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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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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칼럼] 민족을 향한 애가(哀歌)

성현경
2006.01.25 10:58 1,131 0

본문

이천년간 나라를 잃었던 유대인의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맨발로 유리잔 두 개를 깬다. 영화’쉰들러리스트’를 보면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유리잔이 없으니까 대신 전구를 발로 깬다. 그 깨진 유리잔은 구약시대에 바벨론에 의해서 그리고 신약시대에 로마제국에 의해서 두번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추억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 가운데 가장 행복한 날에 민족의 가장 슬펐던 날을 애도하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에 민족의 불행을 잊지 않는 민족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일본제국의 식민통치하에서 조국의 교회는 3.1운동과 같은 민족을 향한 멧세지와 행동이 있었다. 6.25동란 중에도 교회는 그렇게 순교자를 낳았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민족을 향한 사명과 책임이 약한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축복과 특권이 더 강조되는 것 같다. 교회들은 일제와 6.25동란 때보다 수없이 많아졌지만 교회가 더 늘어난다고 사회 전영역에서 일어나는 부패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일제와 공산치하의 한국교회에서는 주기철목사님과 손양원목사님을 교회 안에서 뵐 수 있었는데 2000년대의 한국교회는 최춘선 할아버지를 지하철에서나 뵐 수가 있다.

이천년대의 한국교회는 성경에서 바울서신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성장에만 관심을 갖는 듯 하다. 만약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교회를 세우셨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던 갈릴리 주변에 수천명 단위의 대형교회들을 세울 수 있었을텐데….. 바울서신의 주님은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지만 복음서의 주님은 구원받는 이들을 그들이 사는 마을에 남겨놓으셨다. 예수를 따르는 그들로 교회를 위한 신자를 만들기 전에, 그들이 사는 세상에 필요한 신자로 만드셨다. 복음서는 성전과 예배를 위한 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신자를 만든다. 복음서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마태복음에만 단 3번 나온다. 네 복음서에서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한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들에게 사도행전에서의 교회성장은 결과였고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로마제국이 집정관을 파견하여 조사할 만큼 그리고 유대민족이 시기할 만큼, 그들의 삶 가운데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었다.
그런데 이 상태로는 한국교회가 더 늘어난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한민족가운데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이천년대의 한국교회에는 비바람에도 변함이 없는 혜란강의 일송정 푸른솔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벌레많은 무궁화가 자라는 것같다.
늘어나는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에게 보여지기를 같은 기업의 계열회사가 아니라 같은 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경쟁업체인 것 같다. 민족을 향한 책임보다는 개인과 개교회에 부어진 특권을 더 간증하는 것 같다. 교회 성장으로 인한 축가(Celebration)를 부르기보다 민족을 향한 애가(Lamentation)를 부를 때인 것 같다.

탈북자들은 민족의 슬픔이다. 그들을 신고해서 금전을 바라는 조선족은 민족의 아픔이다. 탈북자선교를 경쟁하며 연합되지 못하는 것은 민족의 괴로움이다. 체포되는 탈북자들은 코를 철사로 꿰어 끌려가다가 코를 찣어버리고 도망을 가서 그 후엔 목구멍을 뚫어 입으로 철사줄을 묶어 다시 북으로 데리고 간다고 목격자들은 전해주고 있다. 탈북아이들이 체포되어 다시 돌아가서는 학교 교정에서 장작 위에 묶어 화형을 시키는데 그 어머니에게 불을 붙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면 함께 태웠다고 한다. 탈북자들 가운데 북한의 국가보위부요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

한민족을 위한 예레미야의 눈물과 애가는 어디에 있는가.
교회의 행복 가운데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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