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칼럼] 세상은 공평한가?
김진수
2006.07.2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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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이를 조금씩 먹어감에 따라 생각도 바꾸어 지는것 같습니다.
저는 젊었을 30십대 만 해도 세상은 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맺으며,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매일 15시간씩 일했으며, 그 결과로 봉급도 2만 5천불에서 시작한 것이 4년 만에 8만 불로 늘어나더군요. 그러면서 가난하고 봉급을 제대로 못 받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에 하나는 잠언의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40십대가 들어서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업을 시작하면서 부터 생각이 조금씩 바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사업이 잘 나갈 때는 몰랐는데 사업의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서 이 공평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콩을 심은 데서 팥이 나지는 않지만, 심은 콩이 장마나 병충해로 결실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시기와 우연’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성경의 전도서에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말씀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시기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지금의 이 조그마한 성공이 나의 노력의 결과인가?
혼자 시작한 회사가 한명에서 열명이 되는 데는 개인의 노력이 절대적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0명에서 100명으로 되는 데는 이 ‘시기와 우연(행운 또는 축복)’ 이 절대적인 요소가 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악인이 형통함일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라고 말을 하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 세상이 정말로 공평하다면, 그리하여 악을 행한 자에게 징벌이 곧바로 내려진다고 생각합시다.
그러한 세상이 당신은 천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소한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잘못에 대하여 기다림 없이 곧바로 징계한다면 저는 불안하여 이 세상을 제대로 살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알게 모르게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징벌이 미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의로운 행위의 보상도 연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당분간의 불공평을 저는 원합니다.
그러나 가치를 ‘보이는 것과 현재의 것’에 제한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과 미래의 것’으로 바꾸어 본다면, 이 공평의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에서 보면 ‘세상은 공평하다’ 라고 말 할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젊었을 30십대 만 해도 세상은 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맺으며,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매일 15시간씩 일했으며, 그 결과로 봉급도 2만 5천불에서 시작한 것이 4년 만에 8만 불로 늘어나더군요. 그러면서 가난하고 봉급을 제대로 못 받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에 하나는 잠언의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40십대가 들어서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업을 시작하면서 부터 생각이 조금씩 바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사업이 잘 나갈 때는 몰랐는데 사업의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서 이 공평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콩을 심은 데서 팥이 나지는 않지만, 심은 콩이 장마나 병충해로 결실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시기와 우연’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성경의 전도서에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말씀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시기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지금의 이 조그마한 성공이 나의 노력의 결과인가?
혼자 시작한 회사가 한명에서 열명이 되는 데는 개인의 노력이 절대적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0명에서 100명으로 되는 데는 이 ‘시기와 우연(행운 또는 축복)’ 이 절대적인 요소가 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악인이 형통함일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라고 말을 하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봅시다. 만약 세상이 정말로 공평하다면, 그리하여 악을 행한 자에게 징벌이 곧바로 내려진다고 생각합시다.
그러한 세상이 당신은 천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소한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잘못에 대하여 기다림 없이 곧바로 징계한다면 저는 불안하여 이 세상을 제대로 살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알게 모르게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징벌이 미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의로운 행위의 보상도 연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당분간의 불공평을 저는 원합니다.
그러나 가치를 ‘보이는 것과 현재의 것’에 제한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과 미래의 것’으로 바꾸어 본다면, 이 공평의 문제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에서 보면 ‘세상은 공평하다’ 라고 말 할수 있지 않을까요?
댓글목록 2
장용석님의 댓글
고행을 해서 해탈을 하라든지,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만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br />
우리는 벌써 포기하고 말았을 것 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면 영생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br />
은혜의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은혜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 약속이 너무 놀라워서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br />
착각하고 힘들어 할때가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분명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습니다. <br />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현세의 물질적 복만 바라는 '값싼 은혜'에 집착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br />
그리고 귀한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세상과 구분된 삶(거룩)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br />
두 분 선배님 덕분에 다시 한번 받은 은혜를 생각해 보며 감사의 마음을 갖게됩니다.
박명근님의 댓글
즉 인간의 관점과 절대자(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세상에서 받는 복이 축복일 수 도 있고 저주 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br />
세상은 어차피 세상임금이 불법으로 와서 돈으로 통치한다고 성경에서 이미 밝히고 있습니다<br />
이 세상의 잘되고 못되는 것이 하늘 나라에 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br />
<br />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에<br />
이 생애에서의 업에 대한 판단은 공평하리라 믿습니다<br />
육을 가진 세상은 불공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br />
이미 말씀 속에서 수 없이 이 문제를 언급하고 계십니다<br />
<br />
오직 저 영원한 나라에 대한 인치심을 받는 일이 저의 생애 목표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b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