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 여정 46회
김시우
2008.01.0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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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떠나세요, 그리고 다신 내 눈에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지 마세요! ”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탄식이 순식간에 달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늘을 향했던 희정의 초점은 정면으로 떨어졌고 달수도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지었다. 이미 엎지러진 물을 어쩌겠냐는 마음이었는지 달수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악 다문 입술을 재차 열었다.
“ 그래요… 부질없는 짓인 줄 알아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자… 이제 각자 갈 길로 가야겠죠.”
달수가 먼저 앞장을 섰고 잠시 주춤했던 희정이 잔디에 발을 끌며 달수의 뒤를 따랐다. 캠퍼스를 모두 가로질러 대학 정문에 다다를 때 까지 달수와 희정은 말이 없다. 둘은 거리를 두고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거기 누구야? ”
대학 정문에 다다르자 손전등을 비추며 경비원이 소리치자 늦여름 풀벌레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캠퍼스의 침묵은 깨졌다. 경비원이 가까이 다가오고 손전등의 빛이 더욱 강해지자 달수가 손을 들어 부신 눈을 막았고, 희정은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한 얼굴 빛을 띠며 몇 걸음 앞서가는 달수를 따라잡아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교정에 남아있는 거야… 어? 가만… 학생 같진 않고… 교수님이십니까? ”
“ 예 그런 셈이죠? 그렇죠 이 희정 교수님? 같이 연구할 게 밀려서…허허…”
달수의 너스레에 희정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달수의 ‘아’도 아니고 ‘어’도 아닌 야릇한 답변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경비원이 돌아서 정문으로 향해 걸어가 쪽문을 열었다. 달수는 그렇게 침 넘기는 소리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늦 여름 밤의 적막함을, 갑자기 들이닥친 소나기가 지붕을 때리는 듯한 분위기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바꾸었다. 숨 넘어갈 듯 한 다급함에는 오히려 구두 끈을 한 번 더 묶는 달수의 재치와 여유는 동찬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 안녕히 가십시오, 교수님…”
배웅을 하면서도 뒷머리를 극적거리고 고개를 꺄우뚱하는 경비원을 인사를 받자, 입가에 웃슴 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교정을 빠져나온 달수와 희정의 앞에는 캠퍼스와는 다른 번잡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고, 그 둘 사이에 흐르던 기류는 갑자기 사라지고 조금 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그들의 행동거지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도로변에 나란히 선 두사람은 또 다시 침묵을 유지한 채 택시를 기다렸다. 그들이 그렇게 좌우를 살피는 몸짓은 택시를 쫓는 행동이 아니라 정작 어색한 시간을 버티려는 몸짓이리라. 달수는 이순간을 그냥 말없이 흘려 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정도로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 순간을 잡아 묶어두지도 못했다.
택시가 그 둘의 앞에 멈춰 섰다. 달수가 희정을 위해 택시 문을 열어 젖기며 희정의 승차를 돕는데 희정이 택시에 오르지 않고 주춤하며 말했다.
“ 이 쪽 방향이 아녜요.”
“ 그 쪽으로 가면 주안역을 경유해서 서울로 가는 방향 맞아요.”
“ 저 오늘… 서울 안가요. 이번 주말은 화수동 집에서 지낼 거예요.”
“ 손님! 차 돌리면 되죠. 빨리 타세요. 바람이 많이 부네요. 어서요!”
아스팔트 도로와 턱진 인도 사이에 쌓여있는 먼지와 낙엽이 송도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다 바람에 섞여 택시 안으로 들이치자 택시 기사가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그들이 헤어져 각 각 다른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택시 기사가 알 리 없었다.
“ 손님 뭐 하세요. 빨리 타시라니까요.”
택시 뒷 자리에 나란히 앉은 달수와 희정은 또 다시 말이 없다. 택시 기사도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룸 밀러로 둘을 번갈아 보면서 씨익 웃더니 분위기를 띄웠다.
“ 늘 이 시간엔 대학 정문은 폐쇄가 되어 손님이 없는데 오늘 제가 재수가 좋은 모양입니다. 조~기 앞에서 손님을 내리고 곧 바로 손님을 받았으니 말이죠, 근데 서울 분이신 가봐요? ”
달수와 희정이 대답이 없자 운전기사는 분위기 띄우기 작전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달수와 희정의 관계를 자기 멋대로 해석하며 푼수 끼를 섞은 말투의 언성을 높였다.
