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섭의종교칼럼] 최고의 선물은 영원한 오늘!
임동섭
2009.12.1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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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최고의 선물은 영원한 오늘!
전도서 3장 11~14절
1965년 경 라디오 드라마 ‘하숙생’이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제곡을 부른 가수는 최희준 씨였습니다. 그는 지방의 한 극장의 쇼 무대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히트곡들을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려는데 ‘하숙생’을 불러달라는 함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하숙생’드라마 주제곡을 5일 전에 녹음했기 때문에 가사를 미처 암송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는 가사를 다 외우지 못하니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고 내려왔답니다.
그날 밤 방송되는 드라마 주제곡을 듣고 가사를 받아 적은 후 외워서 그날 밤 쇼 무대에서 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인기가 있었는지 하루에 3번 부른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회고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하숙생’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 인생은 나그네 길 /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1절)
인생은 벌거숭이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 인생은 벌거숭이 /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2절)
이 노래가 인기가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인생을 노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사를 자세히 보면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아무런 답변이 없습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 미련도 두지 말자고 합니다. 정도 미련도 두지 않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 삶입니까?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평가 기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사람을 위대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칭기즈 칸(1162~1227년)’일 것입니다. 그는 당시 세계의 땅의 반절을 차지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몽골은 후진국으로 남아있습니다. 오직 그의 이름을 ‘칭기즈 칸 국제공항’이 있을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넓은 땅을 차지한 인물이라면 ‘알렉산더 대왕’일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세계의 1/3을 차지한 왕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대화는 유명한 일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조그만 나무 통속에서 살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한 번 보고 싶어 초청을 해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마침 디오게네스는 통속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대 철학자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한 알렉산더 대왕이 “선생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소.”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청이 하나 있소. 저리 비켜 서 주시오.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의 권세나 물질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와 헤어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대왕이오. 누가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결코 디오게네스가 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당시 땅 끝이라 생각했던 인도까지 정복했지만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20세에 왕이 되어 32세에 죽었습니다(BC356~323). 그의 이름을 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이름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도 100년만 지나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유한한 결과를 이룰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한 것에만 만족을 얻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은 부자가 되려고 애쓰며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본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솔로몬’입니다.
그는 권력을 누려본 사람입니다. 그는 21세에 이스라엘의 3대 왕이 되어 40년간 통치하였습니다(BC961~922). 마병이 12,000, 병거가 1,400 대가 있었습니다. 영토는 유브라데에서 애굽까지였고, 그 백성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는 잠언,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시편의 일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삼천 잠언과 천다섯 편의 시가는 훌륭한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도 풍성했습니다. 그는 일천번제 후 하나님께서 지혜와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창기가 한집에서 아이를 낳아 한 아이가 깔려죽자 남은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은 칼로 아이를 나누어 주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아이를 죽게 한 여인은 둘로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친어머니는 아이를 나누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라고 외쳤습니다. 솔로몬은 나누지 말라고 한 여인이 어머니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는 신앙도 뛰어났습니다. 솔로몬은 즉위 4년 2월에 성전을 시공하여 11년 8월(7년 6개월)에 준공했습니다. 성전을 헌당하면서 드렸던 기도는(왕상8:12~9:9) 훌륭한 모범적인 기도였습니다. 이때 화목제로 소 22,000과 양 12만 마리를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 통이 큰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부귀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궁전의 하루 식량은 밀가루가 90석, 살찐 소가 40마리, 양이 100마리였습니다. 그는 특히 무역(해상)으로 부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그는 1,000명의 여인을 거느렸습니다. 후비가 700명이였고 빈장이 300명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경험담을 잘 후세에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다 경험해본 후에 기록한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전도서의 시작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말년에 깨달은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말하면 믿을 수가 없지만, 다 경험해본 솔로몬의 경험담은 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한 것(하나님의 형상)을 사모하도록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11절). 사람들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방법 중의 하나가 노후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손에게 상속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력을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에 따라 노력하면 어느 정도 인생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어떤 사람은 다음 세상에서 부활하려는 소망을 품고 ‘미라’를 만들어 ‘피라미드’ 안에 안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라’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영생하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허사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하고 있지만 왜 모두 만족하지 못할까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예측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11절). 신명기 13장 1~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을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은 사람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접하려면 오직 지상의 유한한 삶 속에 오셔서 그 유한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영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야만 합니다. 즉 영원한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은 영원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오늘이라는 선물(12,13절)입니다. 사는 동안에 기뻐(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어의 오늘(Present)은 선물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국어 오늘은 오!(감탄사 오!)와 늘!(영원히)이 합해진 단어입니다. 즉 영원히 감탄하면서 사는 것이 오늘입니다.
또 하나의 선물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12절).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십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을 닮아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것은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14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을 두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지 않고도 숨을 쉬고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송명희 시인의 고백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 의사가 실수로 뇌를 잘못 건드려서 뇌성마비가 되었습니다. 일곱 살 때까지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고, 열 살이 되어서야 숟가락을 겨우 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폐결핵 환자로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과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7살이 된 그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은 한 번 꼭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왜 이런 몰골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는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문득 세미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명희야! 네 몸이 온전했더라면 네가 나를 알았겠느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놀랍게도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녀는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그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수많은 감동의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대표작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복음 성가로도 불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 세상으로 끝난다면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내세가 있어야 인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즉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영원한 처소 예비하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21:4)”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가감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오늘을 기뻐하며 선을 행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14절).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을 계속 사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이 땅의 수고에 매이지 않고 지치지 않고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가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고통까지도 기쁨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포근한 교회 임동섭 목사 / 응용물리 72 / 콜로라도 덴버 / kgoodnews.com)
전도서 3장 11~14절
1965년 경 라디오 드라마 ‘하숙생’이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제곡을 부른 가수는 최희준 씨였습니다. 그는 지방의 한 극장의 쇼 무대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히트곡들을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려는데 ‘하숙생’을 불러달라는 함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하숙생’드라마 주제곡을 5일 전에 녹음했기 때문에 가사를 미처 암송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는 가사를 다 외우지 못하니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고 내려왔답니다.
