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섭의종교칼럼] 기죽지 않고 사는 길!
임동섭
2011.03.1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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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기죽지 않고 사는 길!
저는 지방대학에서 2년 동안 물리실험 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력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류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가 어려운데 지방대학 졸업해봐야 별 볼일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수업을 수강하던 ‘병두’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의 동네는 80가정이 사는 시골이었습니다. 그 동네가 생긴 이래 4년제 대학에 입학한 대학생은 ‘병두’가 최초였습니다. 시골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큰잔치가 열렸습니다. 동네 아가씨들은 ‘병두’의 눈에 들기 위해 서로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오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지방대학에 다니는 것도 열등감을 느끼기에 충분한데, 더욱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야간대학에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참담한 것은 같은 반 학생들 중에서 실력이 처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강의 도중에 가끔 저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22가정이 사는 농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3학년 전체 학생이 120여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경인지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4명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저였습니다.
저도 ‘병두’학생처럼 고향에 내려가면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제가 걷는 것이 아니라 제 발에 지구가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오면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기타를 잘 치는 학생도 많았고, 영어를 잘하는 학생도 많았고, 여대생들을 자유자재로 웃기는 인기 많은 학생도 많았습니다.
대학 1학년은 기숙사에서 보냈습니다. 네 명의 학생이 한 방을 썼습니다. 우리 방에는 3학년 건축과 1명, 2학년 기계과 1명, 1학년 2명이었습니다. 하루는 건축과 선배님이 ‘여학생 데려오기’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한 시간 이내에 여학생을 다방(Coffee Shop)까지 데려오는데 가장 늦게 데려오는 사람이 저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과 선배님은 10분 정도에 데려왔고, 기계과 선배님은 25분 이내에 데려왔고, 1학년 2명은 결국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면 열등감을 느낄 것입니다. 축구를 잘해도 기타를 잘 치는 사람 앞에 서면 열등감을 느낄 것입니다. 누구라도 모든 면에서 1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열등감을 느끼며 삽니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모든 여성들도 인민복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고급 당 간부이거나 부자인 여성들은 자기가 남보다 나은 것을 보이고 싶어 인민복 윗단추를 풀고 속에 입은 비단 블라우스가 보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살아도 만족할 수 없고, 실제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불평등한 상태로 살게 됩니다. 당연히 서로 비교하게 되고 결국 열등감에 시달리며 사는 것을 봅니다.
저의 연구실에는 물리실험을 도와주는 학생조교들이 있었습니다. ‘병두’가 학생조교들을 만나러 낮 시간에 자주 왔었습니다. 그에게 저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더니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졸업한 후에 남대문 시장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6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큰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처방은 섬기는 자가 되면 큰 사람이 되고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골 비포장도로를 걸어갈 때 가끔 고급승용차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 존경심을 갖고 우러러 보기를 원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차가 지나간 뒤에 뽀얗게 일어난 먼지 속에서 ‘먼지 도둑놈’이 지나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덩치가 큰 자녀가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엄마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왜 다 큰 아이가 꼼짝하지 못할까요? 엄마가 그동안 자신을 희생적으로 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섬길 때 영적 권위가 부여됩니다. 섬길 때에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섬김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포근한 교회 / 임동섭 목사 / 응용물리 72 / 콜로라도 덴버 / kgoodnews.com)
저는 지방대학에서 2년 동안 물리실험 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력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류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가 어려운데 지방대학 졸업해봐야 별 볼일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수업을 수강하던 ‘병두’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의 동네는 80가정이 사는 시골이었습니다. 그 동네가 생긴 이래 4년제 대학에 입학한 대학생은 ‘병두’가 최초였습니다. 시골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큰잔치가 열렸습니다. 동네 아가씨들은 ‘병두’의 눈에 들기 위해 서로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오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지방대학에 다니는 것도 열등감을 느끼기에 충분한데, 더욱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야간대학에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참담한 것은 같은 반 학생들 중에서 실력이 처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강의 도중에 가끔 저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22가정이 사는 농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3학년 전체 학생이 120여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경인지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4명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저였습니다.
저도 ‘병두’학생처럼 고향에 내려가면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제가 걷는 것이 아니라 제 발에 지구가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오면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기타를 잘 치는 학생도 많았고, 영어를 잘하는 학생도 많았고, 여대생들을 자유자재로 웃기는 인기 많은 학생도 많았습니다.
대학 1학년은 기숙사에서 보냈습니다. 네 명의 학생이 한 방을 썼습니다. 우리 방에는 3학년 건축과 1명, 2학년 기계과 1명, 1학년 2명이었습니다. 하루는 건축과 선배님이 ‘여학생 데려오기’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한 시간 이내에 여학생을 다방(Coffee Shop)까지 데려오는데 가장 늦게 데려오는 사람이 저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건축과 선배님은 10분 정도에 데려왔고, 기계과 선배님은 25분 이내에 데려왔고, 1학년 2명은 결국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면 열등감을 느낄 것입니다. 축구를 잘해도 기타를 잘 치는 사람 앞에 서면 열등감을 느낄 것입니다. 누구라도 모든 면에서 1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열등감을 느끼며 삽니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모든 여성들도 인민복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고급 당 간부이거나 부자인 여성들은 자기가 남보다 나은 것을 보이고 싶어 인민복 윗단추를 풀고 속에 입은 비단 블라우스가 보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살아도 만족할 수 없고, 실제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불평등한 상태로 살게 됩니다. 당연히 서로 비교하게 되고 결국 열등감에 시달리며 사는 것을 봅니다.
저의 연구실에는 물리실험을 도와주는 학생조교들이 있었습니다. ‘병두’가 학생조교들을 만나러 낮 시간에 자주 왔었습니다. 그에게 저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더니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졸업한 후에 남대문 시장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6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큰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처방은 섬기는 자가 되면 큰 사람이 되고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골 비포장도로를 걸어갈 때 가끔 고급승용차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 존경심을 갖고 우러러 보기를 원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차가 지나간 뒤에 뽀얗게 일어난 먼지 속에서 ‘먼지 도둑놈’이 지나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덩치가 큰 자녀가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엄마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왜 다 큰 아이가 꼼짝하지 못할까요? 엄마가 그동안 자신을 희생적으로 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섬길 때 영적 권위가 부여됩니다. 섬길 때에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섬김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포근한 교회 / 임동섭 목사 / 응용물리 72 / 콜로라도 덴버 / kgoo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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