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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인하대학교 동문회

통합게시판

[동문칼럼] 아리랑

하태돈
2009.03.12 22:28 1,267 1

본문

김영임의 아리랑 CD를 구해서 출퇴근길에 가끔 듣고 다닌다. 기분이 꿀꿀한 날이면 더욱 어울리는 노래인데 거기에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다.


그리고 지금 조선은…, 과연 극동에서의 이 전쟁이 조선을 해방시키게 되지 않을까? 나는 해방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내 조국을 위한 활동을 재개하여 조국의 전진을 도와야 한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리는 아룸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이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서울 근처에는 아이랑 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 진 가지에 목이 매여 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졋다. 그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조선왕조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 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상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끊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가밓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의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더라도 결국에가서는 죽음만이 남게 될 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더욱 많으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 유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돌아가게 돌 것이다. (‘회상’ 편에서 인용)


이 책은 1937년 중국에서 심산과 님 웨일즈가 우연히 만나게 됨으로서 기록이 되게된다. 님 웨일즈는 너무도 유명한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을 쓴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으로 본명은 헬렌 스노우Helen Foster Snow이며 님 웨일즈Nym Wales는 필명이다.

김산은 분명 공산주이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올바를 평가를 받을 수 없었고, 이 책 조차도 어느정도 지적 호기심과 사상적 관심을 갖은 일부에게서만 그늘에서 돌려가며 읽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있는 실패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였으며, 오히려 1920 , 30년대에 일제 제국주의에 대항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제 침략주의에 대한 투쟁의 수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이책의 저변에 나타나 듯이 톨스토이의 인류애 또는 휴머니즘적 감성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이다.

님 웨일즈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김산의 생애가 기록 될 수 있었는데, 님 웨일즈와 20여차례 만나며 기록한 내용이 아리랑 이라는 소설로 소개가 된다. 김산은 본명이 장지락張志樂으로 어려서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나 동경을 거쳐 북경으로 가서는 20대 초반에 무정부 주의자, 그리고 곧바로 마르크스 레닌 주의자가 되나 그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자 였던 것이다. 그 후에 상해, 북경 등 중국 전역을 오가며 공산주의 활동을 펼치는데 오로지 그것은 항일투쟁의 수단이었다. 수 차례 중국경찰과 일본경찰에 체포를 당하고 고문을 당해도 변절하지 않으나 그의 몸은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다. 결국 일본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하나 1983년도에는 중국공산당에 의해 복권이 된다.

극한 상황속에서 오히려 더욱 빛나는 김산의 사상가적 지성과 고난과 좌절 속에서 더욱 강인해지는 혁명가적 신념에 감동이 없을 수 없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 였으며, 혁명가이자 인텔리 사상가였다. 역사는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고 되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김산같은 혁명가에게는 역사는 불평등 했는지 모르겠다. 세월이 지나 지나 역사, 그리고 그 역사의 그늘에 가려있던 인물들의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진다면 분명 김산같이 알려지지 않았던,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인물들의 활동상이 더 많이 밝혀 질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 열매를 맺었지만 Rosa Parks가 민권운동의 대모(The Mother of Mordern-day Civil Rights Movement) 였다. 마찬가지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 외에도 수 많은 알려지지 않은 애국투사들이 있을 것이다. 진정 그들이 이데올로기를 떠나 올바른 평가를 받을 날이 올것이다.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 – 아리랑, 동녘, 1984
Song of Ariran by Nym Wales and Kim San, 1941


2009년 3월
하 태돈

댓글목록 1

지용철님의 댓글

지용철 2009.03.13 11:00
님 웨일즈 아리랑...기억이 새롭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