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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동문칼럼] <추억여행>남성 컴플렉스(4회)

김시우
2007.02.28 16:34 1,970 1

본문

덧없는 시간은 또 다시 멈추지 않고 흘러  나는 대위로 진급하여 촉망받는 초급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여단 창설 기념 체육대회를 앞두고  나는 퇴근도 하지 않고  전 중대원을 불러모아  ‘군인은 전쟁때 한 번 싸우다
죽는 것이지만,  평시에는 체육대회에서 싸우다  죽는다, 평시에 부대의 전력은 오로지 체육대회를 통해서 증명할 수
있다.’  고  일장연설을 한 후 취침 점호전까지 연습을 독려했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대대 참모급 이상 참석한 멧돼지 바케큐가 돌아가는 여단장 관사의 정원에서 나는 군악단의
트럼펫을  빌려 'Plaisir l'mour' 를 연주했다. 여단장께서 체육대회 우승 부대 지휘관을 찾으며 내게 잔을 주시더니
'노래 일발 장전' 하셨으나 체육대회때 소리를 하도 많이 질러 목이 쉬어 트럼펫을 불겠다고 했던 것이다. 

삼성 장군 군단장이 참석하자 많은  군단예하 부대 장군들이 참석한 연회에 나는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장군들은 나중에 지휘관 보직을 받게되면 기억에 남는 위관급 지휘관을 수행장교로 불러들인다. 자연히 고관과 같이
움직이다 보면 많은 고관을 알게되어 장군의 길로 들어서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그 동안 덩달아 퇴근을 못했던 중대간부들의 원성을 듣기도 하였지만 결국 우승을 하여 중대원들 전부를 순차로
휴가를 보내주겠다는 여단장의 약속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중대원들을 소집하여 이 소식을 전하자  중대원들이
우르르  연단으로 몰려와 나를 끌어내리더니  헹가레를 쳤다.

10년뒤  전차 대대장,  15년뒤 전차 여단장, 20년뒤  기갑 군단장으로  향하는  나의 행보는 예상치 못한 부상으로  
중단되었다. 국군통합병원에서 퇴원하여 자대에서 전역신고를 하고 인천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허탈감이 오랜동안  지속되었다.  술과  여자와 더불어 살았다. 그렇지만 기업에  입사하여 나름대로
업무에는 열중했다.  비교적 업무실적이 좋았고  군대에서 몰랐던 돈 맛도 알게 되었다.  

가까운 가족이 두명이나 나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는 경험을 한 나는 죽음이 그리 멀리만 느껴지지 않았다.  
책상서랍에는 항상 사직서와 유언장이 각각 편지봉투에 접혀들어가 있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가 신조가
된 셈이다. 백이면 백, 모두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안정된 월급쟁이가 감질나서 때려치고 지인과 더불어 사업에
착수했다. 당당히 사직서를 총무부장에게 제출하고 책상을 정리하는 나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스스로 남자답다고 착각했다.  

대기업이 사들인 아파트 사업단지의 필요없는 자투리 땅을 다시 헐값에 사들여 그 아파트 단지에 없는 상가를 지어
분양했다. 아파트 상가에는 유흥주점이 들어설 수없지만 내 상가는 그런 제한이 없다.  남보다 같아서는 사는게
재미없는 나의 성격은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잉여자산은 김포의 준농림지를 사들여 아파트 사업으로 발전시켜
2년 반 만에 수 십억대의 자산을 가진 회사로 키웠다.

김포고등학교 운동회에 지역유지들이 앉는 텐트에 내 명패도 있었다. 옆에 있던 면장 등 나이 드신 분들이 젊은
나를 힐끔거렸다. 찾아온  옛 직장동료의  부러운 시선을 즐기며 룸싸롱에서 고급술을  접대했다.  
나의 오만과 아집의 30대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5회로 이어집니다.)

댓글목록 1

김시우님의 댓글

김시우 2007.03.18 02:24
  <br />
  젊음과 노련미가 어우러진 30대, 동문들은 어떻게 보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