“ 요즘 애인이라는 드라마 있잖아요? 유동근하고 황신혜가 나오는… 그 드라마 영향때문에 유부남 유부녀들 애인 갖는 게 대유행이래요. 아, 난 언제나 이 운짱 때려치고 그렇게 살아보나…쓰브럴…사납금 채우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는 이 팔자... 그건 그렇고 저기 손님들! 인천에 오셨으면 월미도에서 회를 먹고 바다를 구경하는 것이 최고죠, 그리로 모실까요?”
택시기사 입장에서는 인천의 끝자락까지 운행하는 것이 요금을 많이 받아내는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겠지만, 달수와 희정은 그의 말 끝에 어떤 교감이라도 이루어진 듯 서로를 본능적으로 힐끗 바라보았다.
“ 희정씨, 서울 가시지 않을 거면…”
“……”
달수가 말끝을 흐리고 머뭇거리면서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희정의 눈치를 살폈다. 또 한번 달수의 추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면 그것보다 멍청한 짓은 없다라는 것이 달수가 직원들에게 자주 쓰는 말이다.
“ 기사 아저씨 월미도에 진입해서 영창 피아노 공장 조금 더 들어가면 청해 횟집이라고 있었는데 아직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로 가 주세요.”
“아, 아녜요, 달수씨, 그냥 제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차 한 잔하고 헤어져요. 아마 희철이도 지금쯤 집에 와 있을 거예요.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는 거니까 그렇게 오래 지체할 수 없어요. 아저씨! 하인천 역 앞에서 세워주시면 돼요.”
속초에서 허름한 구멍가게를 하던 희정의 작은 아버지가 희정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 희철이 사법시험에 합격 후, 사법연수원과 낙민 공원을 사이에 두고 있는 롯데 아파트에 입주한 이후로 홀로 화수동 집을 지키고 있었다. 희정의 작은 아버지는 유일한 집안 어른으로 희정이 달수가 근무하는 부대를 찾아 속초에 갔을 때, 달수가 수연과 다정히 걸어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후 절망의 그림자를 안고 찾아갔던 사람이었다.
그 때 해녀로 생계로 꾸리던 작은 어머니가 오래 전 잠수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후 희정이 작은 아버지를 인천으로 모셨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제사를 일일히 챙길 수 없지만 명절이 되면 그 집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희정은 새해에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불어터진 떡국조차 한 그릇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동찬이 찾아가는 신년행사와 사교 모임에 반드시 따라 나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 그럼 동찬이도?…”
“ 아니요, 지금쯤 제주도에 있을 거예요, 내일 제주 관광단지 개발 컨소시엄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저녁 비행기로 떠난다고 했어요. 월요일이나 되서야 돌아올 거예요.”
“ 늘 같이 다니시잖아요? 근데 누가?... “
“ 박실장요, 박실장이 같이 갈 거예요.”
“ 박실장? 박 준위 말인가요?…희정씨하고 만나기로 한 카페입구에서 그 사람하고 만났어요. 그 사람이 박실장 맞군요. ”
희정이 두 차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룸 밀러로 힐끔거리는 운전사를 의식한 듯 나지막하고 조심스럽게 그에 대해 말했다. 달수는 그제서야 박 실장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박실장은 현재 동찬의 회사에서 일한다고 희정이 말했다. 그런데 희정의 말을 들어보니 박 실장은 동찬의 회사가 아닌 동찬을 위해 일한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찬의 편대가 동해상 초계 비행할 때 동찬은 전투기 유압계의 바늘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편대장에게 보고하자, 편대장은 동찬에게 전투기가 엔진 정지하면 전투기를 버리고 비상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동찬은 엔진이 정지되기 직전에 자대로 무사히 복귀하였고 그는 그 일로 십년 감수했지만 동찬은 끝까지 전투기를 버리지 않은 영웅이 되었다.
