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칼럼] 난 고 " 김 병 연 " 선 생 2부
이중우
2009.04.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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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詩仙 김 삿 갓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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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순조 7년 (1807년) 3월 13일에 안동 김씨의 시조인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부는 선천부사
김익순이고, 부는 안근과 모는 함평 이씨 사이의 2남으로 경기도 양주군회천면 화암리에서 출생했다.
명(名)은 병연(炳淵), 자(子)는 성심(性深), 호(號)는 난고(蘭皐),이고 립(笠)은 속칭 이다.
시조 김선평은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 (안동 )의 성주로 경순왕 원년 ( 927년 )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경순왕 4년 ( 930년 )에 권행,장정필과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 안동 )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으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무렵 고려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되고 벼슬이 태광태사 (太匡太師)가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의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중시조 ( 1 세 )로 하고 있다.
순조 11년(1811년) 신미년 12월, 선생이 나이 5세때 홍경래가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홍경래는 평서대원수라 자칭해 가면서 1대는 가산,박천을 함락 시키면서 서울로 남진 하였고,
다른 1대는 서북으로 진격하여 곽산,정주,선천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해 버렸다.
그때 가산 군수 정시는 문관이면서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하였고, 반면에
선천방어사 김익순은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 출신임에 불구하고 반란군이 처들어오자,
싸우기는 커녕 즉석에서 항복을 햬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나자,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했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략되자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모친과 형,선생을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애 숨어 지내다가 선생 8세에 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 국한 하기로 한 조정의 사면으로
모친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나 가족이 터를 잦고 살수가 없어, 광주 이천,가평은 전전 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리에 정착했다.
집안을 다시 일으켜 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선생은 5세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 하였고,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었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대로 섭렵해 왔기에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본시 글 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심이나 출세욕 같은데는 관심이 없었다.
순조 32년 (1826년) 선생 갓 20세에 모친의 간청으로 백일장을 보게도는데, 백일장이란 초야에서
학문을 닦고있는 무명유생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과거와 같은것이다.
그날의 백일장 시제가 << 論鄭嘉山忠節死, 灘金益淳罪通于天 >>
선생은 평소부터 반란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가산 군수 정시를 <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 왔고,반면에 김익순은 <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 >로 몹시 경멸 하던차에,
시제를 보고는 김익순에 대하여< 필봉을 마음껏 휘둘러 비겁하기 짝없는 네놈을 뼈도 못 추리게 탄핵 하리라 > 하고 1부에 있는 시로서 장원 급제를 했고, 술 한잔 걸쭉하게 걸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홀 어머니에게 자랑을 시작 하였는데, 이야기를 듣는 도중 어머니가 갑자기 기절하시고 이내 정신을 차리시며 이제까지 숨겨 오셨던 그의 집안 내력을 눈물을 흘리시며 가르쳐 주시니 바로 김익순이라는 사람이 선생의 조부 이셨던 것이다.
반역자는 3대를 멸하라는 그때의 법에따라 선생도 죽어야 했지만,모친은 깊은 곳에 숨어 살고 때로는 도망도 다니면서 선생의 뒷 바라지를 하시며, 후일에 선생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주리라는 기대로 집안내력을 숨겨 왔는데 오늘 같은 날이 온 것이다.
그의 조부를 욕되게 하고 장원 급제를 하였으니 그것도 반역자의 후손으로말이다.
후에 어머님이 말씀 해 주시길 ; 그의 조부는 술취해 주무시고 계시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반항할 틈도 없이 포로로 잡히신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말에 선생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문득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의 아내와 이제 낳은지 얼마 안되는 아이와 선생만 바라보며 한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와 가슴 아픈 눈물을 뒤로 하고 발랑의 길를 떠났으니 ( 선생 22세 )
(( 앞으로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는 죄인이니 삿갓을 쓰도록 하며 이름도 김병연을 지우고 김삿갓으로스스로 부르리라 ))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 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4년뒤애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는데,
이때 둘째아들 "익균"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 충청도,경상도로 돌았으며,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훈장 노릇을 하였다.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때 자라던 황해도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
하다가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찿아온 아들 익균과 만나 익균이 잠든사이에 도망 하였다가 1년만에 또
찿아온 익균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 쳤다.
3년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 먹었다가 또 변심하여,용변을 핑계로
도피 하였다.
선생 나이 57세때 전라도 동복땅에 쓰러져 있는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뒤 지리산을 두루두루 살펴본 뒤, 3년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 돌아와 힌 많은 생애를 마쳤다.
3년후 아들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그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 戱畵的)으로 한시에 파격적인 요인이 되었다
한 얘로 ; 숫자 시
<< 二 十 樹 下 三 十 客 四 十 村 中 五 十 食 人 間 豈 有 七 十 事 不 如 歸 家 三 十 食 >>
<< 이 십 수 하 삼 십 객 사 십 촌 중 오 십 식 인 간 개 유 칠 십 사 불 여 귀 가 삼 십 식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에게
망할 놈의 동네에선 쉰 밥을 주는구나
세상이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고향집에 돌아가 설 익은 밥 만 못 하리라.
