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의여정] 연재소설 여정 48회
김시우
2008.02.12 14:55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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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인천 역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린 달수는 역전 횡단보도 너머 희정의 집으로 이어지는 자유공원 언덕길을 향하던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약간 틀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잠시 무엇인가 고심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달수는 갑자기 운명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 운명이란 것을 믿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로 진행된다고 믿기로 했다. 역사가 그렇고 사랑조차 그렇다. 다만 의지 밖에 있는 그리움을 잠시만, 마지막으로 아주 잠시만 허락 받으려는 것 뿐이라고 자신감을 부추겼다.
그 먼 옛날 그 때에도 이곳에서 그녀를 놓칠 뻔 했으나 저 언덕길을 단숨에 뛰어 올라 그녀를 따라잡아 재차 사랑을 확인했었다. 그러나 달수도 그 때와 지금의 사정은 확연히 달라져 있슴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언덕길을 올려다 보자 그 날의 용기와 애틋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달수가 하인천역 광장을 질러 횡단보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신호등의 색깔이 노란색으로 바뀌며 점멸하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빨간색으로 변한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선 그의 시선은, 아무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른 새벽의 흰 눈을 희정과 함께 즈려밟고 오르던 그 언덕길에 꽂혀 있었다.
그 때 차도에서는 횡단보도 앞의 정지선에 정차해있던 검정 세단이 있었으나 달수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 승용차는 자동차가 주행할 수 없는 희정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우회하기 위해 대로로 향하는 동찬의 그것이었으나, 동찬은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운전대에 두 손을 올리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신호등을 올려다 보는 박실장 역시 달수를 보지 못했다.
달수가 희정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 희정의 집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동찬을 실은 승용차가 자유공원 밑을 감아도는 대로를 지나,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다른 언덕 길을 올라 희정의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직감적으로도 거의 일치하는 듯 싶었다.
동찬은 공항 면세점에서 희정을 위해 구입한 최고급 반지 귀걸이 세트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 희정에게 깜짝쇼를 선사할 계획이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희정은 아침 상을 치우고 가족들과 함께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작은 아버지! 맥아더 장군 동상 한 번도 못 봤죠? 여기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되는데 우리 거기서 사진 찍고 인천 백화점 스카이라운지에서 점심 식사해요. 네?”
희정을 말을 들은 작은 아버지는 수심에 찬 아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다 쓰러져 가는 구멍가게의 수입이 변변치 못할 때, 그의 아내가 해녀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아내는 얼마지않아 잠수병이 걸렸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증세로 여전히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옆집에 몇 개월 전에 공원 돌 층계 길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친 아주머니가 쓰던 휠 체어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고 올께요.”
그럴 필요없다는 작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선 희정은 유령을 본 듯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달수가 희정의 집으로 혼동하고 있는 이웃 집의 대문에 걸려있는 명패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희정은 반쯤 열린 대문 안으로 되돌아 뛰어 들어가서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깊은 숨을 들이 내쉬었다. 문을 굳게 닫고 등을 기댄 그녀는 달수를 본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아 다시 대문을 조금 열어 제끼고 밖을 훔쳐 보았다.
한 집 한 집 명패를 확인하며 희정의 집으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히 달수였다. 그러던 달수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주위를 돌아보더니 다른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수평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언덕을 올라 평지에 올라서는 검정 세단이 희정의 집 근처에서 서행을 하며 주차할 공간을 찾아 서행하고 있었다.
박실장이 희정의 집에서 20미터 정도의 후방에 작은 공간을 발견하고 앞뒤로 차를 여러 차례 움직여 간신히 정차한 후 차에서 내리는 동찬을 도왔다. 동찬은 환한 표정으로 박실장의 부축을 받아 오른 손에 잡은 지팡이를 빠르게 옮기며 희정의 집 앞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눌렀다. 바로 대문 안에 숨어있다시피 서있는 희정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대로 주저 앉았다. 거실에서 초인종 소리를 들은 희철이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희정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동찬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슴을 알아차리고 대문을 지팡이로 대문을 두드리며 희정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희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달수도 아닌 제주도에 있어야 할 동찬의 카랑 카랑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방향감각을 잃어 엉뚱한 막다른 골목길에서 돌아 나오던 달수는 멀치감치 희정의 집안에서 나는 부산한 소리를 듣고 그 곳을 바라보았다. 달수 역시 희정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뒤통수에 둔기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
눈치와 머리 회전이 빠른 달수도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달수의 마음은 심증이 있지만 알리바이가 일치하는 피의자를 풀어주고 원점으로 되돌아 온, 어린 딸의 생일에도 같이 있어주지 못하고 며칠 째 귀가하지 못했던 고단한 형사의 그 마음 자체였다. 다시 골목 안으로 몸을 숨긴 달수는 그 부산함이 잠잠해지자 재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 조금전에 올랐던 언덕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언덕길을 내려와 하인천 역을 바라보는 달수는 어디로 향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달수의 심정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행복한 집의 창문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흘러나오는 행복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의 얼어붙은 그것이었다.