반 면 박 준위는 정비 불량의 책임으로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동찬은 박 준위가 전투기 정비시 일부 모세혈관 같은 복잡한 오일 배관 중 하나를 제대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전투기 조종단 감사 결과를 제일 먼저 입수했다. 그리고 직접 감사 책임자를 찾아가 그것이 박 준위의 실수가 아닌 불가항력적인 사고로 상부에 보고케 부탁하고 그 사실을 덮어 넘겼다. 동찬이 박 준위의 아내가 혈액암으로 투병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감사단장은 직접 피해자인 동찬이 부하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찬이 박 준위가 행정관으로 전보 조치되면 그가 정비사 수당을 받지 못해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을 배려한 이런 인연으로 박 준위는 동찬을 생명의 은인으로 받들었고 동찬의 비행기는 동찬이 불의를 사고를 당할 때 까지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했고 박 준위는 편대장 전투기 보다 동찬의 전투기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편대방이 자신의 전투기보다 동찬의 전투기가 더 광이 난다고 시기의 눈초리를 보낸 적도 있었다. 한 편 군복 벗을 것을 각오하고 동찬의 부탁을 들어준 정비 감사단장은 지금 동찬 회사의 전무가 되어있었다. 동찬은 이렇게 결초보은해서라도 은혜를 갚는 사람이고 그의 두터운 의리는 그가 신체적 결함으로 제대로 능력발휘를 할 수 없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부족함을 채우고도 넘쳐났다.
“ 동찬씨가 박 준위에게 전역을 권유하고 회사에 입사 시켰어요. 매우 성실하고 우직한 분이라 충성심도 대단한 분이예요. 달수씨가 옆 집을 사들여 박 준위가 거주할 수 있도록 했어요. 박 준위 아니, 박실장은 달수씨가 잠 드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잠자리에 들 정도니까요. 제가 할 일이 많이 줄었어요. 그래서 강단에 좀 더 많이 오를 수 있었고 오늘도 이렇게 시간을 낼 수가 있던 거 였고…이렇게 식구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동찬씨와 결혼하고 처음이예요.”
달수는 그렇게 말하는 희정의 얼굴에 왠지 새장에 갖힌 하얀 색 카나리아의 슬픈 눈빛을 읽었다. 사실 희정은 동찬과 함께 한 날부터 한 순간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동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의 손과 발이 되어 하루 24시간 그의 곁에서 그의 신체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그녀가 모두 감당해야 했었다.
그런 희정을 위해 동찬이 박 정비관을 스카우트했던 것이다. 희정을 좀 더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동찬의 생각으로 희정과 가까히 지내게 된 박실장의 존재와 출현이 희정에게 또 하나의 구속으로 다가오는 것을 희정이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탄식이 순식간에 달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늘을 향했던 희정의 초점은 정면으로 떨어졌고 달수도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지었다. 이미 엎지러진 물을 어쩌겠냐는 마음이었는지 달수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악 다문 입술을 재차 열었다.
“ 그래요… 부질없는 짓인 줄 알아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자… 이제 각자 갈 길로 가야겠죠.”
달수가 먼저 앞장을 섰고 잠시 주춤했던 희정이 잔디에 발을 끌며 달수의 뒤를 따랐다. 캠퍼스를 모두 가로질러 대학 정문에 다다를 때 까지 달수와 희정은 말이 없다. 둘은 거리를 두고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거기 누구야? ”
대학 정문에 다다르자 손전등을 비추며 경비원이 소리치자 늦여름 풀벌레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캠퍼스의 침묵은 깨졌다. 경비원이 가까이 다가오고 손전등의 빛이 더욱 강해지자 달수가 손을 들어 부신 눈을 막았고, 희정은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한 얼굴 빛을 띠며 몇 걸음 앞서가는 달수를 따라잡아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교정에 남아있는 거야… 어? 가만… 학생 같진 않고… 교수님이십니까? ”
“ 예 그런 셈이죠? 그렇죠 이 희정 교수님? 같이 연구할 게 밀려서…허허…”
달수의 너스레에 희정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달수의 ‘아’도 아니고 ‘어’도 아닌 야릇한 답변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경비원이 돌아서 정문으로 향해 걸어가 쪽문을 열었다. 달수는 그렇게 침 넘기는 소리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늦 여름 밤의 적막함을, 갑자기 들이닥친 소나기가 지붕을 때리는 듯한 분위기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바꾸었다. 숨 넘어갈 듯 한 다급함에는 오히려 구두 끈을 한 번 더 묶는 달수의 재치와 여유는 동찬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 안녕히 가십시오, 교수님…”
배웅을 하면서도 뒷머리를 극적거리고 고개를 꺄우뚱하는 경비원을 인사를 받자, 입가에 웃슴 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교정을 빠져나온 달수와 희정의 앞에는 캠퍼스와는 다른 번잡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고, 그 둘 사이에 흐르던 기류는 갑자기 사라지고 조금 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그들의 행동거지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도로변에 나란히 선 두사람은 또 다시 침묵을 유지한 채 택시를 기다렸다. 그들이 그렇게 좌우를 살피는 몸짓은 택시를 쫓는 행동이 아니라 정작 어색한 시간을 버티려는 몸짓이리라. 달수는 이순간을 그냥 말없이 흘려 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정도로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 순간을 잡아 묶어두지도 못했다.