그날 밤 방송되는 드라마 주제곡을 듣고 가사를 받아 적은 후 외워서 그날 밤 쇼 무대에서 부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인기가 있었는지 하루에 3번 부른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회고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하숙생’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 인생은 나그네 길 /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1절)
인생은 벌거숭이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 인생은 벌거숭이 /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2절)
이 노래가 인기가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인생을 노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사를 자세히 보면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아무런 답변이 없습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 미련도 두지 말자고 합니다. 정도 미련도 두지 않는 삶이 얼마나 허무한 삶입니까? 이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평가 기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사람을 위대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칭기즈 칸(1162~1227년)’일 것입니다. 그는 당시 세계의 땅의 반절을 차지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몽골은 후진국으로 남아있습니다. 오직 그의 이름을 ‘칭기즈 칸 국제공항’이 있을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넓은 땅을 차지한 인물이라면 ‘알렉산더 대왕’일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세계의 1/3을 차지한 왕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대화는 유명한 일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조그만 나무 통속에서 살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한 번 보고 싶어 초청을 해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마침 디오게네스는 통속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대 철학자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한 알렉산더 대왕이 “선생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소.”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청이 하나 있소. 저리 비켜 서 주시오.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의 권세나 물질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와 헤어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대왕이오. 누가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결코 디오게네스가 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당시 땅 끝이라 생각했던 인도까지 정복했지만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20세에 왕이 되어 32세에 죽었습니다(BC356~323). 그의 이름을 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이름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도 100년만 지나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유한한 결과를 이룰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원한 것에만 만족을 얻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은 부자가 되려고 애쓰며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본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솔로몬’입니다.
그는 권력을 누려본 사람입니다. 그는 21세에 이스라엘의 3대 왕이 되어 40년간 통치하였습니다(BC961~922). 마병이 12,000, 병거가 1,400 대가 있었습니다. 영토는 유브라데에서 애굽까지였고, 그 백성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는 잠언,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시편의 일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삼천 잠언과 천다섯 편의 시가는 훌륭한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도 풍성했습니다. 그는 일천번제 후 하나님께서 지혜와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일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창기가 한집에서 아이를 낳아 한 아이가 깔려죽자 남은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솔로몬은 칼로 아이를 나누어 주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아이를 죽게 한 여인은 둘로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친어머니는 아이를 나누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라고 외쳤습니다. 솔로몬은 나누지 말라고 한 여인이 어머니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는 신앙도 뛰어났습니다. 솔로몬은 즉위 4년 2월에 성전을 시공하여 11년 8월(7년 6개월)에 준공했습니다. 성전을 헌당하면서 드렸던 기도는(왕상8:12~9:9) 훌륭한 모범적인 기도였습니다. 이때 화목제로 소 22,000과 양 12만 마리를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 통이 큰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부귀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궁전의 하루 식량은 밀가루가 90석, 살찐 소가 40마리, 양이 100마리였습니다. 그는 특히 무역(해상)으로 부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그는 1,000명의 여인을 거느렸습니다. 후비가 700명이였고 빈장이 300명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경험담을 잘 후세에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다 경험해본 후에 기록한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전도서의 시작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말년에 깨달은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말하면 믿을 수가 없지만, 다 경험해본 솔로몬의 경험담은 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한 것(하나님의 형상)을 사모하도록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11절). 사람들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방법 중의 하나가 노후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손에게 상속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력을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에 따라 노력하면 어느 정도 인생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영원히 살고 싶은 어떤 사람은 다음 세상에서 부활하려는 소망을 품고 ‘미라’를 만들어 ‘피라미드’ 안에 안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라’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영생하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은 허사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하고 있지만 왜 모두 만족하지 못할까요?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예측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11절). 신명기 13장 1~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을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은 사람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접하려면 오직 지상의 유한한 삶 속에 오셔서 그 유한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영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야만 합니다. 즉 영원한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은 영원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오늘이라는 선물(12,13절)입니다. 사는 동안에 기뻐(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어의 오늘(Present)은 선물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국어 오늘은 오!(감탄사 오!)와 늘!(영원히)이 합해진 단어입니다. 즉 영원히 감탄하면서 사는 것이 오늘입니다.
또 하나의 선물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12절).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십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을 닮아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것은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14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을 두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산소 호흡기를 달지 않고도 숨을 쉬고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송명희 시인의 고백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태어날 때 의사가 실수로 뇌를 잘못 건드려서 뇌성마비가 되었습니다. 일곱 살 때까지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고, 열 살이 되어서야 숟가락을 겨우 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폐결핵 환자로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과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7살이 된 그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은 한 번 꼭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왜 이런 몰골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는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문득 세미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명희야! 네 몸이 온전했더라면 네가 나를 알았겠느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놀랍게도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녀는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그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수많은 감동의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대표작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복음 성가로도 불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 세상으로 끝난다면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내세가 있어야 인생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즉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영원한 처소 예비하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21:4)”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가감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오늘을 기뻐하며 선을 행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14절).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을 계속 사모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이 땅의 수고에 매이지 않고 지치지 않고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가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고통까지도 기쁨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포근한 교회 임동섭 목사 / 응용물리 72 / 콜로라도 덴버 / kgoodnews.com)
댓글목록 1
박명근님의 댓글
새해도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