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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여정45회

김시우
2007.12.24 15:08 1,729 0

본문

“제가 사랑을 논한 만한 위치에 있는 것 같지 않네요. 부끄럽습니다. 두 번 다시 사랑을 말하지 않으렵니다.”

달수는 정말이지 헛갈렸다. 수연과 함께 있는 동안 달수가 희정을 잠시 잊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뒤늦게 깨우치게 된 희정에 대한 애틋함이 사랑이라고 단정하여 말할 자신도 없었다. 더욱이 한 때 잠시였지만 수연의 그림자가 희정을 덮어버린 시간이 길고 짧음에 대해서 변명할 수도 없었다.

“몇 사람과 인연을 가졌어요. 그리고 결혼도 했지만 어떤 구체화 되지 않은 존재가 항상 그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벽을 형성했어요. 자칫 그러한 나의 태도가 문란하게 보여질까봐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추억을 찾아 떠나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달수가 회상에 젖듯 고개를 뒤로 제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추억의 끝에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믿었죠. 그리고 그 누군가를 알아버렸어요. 나, 오늘 그 꿈이 현실이 되는 행복감에 젖어 어쩔 줄 모르겠어요. 알아요…우리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거… 그러니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되나요?”

희정이 손목시계를 슬쩍 내려다 보았지만 그것은 단지 달수에게 막연히 끌려가는 것 같은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는 행동에 불과했다. 희정은 오늘 달수를 잠시 만나고 인천 친정집에서 주말까지 지내다 일요일에 귀가하는 계획을 달수에게 내비추지 않았다.

“ 희정씨 그거 몰랐죠? 내가 희정씨 찾아다닌 거…”

“ 언제 말이예요?”

“ 희정씨를 찾아 부단히도 뛰어다녔어요. 그러니까…내가 희정씨하고 자유공원에서 헤어지고 부대로 복귀하려고 잡아 탄 버스가 양평에서 고장 나서 다음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에 희정씨가 있었잖아요.”

“ 그랬었죠.”

먼 옛날 그 둘은 자유공원 정상에서 헤어지고 달수는 서울을 향해, 희정은 달수와 반대편 공원 길을 내려 화수동 집에 도착했었다. 그 때  희정이 강릉의 시어머니가 간호하고 있는 남편의 부고를 접했고, 희정도 그 길로 강릉으로 향한 것이 어언 십 수 년 전 일임에도, 둘은 그 날의 영상과 심지어 감정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 그리고 내가 공비 토벌전에서 부상을 입고 화곡동 국군병원에서 퇴원 후… 그, 그러니까..."

달수는 웬지 말을 더듬으며 뭔가 변명하려는 듯 희정의 눈치를 보았다. 천성이 착하고 순진한 희정이 말똥히 달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한 희정의 순진무구한 시선집중에 달수가 거짓말을 하면 안될 것 같은 심리적 압박을 느꼈다.

"그러니까... 어머니 돌아가신 후 슬픔과 외로움에 몸서리 칠 때 수연을 우연히 만나고 헤어진 후 였죠. 더욱 공허해진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매주 토요일 위수지역 이탈이라는 장교로서 하지 못할 짓을 하면서까지, 희정씨와 함께 걸었던 자유공원 아래 화수동 골목길을 서성거렸어요. 혹시나 희정씨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요.”

“ 네? 뭐라구요?”

“ 예!… 그랬어요…하루는 자유공원 아래에 있는 화수동 1동사무소에 갔었죠. 쭈빗 쭈빗하다가 애인을 찾는다고 했더니 방송국이나, 빚쟁이라면 경찰서에 가보라고 망신을 주더군요. 그래서 다른 2, 3동 사무소 가는 것을 포기하고,  희정씨가 동생 희철이가 신림동 고시원에서 공부한다는 말이 기억이 났어요. 오기를 가지고 관악산 중턱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고시원을 이 잡듯 뒤졌어요. 운이 좋게 희철이가 공부해했던 고시원을 찾았는데 고시에 합격해서 떠났다 하더군요.”