택시가 그 둘의 앞에 멈춰 섰다. 달수가 희정을 위해 택시 문을 열어 젖기며 희정의 승차를 돕는데 희정이 택시에 오르지 않고 주춤하며 말했다.
“ 이 쪽 방향이 아녜요.”
“ 그 쪽으로 가면 주안역을 경유해서 서울로 가는 방향 맞아요.”
“ 저 오늘… 서울 안가요. 이번 주말은 화수동 집에서 지낼 거예요.”
“ 손님! 차 돌리면 되죠. 빨리 타세요. 바람이 많이 부네요. 어서요!”
아스팔트 도로와 턱진 인도 사이에 쌓여있는 먼지와 낙엽이 송도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다 바람에 섞여 택시 안으로 들이치자 택시 기사가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그들이 헤어져 각 각 다른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택시 기사가 알 리 없었다.
“ 손님 뭐 하세요. 빨리 타시라니까요.”
택시 뒷 자리에 나란히 앉은 달수와 희정은 또 다시 말이 없다. 택시 기사도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룸 밀러로 둘을 번갈아 보면서 씨익 웃더니 분위기를 띄웠다.
“ 늘 이 시간엔 대학 정문은 폐쇄가 되어 손님이 없는데 오늘 제가 재수가 좋은 모양입니다. 조~기 앞에서 손님을 내리고 곧 바로 손님을 받았으니 말이죠, 근데 서울 분이신 가봐요? ”
달수와 희정이 대답이 없자 운전기사는 분위기 띄우기 작전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달수와 희정의 관계를 자기 멋대로 해석하며 푼수 끼를 섞은 말투의 언성을 높였다.
“ 요즘 애인이라는 드라마 있잖아요? 유동근하고 황신혜가 나오는… 그 드라마 영향때문에 유부남 유부녀들 애인 갖는 게 대유행이래요. 아, 난 언제나 이 운짱 때려치고 그렇게 살아보나…쓰브럴…사납금 채우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는 이 팔자... 그건 그렇고 저기 손님들! 인천에 오셨으면 월미도에서 회를 먹고 바다를 구경하는 것이 최고죠, 그리로 모실까요?”
택시기사 입장에서는 인천의 끝자락까지 운행하는 것이 요금을 많이 받아내는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겠지만, 달수와 희정은 그의 말 끝에 어떤 교감이라도 이루어진 듯 서로를 본능적으로 힐끗 바라보았다.
“ 희정씨, 서울 가시지 않을 거면…”
“……”
달수가 말끝을 흐리고 머뭇거리면서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희정의 눈치를 살폈다. 또 한번 달수의 추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면 그것보다 멍청한 짓은 없다라는 것이 달수가 직원들에게 자주 쓰는 말이다.
“ 기사 아저씨 월미도에 진입해서 영창 피아노 공장 조금 더 들어가면 청해 횟집이라고 있었는데 아직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로 가 주세요.”
“아, 아녜요, 달수씨, 그냥 제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차 한 잔하고 헤어져요. 아마 희철이도 지금쯤 집에 와 있을 거예요.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는 거니까 그렇게 오래 지체할 수 없어요. 아저씨! 하인천 역 앞에서 세워주시면 돼요.”
속초에서 허름한 구멍가게를 하던 희정의 작은 아버지가 희정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 희철이 사법시험에 합격 후, 사법연수원과 낙민 공원을 사이에 두고 있는 롯데 아파트에 입주한 이후로 홀로 화수동 집을 지키고 있었다. 희정의 작은 아버지는 유일한 집안 어른으로 희정이 달수가 근무하는 부대를 찾아 속초에 갔을 때, 달수가 수연과 다정히 걸어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후 절망의 그림자를 안고 찾아갔던 사람이었다.
