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칼럼] <추억여행>남성 컴플렉스(5회)
김시우
2007.02.2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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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동업자의 불법행위로 법정 구속이 되어 그가 회사의 이름으로 보증을 선 것에 대한 책임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설상가상 내가 보증을 선 부평의 동서의 백화점 건설사업도 부도가 나서 수십억의 보증빚을
떠 앉게 되었다. 동업과 보증을 서지 말라는 말을 귀 따갑게 들어왔지만 그 상황이 닥치면 피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 사업시작할 때 아내의 이름으로 구입하여 놓은 부동산과 회사 전성기때 가족명읠 구입한 부동산들은
건질 수 있었지만 회사는 문을 내려야 했다. 그 즈음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형을 나무랐다. 나 때문에 형이 스스로 목을 메었을 거라는 죄책감으로 밤새 울며 술을 마셨다.
1년 동안 형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잤다. 이후 나 역시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어졌다. 내가 이렇게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내에게 미국에 있는 친적의 집에 휴가를 갔다 오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하고 형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루 빨리 엄마와 형 곁에 가고 싶었다. 몇 군데 약국을 돌아
수면제를 수집하여 입안에 한움큼 집어넣고 소주를 들이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가 문을 부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속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머리가 깨지는 듯 하였다.
입에서는 아직도 끈적 끈적한 침이 흘러 턱을 통해 떨어지고 있었고, 소주병과 약병등이 널려있는 방바닥에는
내가 무의중에 토해낸 토사물이 있었다.
그 무의식적인 구토가 나를 살렸던 것이다. 내 차가 집앞에 주차가 되어있고 이틀 동안 방에는 불이 켜있는데
나와 연락이 닿지않자 누나가 의뢰한 열쇠공이 자물쇠를 열지못하였고, 결국 119 요원들이 전동톱으로 문을 부수며
그 뒤를 누나가 사색을 하고 따라붙으며 통곡을 했다.
난 지금도 아무리 죽고 싶어도 누나가 보내는 메일때문에 못 죽는다. 그 문구중 하나가 ‘ 너 잘못되면 나도 살아갈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다. 일종의 협박이다. 나는 아직도 가족이라는 이름의 족쇄에 묶여 나를 내 마음대로 못한다.
어려서 부터 병약한 누나는 건강때문에 출가도 못했다. 미국에 올 때도 누나가 제일 맘에 걸렸다.
1년 여전 돈을 좀 마련하여 인천 남동구에 토지를 매입하여 누나가 하고 싶어하는 복지원 개원을 도왔다.
아무리 설득을 하여도 ‘이 불쌍한 사람들을 두고 내가 어떻게 미국에 가겠냐, 며 사양하는 누나,
내가 자주 한국을 돌아보는 이유중 하나이다.
지금도 내가 너무 힘들때면 누나가 ‘어제 꿈자리가 뒤숭숭 하더라 ’ 하면서 전화를 한다. 참 신통하다.
이럴 때 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아내는 자리부터 피한다. 그러면 그녀가 가족을 등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위하여 가족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사는 양다리 어정뜨기 인생, 그렇게 나의 40대는 줄달음치고 있었다. (6회로 이어집니다.)
나에게 돌아왔다. 설상가상 내가 보증을 선 부평의 동서의 백화점 건설사업도 부도가 나서 수십억의 보증빚을
떠 앉게 되었다. 동업과 보증을 서지 말라는 말을 귀 따갑게 들어왔지만 그 상황이 닥치면 피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 사업시작할 때 아내의 이름으로 구입하여 놓은 부동산과 회사 전성기때 가족명읠 구입한 부동산들은
건질 수 있었지만 회사는 문을 내려야 했다. 그 즈음 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형을 나무랐다. 나 때문에 형이 스스로 목을 메었을 거라는 죄책감으로 밤새 울며 술을 마셨다.
1년 동안 형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잤다. 이후 나 역시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어졌다. 내가 이렇게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내에게 미국에 있는 친적의 집에 휴가를 갔다 오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하고 형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루 빨리 엄마와 형 곁에 가고 싶었다. 몇 군데 약국을 돌아
수면제를 수집하여 입안에 한움큼 집어넣고 소주를 들이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가 문을 부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속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머리가 깨지는 듯 하였다.
입에서는 아직도 끈적 끈적한 침이 흘러 턱을 통해 떨어지고 있었고, 소주병과 약병등이 널려있는 방바닥에는
내가 무의중에 토해낸 토사물이 있었다.
그 무의식적인 구토가 나를 살렸던 것이다. 내 차가 집앞에 주차가 되어있고 이틀 동안 방에는 불이 켜있는데
나와 연락이 닿지않자 누나가 의뢰한 열쇠공이 자물쇠를 열지못하였고, 결국 119 요원들이 전동톱으로 문을 부수며
그 뒤를 누나가 사색을 하고 따라붙으며 통곡을 했다.
난 지금도 아무리 죽고 싶어도 누나가 보내는 메일때문에 못 죽는다. 그 문구중 하나가 ‘ 너 잘못되면 나도 살아갈
이유가 없다.’ 라는 것이다. 일종의 협박이다. 나는 아직도 가족이라는 이름의 족쇄에 묶여 나를 내 마음대로 못한다.
어려서 부터 병약한 누나는 건강때문에 출가도 못했다. 미국에 올 때도 누나가 제일 맘에 걸렸다.
1년 여전 돈을 좀 마련하여 인천 남동구에 토지를 매입하여 누나가 하고 싶어하는 복지원 개원을 도왔다.
아무리 설득을 하여도 ‘이 불쌍한 사람들을 두고 내가 어떻게 미국에 가겠냐, 며 사양하는 누나,
내가 자주 한국을 돌아보는 이유중 하나이다.
지금도 내가 너무 힘들때면 누나가 ‘어제 꿈자리가 뒤숭숭 하더라 ’ 하면서 전화를 한다. 참 신통하다.
이럴 때 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아내는 자리부터 피한다. 그러면 그녀가 가족을 등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위하여 가족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사는 양다리 어정뜨기 인생, 그렇게 나의 40대는 줄달음치고 있었다. (6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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