 먼저 했을텐데… 그리고… 그리고 나 역시도 이토록 오랜 시간 희정씨를 가슴에 품고 흔들리는 삶을 살지 않았을텐데… 미안해요… 희정씨.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군요. 난 그것도 모르고…이미 끝난 일을 제가 괜히 여기까지 질질 끌어왔나 봅니다. 내가 나빴어요. 이제 희정씨를 놓아드리겠습니다.”
“………”
희정이 과연 이런 달수의 절규하는 듯한 회한을 들으려 한 것일까, 희정은 막 울다가 솜사탕에 울음을 뚝 그쳐버린 아이처럼 표정이 일순간 바뀌었다. 눈을 말똥 말똥 굴리고 하늘의 향해 고개를 들어 한숨을 크게 쉰 후, 언제 흥분했었냐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정색을 했다. 순간 부끄럽기도 했지만 스스로 약해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항상 만족스런 삶을 살 수는 없었지만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잘 굴러가고 그 동안 별 탈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달수의 출현이 뭐 대수라고, 자신을 이렇게 흔들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둘은 점차 겉으로나마 안정을 되찾은 듯 보였다.
“ 희정씨… 요즘은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는 식탐이 많았다고 엄마가 돌아가시 전 그러더군요. 초등학교 소풍전날 엄마가 김밥을 만들려고 사온 소시지를 엄마가 없는 틈을 타서 몽땅 먹어버렸어요. 그래서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당근을 소시지 대신 김밥에 넣었어요. 근데 가늘게 채 쓸어서 씹기 좋도록 말이죠. 제 식탐 버릇도 고치고 제 건강도 챙겨드리려고 했던 마음을 모르고 그 김밥을 모두 버렸지요.”
“ ………”
“그리고 자존심은 있어서 소풍 내내 친구들에게 구걸하지 않고 쫄쫄 굶다가 집에 와서 부엌에 찾아 들어갔는데 냉장고에 당근만 있었어요. 냉장고 문을 세게 닫아버렸죠.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파 엄마가 일부러 계획을 세운 것인 줄 알면서도 자존심 상하지만 그 싫어하는 당근을 먹었어요. 배고픈 데 장사가 없더라구요. 하하하...근데 너무 고소하고 맛있었어요. 그런데 전 지금도 당근을 먹지 않아요. 그 특유의 냄새가 아무리 애를 써도 비위에 맞지 않을 뿐더러 억지로 먹었다 하더라도 속이 뒤집혀요. 일종의 알러지같아요.”
“ ……”
햇살이 부서지는 모래 속의 형광물질처럼, 비온 뒤 가로등을 빛을 받아 깨끗해진 거리의 아스팔트 표면의 촘촘한 홈에 고여있는 빗물의 잔재처럼, 고개를 들어 달수를 바라보는 희정의 검은 눈동자를 도포하고 있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의 수막이 달빛을 받아 쪼개지며 빛을 내고 있었다.
“ 수연과 헤어지고 그렇게 찾아헤멨던 희정씨가 떠난 것을 알아버린 뒤, 내 말초신경 입맛을 자극하는 소시지 같은 열정이 식은 후에...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여자와 다시 만나 결혼을 했어요. 난 그녀가 당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왔지요. 처음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자꾸 되씹으면 고소한 맛을 내는 당근처럼 그녀를 선택했던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당근은 당근이더군요. 그녀를 소화해낼 수 없었어요.”
“ 무슨 말이예요? 달수씨 답지 않군요. 말을 돌리시고…”
희정의 공격적인 말투에 달수가 움찔했다. 그렇지만 희정이 달수의 말에 반응을 보이고 물음을 던진 것은 오늘 둘이 만난 후에 처음이었다. 사실 달수는 희정이 자신의 반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에 애틋한 사랑의 냄새를 맡았고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 것에 대해 무척 기뻤다. 또한 내내 목석같았던 그녀가 자신과 동화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자 달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배고프니까 어쩔 수 없이 당근을 먹었던 것처럼 외로워서, 힘이 들어서, 희정씨가 본대로 수연이와 사랑을 나누었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어요. 그 동안 돈과 명예를 찾아 다닌 것은 풍요로움과 보람을 통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내세우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한편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취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달수는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것을 말로 구체화시키니 자신의 과거의 삶의 태도를 스스로 투영할 수 있었다. 달수는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채 그저 많으면 상대적으로 적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거나 지배적 위치에 오르는데 사용해왔다. 군에서 전역하고 사회로 복귀한 달수가 군 시절에 몸에 베었던 계급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급이란 권력에 갈음하는 재물에 집착하였던 것이다.
동찬이 불구의 몸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돈으로 사는 것과 같이 자신도 동찬과 별반 다름이 없는 속물임을 달수가 근간에 느끼고 있었다. 그 허무하고 허탈한 일상에 지친 달수는 희정을 찾아서 결국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다. 그의 곁에 있는 희정이 물었다.
“ 수연을 사랑했나요?”
댓글목록 3
조중선님의 댓글
우리들 모이면 선배님 얘기 많이 합니다.이곳에서 활동하신 다는 것 알고 들렀습니다.<br />
옛날의 선배님 순수한 감수성을 그대로 느끼는 것 같아 좋습니다. <br />
<br />
박명근님의 댓글
아마 우리 김시우 동문을 무지 사랑하시는 분들 같은데요<br />
자주 방문 하십시요
현중재님의 댓글
꿈 많고 혈기 왕성했던 시절 바다의 짠 바람도 마다않고 강철 같은 심장을 <br />
자랑했건만 그 심장도 이제는 쇠잔해 지는 듯합니다. <br />
세월의 회한이야 항상 마음 한켠에 붙어다님을 어쩔 수야 없다지만 <br />
옛 시절의 풋사랑은 아직도 내 심장을 다시 청년시절의 박동으로 느끼게 한답니다. <br />
시우 후배님의 글 속에 후배님의 열정이 알알이 맺혀 한 겨울의 진한 곶감 맛이 절절하게 흘러 나오듯 합니다. <br />
무자년 쥐해에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