영화배우 최진규는 김지미와 이혼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했고, 그 김지미와 결혼한 가수 나훈아는 ‘헤어졌다는 소문이 나온 김에 헤어진다’고 했다. 그들은 대중의 시선을 즐기는 타락한 낭만이라도 있었지만 달수는 그렇지 못했다. 달수는 사랑의 종결을 고하는 신호를 진정으로 숨기고 싶었고, 그래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고독을 안고 있는 것이다.
‘눈물은 슬퍼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것’이라고 연애소설을 전문으로 쓰는 어느 삼류 소설가가 말했었다. 어쩌면 산다는 일이… 사랑을 한다는 것이 사실은 삼류에 더 가까운 것 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실은 삼류소설 속에 구질구질한 삶의 실체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겨운 진실들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은 일류 소설들처럼 절제되고 정제되어 구성이 뚜렷하며 인과관계가 확실한 한 편의 드라마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달수는 울고 있다. 가슴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있다.
얼굴에 영혼을 빼앗긴 듯 혼란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하릴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흐뜨러진 마음의 방향을 잡으려던 달수는 아무 결정과 계획없이 그냥 걸어야만 했다. 지금 달수에게는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고, 가다 보면 어느새 길이 있어 그 길로 그냥 걸어가는 것이었다.
눈밑에 고인 눈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들어 눈을 깜빡였다. 적어도 흘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뜨거운 눈물에 녹아있는 열정만큼은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달수의 눈에 공원 맞은 편의 또 다른 언덕에 자리잡은 올림푸스 호텔이 들어왔다. 그 때 달수의 어깨를 치며 반색을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 김달수... 김달수 맞지? ”
그는 다름 아닌 고등학교 강태훈이었다. 전국 청소년 권투선수권 대회에서 전승 무패로 반탐급 챔피언을 거머쥐었던, 키는 친구들 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지만 종아리가 다른 친구들의 허벅지만큼 굵어 장딴지라고 불리던 강태훈이었다.
달수는 갑자기 운명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 운명이란 것을 믿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로 진행된다고 믿기로 했다. 역사가 그렇고 사랑조차 그렇다. 다만 의지 밖에 있는 그리움을 잠시만, 마지막으로 아주 잠시만 허락 받으려는 것 뿐이라고 자신감을 부추겼다.
그 먼 옛날 그 때에도 이곳에서 그녀를 놓칠 뻔 했으나 저 언덕길을 단숨에 뛰어 올라 그녀를 따라잡아 재차 사랑을 확인했었다. 그러나 달수도 그 때와 지금의 사정은 확연히 달라져 있슴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언덕길을 올려다 보자 그 날의 용기와 애틋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달수가 하인천역 광장을 질러 횡단보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신호등의 색깔이 노란색으로 바뀌며 점멸하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빨간색으로 변한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선 그의 시선은, 아무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른 새벽의 흰 눈을 희정과 함께 즈려밟고 오르던 그 언덕길에 꽂혀 있었다.
그 때 차도에서는 횡단보도 앞의 정지선에 정차해있던 검정 세단이 있었으나 달수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 승용차는 자동차가 주행할 수 없는 희정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우회하기 위해 대로로 향하는 동찬의 그것이었으나, 동찬은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운전대에 두 손을 올리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신호등을 올려다 보는 박실장 역시 달수를 보지 못했다.
달수가 희정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 희정의 집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동찬을 실은 승용차가 자유공원 밑을 감아도는 대로를 지나,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다른 언덕 길을 올라 희정의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직감적으로도 거의 일치하는 듯 싶었다.
동찬은 공항 면세점에서 희정을 위해 구입한 최고급 반지 귀걸이 세트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 희정에게 깜짝쇼를 선사할 계획이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희정은 아침 상을 치우고 가족들과 함께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작은 아버지! 맥아더 장군 동상 한 번도 못 봤죠? 여기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되는데 우리 거기서 사진 찍고 인천 백화점 스카이라운지에서 점심 식사해요. 네?”