2부를 마치며, 3부에서는 " 난고 " 선생의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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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순조 7년 (1807년) 3월 13일에 안동 김씨의 시조인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부는 선천부사
김익순이고, 부는 안근과 모는 함평 이씨 사이의 2남으로 경기도 양주군회천면 화암리에서 출생했다.
명(名)은 병연(炳淵), 자(子)는 성심(性深), 호(號)는 난고(蘭皐),이고 립(笠)은 속칭 이다.
시조 김선평은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 (안동 )의 성주로 경순왕 원년 ( 927년 )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경순왕 4년 ( 930년 )에 권행,장정필과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 안동 )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으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무렵 고려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되고 벼슬이 태광태사 (太匡太師)가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의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중시조 ( 1 세 )로 하고 있다.
순조 11년(1811년) 신미년 12월, 선생이 나이 5세때 홍경래가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홍경래는 평서대원수라 자칭해 가면서 1대는 가산,박천을 함락 시키면서 서울로 남진 하였고,
다른 1대는 서북으로 진격하여 곽산,정주,선천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해 버렸다.
그때 가산 군수 정시는 문관이면서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하였고, 반면에
선천방어사 김익순은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 출신임에 불구하고 반란군이 처들어오자,
싸우기는 커녕 즉석에서 항복을 햬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나자,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했다.
역적의 집안으로 전략되자 멸족을 우려한 부친이 모친과 형,선생을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애 숨어 지내다가 선생 8세에 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 국한 하기로 한 조정의 사면으로
모친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나 가족이 터를 잦고 살수가 없어, 광주 이천,가평은 전전 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리에 정착했다.
집안을 다시 일으켜 보려는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선생은 5세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 하였고,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었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대로 섭렵해 왔기에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본시 글 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심이나 출세욕 같은데는 관심이 없었다.
순조 32년 (1826년) 선생 갓 20세에 모친의 간청으로 백일장을 보게도는데, 백일장이란 초야에서
학문을 닦고있는 무명유생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과거와 같은것이다.
그날의 백일장 시제가 << 論鄭嘉山忠節死, 灘金益淳罪通于天 >>
선생은 평소부터 반란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가산 군수 정시를 <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 왔고,반면에 김익순은 <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 >로 몹시 경멸 하던차에,
시제를 보고는 김익순에 대하여< 필봉을 마음껏 휘둘러 비겁하기 짝없는 네놈을 뼈도 못 추리게 탄핵 하리라 > 하고 1부에 있는 시로서 장원 급제를 했고, 술 한잔 걸쭉하게 걸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홀 어머니에게 자랑을 시작 하였는데, 이야기를 듣는 도중 어머니가 갑자기 기절하시고 이내 정신을 차리시며 이제까지 숨겨 오셨던 그의 집안 내력을 눈물을 흘리시며 가르쳐 주시니 바로 김익순이라는 사람이 선생의 조부 이셨던 것이다.
반역자는 3대를 멸하라는 그때의 법에따라 선생도 죽어야 했지만,모친은 깊은 곳에 숨어 살고 때로는 도망도 다니면서 선생의 뒷 바라지를 하시며, 후일에 선생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주리라는 기대로 집안내력을 숨겨 왔는데 오늘 같은 날이 온 것이다.
그의 조부를 욕되게 하고 장원 급제를 하였으니 그것도 반역자의 후손으로말이다.
후에 어머님이 말씀 해 주시길 ; 그의 조부는 술취해 주무시고 계시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반항할 틈도 없이 포로로 잡히신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말에 선생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문득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의 아내와 이제 낳은지 얼마 안되는 아이와 선생만 바라보며 한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와 가슴 아픈 눈물을 뒤로 하고 발랑의 길를 떠났으니 ( 선생 22세 )
(( 앞으로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는 죄인이니 삿갓을 쓰도록 하며 이름도 김병연을 지우고 김삿갓으로스스로 부르리라 ))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 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4년뒤애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는데,
이때 둘째아들 "익균"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 충청도,경상도로 돌았으며,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훈장 노릇을 하였다.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때 자라던 황해도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
하다가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찿아온 아들 익균과 만나 익균이 잠든사이에 도망 하였다가 1년만에 또
찿아온 익균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 쳤다.
3년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 먹었다가 또 변심하여,용변을 핑계로
도피 하였다.
선생 나이 57세때 전라도 동복땅에 쓰러져 있는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뒤 지리산을 두루두루 살펴본 뒤, 3년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 돌아와 힌 많은 생애를 마쳤다.
3년후 아들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그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 戱畵的)으로 한시에 파격적인 요인이 되었다
한 얘로 ; 숫자 시
<< 二 十 樹 下 三 十 客 四 十 村 中 五 十 食 人 間 豈 有 七 十 事 不 如 歸 家 三 十 食 >>
<< 이 십 수 하 삼 십 객 사 십 촌 중 오 십 식 인 간 개 유 칠 십 사 불 여 귀 가 삼 십 식
스무 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에게
망할 놈의 동네에선 쉰 밥을 주는구나
세상이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고향집에 돌아가 설 익은 밥 만 못 하리라.
2부를 마치며, 3부에서는 " 난고 " 선생의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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