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욥의 고난
김진수
2008.04.0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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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욥기는 성경 중에서도 어려운 책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욥기를 읽으면서 많은 문제점을 제기 할 수밖에 없었다.
- 욥의 친구들이 최초에는 욥을 진정으로 위로 하려고 하였는데 그 후에는 욥에게 반론을 제기 하였다는 것
- 욥의 친구들이 한 이야기가 틀리지 않다는 것
-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다가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 욥에게 고난을 준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사실
-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던 욥이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은 말을 한다는 점
- 인과응보와 섭리와의 관계
욥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를 전제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의견과 상관없이 그분의 뜻대로 하신다는 사실
-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지 않으면 진정한 조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항상 공평하지만은 않다는 사실
이러한 가정 하에 제기된 문제점을 하나씩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첫째, 욥의 친구들은 욥의 불행한 소식을 듣고 멀리서 욥을 위로하려고 찾아왔다. 그리고 욥의 처지를 직면하고 일주일 동안 같이 울며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린 친구들이다. 나는 최소한 그 친구들의 진실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그의 고통을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욥에 대하여 항변을 시작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고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으며 모든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둘째, 욥의 친구들의 반론을 보면 그 모든 것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도 그의 친구가 한 말이다. 물론 그 친구들의 말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고난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그의 피조물이고 그가 원하시면 그는 그의 의지대로 하실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일에 대하여 항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옳고 그르다고는 판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내가 나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하나님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은 아니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과 인간은 많은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그 내용을 자랑하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로 인하여 욥이 고난을 받을 때 욥이 그을 그냥 가만히 내 버려두기를 기도한 사실이 있지만 말입니다.
넷째, 욥은 처음에 온 환난에서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였지만, 두 번째 육체의 고통에서는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가 비록 자기의 현재 처한 상황이 하도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한 것 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하나님이 하시고자하면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것을 행하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계속하여 구하고 있다.
다섯째, 우리는 대부분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욥의 친구들의 접근에서도 볼 수 있고 그 원천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명기 28장에는 축복과 저주의 근원이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만사가 ‘인과응보’에 의해서만 되지 않음을 욥의 경우와 전도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라는 또 다른 것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인과응보’ 와 ‘섭리’는 다른 선을 그으며 인생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선은 같은 평면에서 존재하는 선이 아니라 다른 평면인 공간에서 존재하는 선이라 생각한다. 즉 우리의 옆에 존재하는 선이 이니라 우리의 위에 존재하는 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이유를 우리의 옆을 보면서 찾으려 한다면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옆 보다 위를 쳐다보면 그 이유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섭리’의 선은 ‘인과응보’ 의 선 위에서 평행선을 그으면서 가기 때문에 우리가 위를 본다면 현재의 고난에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는가?
- 욥의 친구들이 최초에는 욥을 진정으로 위로 하려고 하였는데 그 후에는 욥에게 반론을 제기 하였다는 것
- 욥의 친구들이 한 이야기가 틀리지 않다는 것
-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다가 사탄의 계략에 넘어가 욥에게 고난을 준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사실
-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던 욥이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은 말을 한다는 점
- 인과응보와 섭리와의 관계
욥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를 전제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의견과 상관없이 그분의 뜻대로 하신다는 사실
-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지 않으면 진정한 조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항상 공평하지만은 않다는 사실
이러한 가정 하에 제기된 문제점을 하나씩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첫째, 욥의 친구들은 욥의 불행한 소식을 듣고 멀리서 욥을 위로하려고 찾아왔다. 그리고 욥의 처지를 직면하고 일주일 동안 같이 울며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린 친구들이다. 나는 최소한 그 친구들의 진실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그의 고통을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욥에 대하여 항변을 시작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고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으며 모든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둘째, 욥의 친구들의 반론을 보면 그 모든 것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도 그의 친구가 한 말이다. 물론 그 친구들의 말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고난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그의 피조물이고 그가 원하시면 그는 그의 의지대로 하실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일에 대하여 항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옳고 그르다고는 판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내가 나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하나님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은 아니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과 인간은 많은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그 내용을 자랑하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실로 인하여 욥이 고난을 받을 때 욥이 그을 그냥 가만히 내 버려두기를 기도한 사실이 있지만 말입니다.
넷째, 욥은 처음에 온 환난에서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였지만, 두 번째 육체의 고통에서는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가 비록 자기의 현재 처한 상황이 하도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한 것 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하나님이 하시고자하면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것을 행하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은 말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계속하여 구하고 있다.
다섯째, 우리는 대부분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욥의 친구들의 접근에서도 볼 수 있고 그 원천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명기 28장에는 축복과 저주의 근원이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만사가 ‘인과응보’에 의해서만 되지 않음을 욥의 경우와 전도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라는 또 다른 것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인과응보’ 와 ‘섭리’는 다른 선을 그으며 인생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선은 같은 평면에서 존재하는 선이 아니라 다른 평면인 공간에서 존재하는 선이라 생각한다. 즉 우리의 옆에 존재하는 선이 이니라 우리의 위에 존재하는 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이유를 우리의 옆을 보면서 찾으려 한다면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옆 보다 위를 쳐다보면 그 이유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섭리’의 선은 ‘인과응보’ 의 선 위에서 평행선을 그으면서 가기 때문에 우리가 위를 본다면 현재의 고난에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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