희정의 표정이 순간 바뀌고 있었다. 달수가 그토록 자신을 찾아 헤매었던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그래서 이후에는 사법연수원까지 찾아갔어요. 정문 수위실에 내  연락처를 남기고 희철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결국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희정씨가 근무하는 대학 과사무실까지 찾아갔는데 한 달 전에 프랑스로 유학갔다는 말을 하더군요. 이후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주위에서 이상하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자 조금 정신을 차렸죠.”

“………”
당시 달수가 정신은 차렸다기 보다는 그렇게 사는 스스로의 모습에 스스로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희정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자, 이솝 동화에서 포도를 따먹다 실패하고 포도가 시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꼬리를 내리는 여우처럼 체념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 희정씨 같은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고 마음먹기로 했어요. 그렇게라도 맘을 먹지 않으면 너무 괴로왔죠.”

“………”

달수는 오랫동안 희정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 절하하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밤샘 작업을 위해 불을 훤히 밝혀놓고 하얀 짙은 연기를 뿜어내는 공단의 불빛이 희정일 것이라고 치부하면서… 멀리서 보면 아른거리고 아름답지만 가까히 다가가려면 주위에서 뿜어대는 매연 뒤에 숨어버린,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라고 할까.

그렇게 달수는 희정을 자신이 느끼고 있는 정반대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부정하면 할수록 희정에 대한 기억과 애증은 화석처럼 굳어져 간 것을,  오랫동안 함께 하지 못한 희정이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 달수씨 우리 겨우 하룻밤을 같이 지냈어요. 그것도…기억은 가물하지만… 아무런 일 없이… 그런데 어떻해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나요?”

사실 이런 말을 한 희정은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부끄러움이 앞섰다. 자신도 달수를 찾아 먼 길을 떠났었고 남편을 잃고 슬프고 허전한 마음을 채워 주웠던 달수의 곁에 수연이 있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에 현실도피 심정으로 유학의 떠났던 자신이 아니던가.

실제로 희정도 유학기간 내내, 그리고 귀국 후 동찬의 어머니의 청혼으로 동찬과 결혼을 할 때까지 오랫동안 달수를 그리워하고 달수를 연상시키는 사건과 사물에 접할 때마다 달수를 떠올렸다. 다만 달수와 함께 수연이 떠오르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당시에 희정에게 달수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정은 자연스레 수연과 달수를 연결 짓다 보니 실망보다 더 한 배신과 증오의 감정을 품고 살아왔고, 자신과 다른 감정으로 살아온 달수를 선뜻 납득할 수 없슴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그토록 희정씨를 찾아 헤매었는지…그 감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까요, 사랑이란 말의 정의를 제대로 말과 글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 그래도 개략 그 느낌이 어떤 것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사랑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묘사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장난기가 돌았는지 입가에 규정 질 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머금은 희정이 그녀답지 않게 집요함을 보이며, 자신에 대한 달수의 사랑을 확인하는 듯 싶었다. 어쩌면 희정의 말이 달수에게는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 사랑표현에 서툰 것이 아니냐고 질타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희정의 언행 이면에 제발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답을 내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버티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그냥 첫 눈에 반했습니다.”

“ 그게 다예요?”

“ 그래요, 그리고 뭐가 더 필요한가요? 희정씨가 정답을 얘기 해주세요. 어떤 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어야 하는지…”

달수는 희정이 동찬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했을 것이고, 희정이라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고 되묻고 싶은 반항심이 울컥했지만 참아내야만 했다. 그 둘은 동찬에 대한, 아니 동찬의 이름 자체를 언급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의 신도가 다른 우상을 논하는 것처럼 터부시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지 못하자 형사에게 증거를 대보라며 고개를 돌린 채 묵비권을 행사하는 어둑한 취조실의 용의자처럼, 달수는 희정을 납득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달수는 사랑하지만 사랑을 제대로 정의하고 증명 해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사랑이 부정되는 것에 몹시 억울한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자 희정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코방귀를 뀌듯 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달빛에 희정의 프로파일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10여년 만에 찾아온 달수는 희정의 얼굴에 혼란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 싶었다. 그 때 달수의 외마디가 희정의 눈을 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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