그 때 해녀로 생계로 꾸리던 작은 어머니가 오래 전 잠수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후 희정이 작은 아버지를 인천으로 모셨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제사를 일일히 챙길 수 없지만 명절이 되면 그 집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희정은 새해에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불어터진 떡국조차 한 그릇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동찬이 찾아가는 신년행사와 사교 모임에 반드시 따라 나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 그럼 동찬이도?…”
“ 아니요, 지금쯤 제주도에 있을 거예요, 내일 제주 관광단지 개발 컨소시엄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저녁 비행기로 떠난다고 했어요. 월요일이나 되서야 돌아올 거예요.”
“ 늘 같이 다니시잖아요? 근데 누가?... “
“ 박실장요, 박실장이 같이 갈 거예요.”
“ 박실장? 박 준위 말인가요?…희정씨하고 만나기로 한 카페입구에서 그 사람하고 만났어요. 그 사람이 박실장 맞군요. ”
희정이 두 차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룸 밀러로 힐끔거리는 운전사를 의식한 듯 나지막하고 조심스럽게 그에 대해 말했다. 달수는 그제서야 박 실장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박실장은 현재 동찬의 회사에서 일한다고 희정이 말했다. 그런데 희정의 말을 들어보니 박 실장은 동찬의 회사가 아닌 동찬을 위해 일한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찬의 편대가 동해상 초계 비행할 때 동찬은 전투기 유압계의 바늘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편대장에게 보고하자, 편대장은 동찬에게 전투기가 엔진 정지하면 전투기를 버리고 비상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동찬은 엔진이 정지되기 직전에 자대로 무사히 복귀하였고 그는 그 일로 십년 감수했지만 동찬은 끝까지 전투기를 버리지 않은 영웅이 되었다.
반 면 박 준위는 정비 불량의 책임으로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동찬은 박 준위가 전투기 정비시 일부 모세혈관 같은 복잡한 오일 배관 중 하나를 제대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전투기 조종단 감사 결과를 제일 먼저 입수했다. 그리고 직접 감사 책임자를 찾아가 그것이 박 준위의 실수가 아닌 불가항력적인 사고로 상부에 보고케 부탁하고 그 사실을 덮어 넘겼다. 동찬이 박 준위의 아내가 혈액암으로 투병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감사단장은 직접 피해자인 동찬이 부하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찬이 박 준위가 행정관으로 전보 조치되면 그가 정비사 수당을 받지 못해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을 배려한 이런 인연으로 박 준위는 동찬을 생명의 은인으로 받들었고 동찬의 비행기는 동찬이 불의를 사고를 당할 때 까지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했고 박 준위는 편대장 전투기 보다 동찬의 전투기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편대방이 자신의 전투기보다 동찬의 전투기가 더 광이 난다고 시기의 눈초리를 보낸 적도 있었다. 한 편 군복 벗을 것을 각오하고 동찬의 부탁을 들어준 정비 감사단장은 지금 동찬 회사의 전무가 되어있었다. 동찬은 이렇게 결초보은해서라도 은혜를 갚는 사람이고 그의 두터운 의리는 그가 신체적 결함으로 제대로 능력발휘를 할 수 없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부족함을 채우고도 넘쳐났다.
“ 동찬씨가 박 준위에게 전역을 권유하고 회사에 입사 시켰어요. 매우 성실하고 우직한 분이라 충성심도 대단한 분이예요. 달수씨가 옆 집을 사들여 박 준위가 거주할 수 있도록 했어요. 박 준위 아니, 박실장은 달수씨가 잠 드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잠자리에 들 정도니까요. 제가 할 일이 많이 줄었어요. 그래서 강단에 좀 더 많이 오를 수 있었고 오늘도 이렇게 시간을 낼 수가 있던 거 였고…이렇게 식구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동찬씨와 결혼하고 처음이예요.”
달수는 그렇게 말하는 희정의 얼굴에 왠지 새장에 갖힌 하얀 색 카나리아의 슬픈 눈빛을 읽었다. 사실 희정은 동찬과 함께 한 날부터 한 순간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동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의 손과 발이 되어 하루 24시간 그의 곁에서 그의 신체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그녀가 모두 감당해야 했었다.
그런 희정을 위해 동찬이 박 정비관을 스카우트했던 것이다. 희정을 좀 더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동찬의 생각으로 희정과 가까히 지내게 된 박실장의 존재와 출현이 희정에게 또 하나의 구속으로 다가오는 것을 희정이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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