희정을 말을 들은 작은 아버지는 수심에 찬 아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다 쓰러져 가는 구멍가게의 수입이 변변치 못할 때, 그의 아내가 해녀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아내는 얼마지않아 잠수병이 걸렸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증세로 여전히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옆집에 몇 개월 전에 공원 돌 층계 길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친 아주머니가 쓰던 휠 체어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고 올께요.”
그럴 필요없다는 작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선 희정은 유령을 본 듯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달수가 희정의 집으로 혼동하고 있는 이웃 집의 대문에 걸려있는 명패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희정은 반쯤 열린 대문 안으로 되돌아 뛰어 들어가서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깊은 숨을 들이 내쉬었다. 문을 굳게 닫고 등을 기댄 그녀는 달수를 본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아 다시 대문을 조금 열어 제끼고 밖을 훔쳐 보았다.
한 집 한 집 명패를 확인하며 희정의 집으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히 달수였다. 그러던 달수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주위를 돌아보더니 다른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수평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언덕을 올라 평지에 올라서는 검정 세단이 희정의 집 근처에서 서행을 하며 주차할 공간을 찾아 서행하고 있었다.
박실장이 희정의 집에서 20미터 정도의 후방에 작은 공간을 발견하고 앞뒤로 차를 여러 차례 움직여 간신히 정차한 후 차에서 내리는 동찬을 도왔다. 동찬은 환한 표정으로 박실장의 부축을 받아 오른 손에 잡은 지팡이를 빠르게 옮기며 희정의 집 앞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눌렀다. 바로 대문 안에 숨어있다시피 서있는 희정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대로 주저 앉았다. 거실에서 초인종 소리를 들은 희철이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희정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동찬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슴을 알아차리고 대문을 지팡이로 대문을 두드리며 희정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희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달수도 아닌 제주도에 있어야 할 동찬의 카랑 카랑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방향감각을 잃어 엉뚱한 막다른 골목길에서 돌아 나오던 달수는 멀치감치 희정의 집안에서 나는 부산한 소리를 듣고 그 곳을 바라보았다. 달수 역시 희정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뒤통수에 둔기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
눈치와 머리 회전이 빠른 달수도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달수의 마음은 심증이 있지만 알리바이가 일치하는 피의자를 풀어주고 원점으로 되돌아 온, 어린 딸의 생일에도 같이 있어주지 못하고 며칠 째 귀가하지 못했던 고단한 형사의 그 마음 자체였다. 다시 골목 안으로 몸을 숨긴 달수는 그 부산함이 잠잠해지자 재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 조금전에 올랐던 언덕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언덕길을 내려와 하인천 역을 바라보는 달수는 어디로 향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달수의 심정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행복한 집의 창문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흘러나오는 행복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의 얼어붙은 그것이었다.
영화배우 최진규는 김지미와 이혼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했고, 그 김지미와 결혼한 가수 나훈아는 ‘헤어졌다는 소문이 나온 김에 헤어진다’고 했다. 그들은 대중의 시선을 즐기는 타락한 낭만이라도 있었지만 달수는 그렇지 못했다. 달수는 사랑의 종결을 고하는 신호를 진정으로 숨기고 싶었고, 그래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고독을 안고 있는 것이다.
‘눈물은 슬퍼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것’이라고 연애소설을 전문으로 쓰는 어느 삼류 소설가가 말했었다. 어쩌면 산다는 일이… 사랑을 한다는 것이 사실은 삼류에 더 가까운 것 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실은 삼류소설 속에 구질구질한 삶의 실체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겨운 진실들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은 일류 소설들처럼 절제되고 정제되어 구성이 뚜렷하며 인과관계가 확실한 한 편의 드라마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달수는 울고 있다. 가슴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있다.
얼굴에 영혼을 빼앗긴 듯 혼란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하릴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흐뜨러진 마음의 방향을 잡으려던 달수는 아무 결정과 계획없이 그냥 걸어야만 했다. 지금 달수에게는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고, 가다 보면 어느새 길이 있어 그 길로 그냥 걸어가는 것이었다.
눈밑에 고인 눈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들어 눈을 깜빡였다. 적어도 흘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뜨거운 눈물에 녹아있는 열정만큼은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달수의 눈에 공원 맞은 편의 또 다른 언덕에 자리잡은 올림푸스 호텔이 들어왔다. 그 때 달수의 어깨를 치며 반색을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 김달수... 김달수 맞지? ”
그는 다름 아닌 고등학교 강태훈이었다. 전국 청소년 권투선수권 대회에서 전승 무패로 반탐급 챔피언을 거머쥐었던, 키는 친구들 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지만 종아리가 다른 친구들의 허벅지만큼 굵어 장딴지라고 불리던 강태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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