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칼럼] <추억여행>남성 컴플렉스(2회)
김시우
2007.02.2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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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초등학교 5학년 때 탁구에 관심을 가졌다. 학교의 복도 게시판에는 정현숙과 이에리사의 세계제패 기사가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동네 어디에나 탁구장이 하나씩 있었다. 탁구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탁구부를 채 1달이 되지 않아 그만 두었다. 그 해에 이웃 동네 논밭에 물을 얼려 스케이트장이 개장하자
아버지가 스케이트를 사오셨다.
스케이트를 타고 이리 넘어 지고 저리 넘어지다가 지쳐서 오뎅 한 꼬치를 들고 논둑에 앉아있는데, 수 명의 아이들이
한 어른의 구령에 맞추어 스케이트도 신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얼음을 지치는 자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 뒤 그 부류에 합류하였고 다음 해 인천시 국민학교 스케이트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
김대건 신부가 설립하신 대건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운동보다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것 같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거대한 건물이 있었는데 성당이었다. 나는 성당에 붙어있는 도서실에서 밤 10시 넘어서 까지
공부를 하고 10번 버스 막차를 타고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가끔 아버지가 관용차를 타시고 지나는 길에 태워준 기억도 나지만 중학교 때는 학교, 도서관 그리고 트럼펫 밖에
생각이 안난다.
그날도 밤 늦도록 공부를 하다가 잠시 밖에 나와 찬 공기를 쐬고 있는데 별빛이 영롱한 밤하늘에 트럼펫 연주,
'La Mer' 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의 발 걸음은 그 소리를 따라 움직여 반쯤 열린 음악실 창문을 통해 고등학교 형이
트럼펫 연주에 홀로 심취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오스트리아 관현악단 트럼펫 주자로 유럽에서는 유명한 나의 영웅이다. 그가 이미 고등학교때 트럼펫
독주를 하면 사람들이 입을 벌려 서로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트럼펫의 일부음은 피스톤을 누르지 않고 입술의 모양과
피스라는 곳을 통하여 불어넣는 바람의 양및 강도를 조절하여 음을 바꾸어 소리를 낸다. 예를 들면 "도-미-솔" 과
"파- 시" 등이 그것이다.
그가 평음 "도" 에서 다음 옥타브 "솔" 이 많이 들어있는 곡을 연주하면서 마치 하늘과 땅을 오가는 음을 내면 '저게
트럼펫 소리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윗 입술 바로 위, 인중 끝의 라인의 모양이
약간 뭉게져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치감치 오스트리아 음대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갔지만 음악에만
열중할 뿐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진짜 강한 남자이다.
어느덧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밴드부였다. 단원을 모집하는 학교 게시판을 보고 찾아갔더니
힘 꽤나 써보이고 껄렁 껄렁한 친구들이 적성검사를 받고 있었다. 대부분이 트럼펫과 섹소폰을 지원했다. 그런데
트럼펫 소리를 낸 사람은 나 혼자였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자신의 연주를 훔쳐보는 나에게 소리를 내는 요령을
가르쳐준 그 고등학교 형님의 덕분이었다.
트럼펫은 배힘으로 분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가장 바람을 불어넣기 힘든 악기이지만 오로지
3개 밖에 없는 피스톤으로 16음계 이상을 소리내는 요령과 기술, 음감이 절대적 으로 필요한 매력있는 악기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하나 남은 트럼펫을 졸업하는 선배한테 물려받았다.
음대와 일반대학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K 대학 기악과에 입학하여 음악인으로서 첫발을 내딪었다.
아버지와 나를 지원하는 어머니는 자주 다투셨다. 나는 어리고 약한 마음에 고지식한 관료인 아버지의 곱지 못한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자퇴하였다.
경찰간부였던 아버지는 내가 전혀 관심이 없던 법조인이나 외교관이 되기 바라셨다.
결론적인 얘기지만 아버지 말을 따랐으면 행복지수에는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나의 20대는 이렇게 방황하며 막을 올렸다.(3회로 이어집니다.)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동네 어디에나 탁구장이 하나씩 있었다. 탁구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탁구부를 채 1달이 되지 않아 그만 두었다. 그 해에 이웃 동네 논밭에 물을 얼려 스케이트장이 개장하자
아버지가 스케이트를 사오셨다.
스케이트를 타고 이리 넘어 지고 저리 넘어지다가 지쳐서 오뎅 한 꼬치를 들고 논둑에 앉아있는데, 수 명의 아이들이
한 어른의 구령에 맞추어 스케이트도 신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얼음을 지치는 자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 뒤 그 부류에 합류하였고 다음 해 인천시 국민학교 스케이트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
김대건 신부가 설립하신 대건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운동보다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것 같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거대한 건물이 있었는데 성당이었다. 나는 성당에 붙어있는 도서실에서 밤 10시 넘어서 까지
공부를 하고 10번 버스 막차를 타고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가끔 아버지가 관용차를 타시고 지나는 길에 태워준 기억도 나지만 중학교 때는 학교, 도서관 그리고 트럼펫 밖에
생각이 안난다.
그날도 밤 늦도록 공부를 하다가 잠시 밖에 나와 찬 공기를 쐬고 있는데 별빛이 영롱한 밤하늘에 트럼펫 연주,
'La Mer' 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의 발 걸음은 그 소리를 따라 움직여 반쯤 열린 음악실 창문을 통해 고등학교 형이
트럼펫 연주에 홀로 심취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오스트리아 관현악단 트럼펫 주자로 유럽에서는 유명한 나의 영웅이다. 그가 이미 고등학교때 트럼펫
독주를 하면 사람들이 입을 벌려 서로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트럼펫의 일부음은 피스톤을 누르지 않고 입술의 모양과
피스라는 곳을 통하여 불어넣는 바람의 양및 강도를 조절하여 음을 바꾸어 소리를 낸다. 예를 들면 "도-미-솔" 과
"파- 시" 등이 그것이다.
그가 평음 "도" 에서 다음 옥타브 "솔" 이 많이 들어있는 곡을 연주하면서 마치 하늘과 땅을 오가는 음을 내면 '저게
트럼펫 소리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윗 입술 바로 위, 인중 끝의 라인의 모양이
약간 뭉게져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치감치 오스트리아 음대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갔지만 음악에만
열중할 뿐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진짜 강한 남자이다.
어느덧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밴드부였다. 단원을 모집하는 학교 게시판을 보고 찾아갔더니
힘 꽤나 써보이고 껄렁 껄렁한 친구들이 적성검사를 받고 있었다. 대부분이 트럼펫과 섹소폰을 지원했다. 그런데
트럼펫 소리를 낸 사람은 나 혼자였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자신의 연주를 훔쳐보는 나에게 소리를 내는 요령을
가르쳐준 그 고등학교 형님의 덕분이었다.
트럼펫은 배힘으로 분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가장 바람을 불어넣기 힘든 악기이지만 오로지
3개 밖에 없는 피스톤으로 16음계 이상을 소리내는 요령과 기술, 음감이 절대적 으로 필요한 매력있는 악기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하나 남은 트럼펫을 졸업하는 선배한테 물려받았다.
음대와 일반대학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K 대학 기악과에 입학하여 음악인으로서 첫발을 내딪었다.
아버지와 나를 지원하는 어머니는 자주 다투셨다. 나는 어리고 약한 마음에 고지식한 관료인 아버지의 곱지 못한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자퇴하였다.
경찰간부였던 아버지는 내가 전혀 관심이 없던 법조인이나 외교관이 되기 바라셨다.
결론적인 얘기지만 아버지 말을 따랐으면 행복지수에는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나의 20대는 이렇게 방황하며 막을 올렸다.(3회로 이어집니다.)
댓글목록 1
김시우님의 댓글
3회에 가시면 우리 젊은 날의 낭만의 캠퍼스의 푸른 잔디를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